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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론의 위기, 파국론의 파국(1) : 초록이의 눈(3)
위기론의 위기, 파국론의 파국(1)
- 초록이의 눈(3)
먼저 한마디. 다른 일도 그렇지만, 저에게 <글 쓰는 일>은 때마침, 여건이 되고 의욕이 맞는 때가 있습니다. 철저하게 바이오 리듬을 타는 일입니다. 자주 쓴다고, 행여 전문 글쟁이라고 오해는 마십시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 싫습니다.
위기에 대해 섣부른 생각을 말해볼까 합니다. 벌써 가슴이 두려움으로 콩닥콩닥 뜁니다.
아! 위기(Crisis)! 오! 파국(Catastrophe)!
1. 생태문명의 파국? “(개)소리 마라!”
정확한 기억은 안 납니다. 작년 혹은 재작년의 일입니다. 충북 괴산에 도법스님이 탁발순례를 오신 기회에 흙살림에서 무슨 심포지엄 비슷한 것이 열렸습니다. 주제는 국민농업 제창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름 생명평화도 버무려진 것 같기도 하고...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당시, 어떤 이의 발언에 대해, 원주 김용우 선배가 호통(!)을 친 일이 있습니다. 그 발언도 호통 내용도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기억하는 바는, “농업농촌이 위기인데... 생태문명위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너무 멀어 보이는데... 달리 없어 보이는데.... 이거 한번은 크게 뒤엎어져야 되는 것 아니냐... 그래야 새로이 정화되지 않겠느냐...” 는 가벼운(?)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도 뭐 그다지 심각하게 발언한 건 아닌 듯합니다. 가끔 회자되는 “농민총파업” 같은 류로, 상상력을 나름 말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순간, 김용우 선배가 일갈하기를, “무슨 그런 무책임한 소리를 하느냐? 그런 위기와 파국을 이야기 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애정과 예의가 부족한 소리다. 그 고통은 결국 누가 감내한다는 말이냐! 민초들의 고통이 아니냐! 위기와 파국이 오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 운동 아니냐! (당신 뭐야?)” 그런 내용의 외마디였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언젠가 술자리에서도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의 저를(생명평화운동 운운하고 있는) 있게 한 여러 상황과 조건 중에, 최근의 것으로는 늘 그 순간을 꼽습니다. 물론 아주 개인적인 일이지요.
그러니까, 그게 혁명론이든 위기설이든 파국론이든 개나발이든, 그걸 가벼이(농치듯 가벼이 말하며, 나는 이런 재미있는 생각도 해 보았다는 투의 가벼움......!) 말하는 자들에 대한 엄중한 호통소리였으며, 청중의 하나였던 저는, 지레 겁을 먹고서 큰 깨우침이 있었다는 겁니다.
혹시 제 말에 공명(共鳴)하십니까? 20대 초반부터, 아니 그 전부터, 멸망>파국>전쟁>위기>혼란>고통>슬픔... 이런 점층점강하는 <민초들의 생명, 바로 나의 생명과 존재를 좌우하는 문제들>에 대해, 마치 몇몇 비슷한 부류들과 함께 펜타곤 지하에 숨는 지도부나 되는 듯이(필자 주 : 핵전쟁 상황이면 국방성 지하 수십 미터 아래에 국가기관이 들어선다는 X-file 스러운 이야기가 있는데......) 잘난 체 하며, 도를 깨우친 사람인양 앉아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아!
“나는 나, 그들은 그들” 식으로...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더러운 비겁함과 반민중적인 생각을 (그건 조금이라도 용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더러 하고 있었다는 뼈아픈 자기고백입니다. 충청도 괴산 땅에서 있었던 아주 작은 에피소드였습니다만, 제게는 이후의 정말 많은 것을 결정짓게 된 장면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김용우 선배를 좋아합니다. ^^)
2. 위기라서 신난다? 농업농촌의 위기
저는 2008년 가을 현재, 귀농운동에 몸담고 있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이제는 거의 무감각해진 표현이 <농업농촌의 위기>라는 언명입니다. 무감각하다고 해서 그렇다고, 제가 실제 무감각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감각해질 정도로 진부하게, 여기저기서 犬公이나 牛公이나 쓰고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이런 경우를 영단어로는 클리세(cliche)라고 하지요. “호수 같은 그대의 눈동자” 이런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누가 농업농촌의 위기를 말하는가?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농민이 농촌에 사는 사람이 “농업농촌이 위기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당연히 인정합니다. 얼마나 곤고하시겠습니까? 그 위기를 몸으로 버텨내는 농민들은 존재합니다. 네델란드 강둑의 터진 구멍을 온 몸으로 막았다는 전설의 소년이 연상됩니다. 눈물겹습니다!
그런데, 넥타이 매고, 에어컨 옆에서, 키보드 위에서, 국회 심포지엄 생수병 뒤에서 “농업농촌이 위기입니다!”라고 말하는 족속들이 있습니다. 결론은, 그 말들은 다 <개소리>라는 것이지요. 조금 부드럽게 달리 표현하자면 <소가 웃을 소리>입니다. 그들은 농업농촌이 위기여야만 존재가 가능한 족속들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냉소적으로 보면, 귀농운동본부도 한살림도 생협도 농업농촌의 위기에 따라 성장발전하고 있는 중이니, 자칫 도(道)를 잃으면! 그 넓은 범주에 속할 수도 있음을 압니다.)
그들이 연달아 하는 소리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그러니, 위기를 기회로 삼자!> 입니다. 오만가지 통계와 표현을 달리하면서 하는 소리는 결국 그겁니다. 일단 진단은 부정할 수 없는 위기인데, 해법으로는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삼자는 것이지요. 각론으로는 “CEO 농부가 되라” “블루오션에 주목하라” “농업 부가가치를 창출하라” “마케팅 등 경영마인드를 가지라” “농업을 산업으로 규모화 재조직하라” “농촌의 생태환경을 살려 사람이 찾아오는 마을로 재건하라” 등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런 주장 자체를 반박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니, (심히 열불 나지만) 반론은 고이 접어 두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류의 전문가(?)스러운 말들에 미혹(迷惑)되는 사람들(나름 진지한 귀농희망자 중에도)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회가 있으면 반대로 말하고는 합니다. “위기는 위기일 뿐이다. 위기란 절체(絶體)절명(絶命)의 순간이며, 만일 농사꾼들이 1번의 위기를 제대로 얻어맞는다면, 그대로 회생불능(回生不能)이다.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눕는다. 위기에는 한껏 납작 웅크려 살아남는 것이 전략전술이며 장땡이다!” 그다지 진취적인 대답 같지는 않습니다만, 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럴듯합니까?
위기를 계속 증폭시켜야 돈을 버는(그것이 목적이니!) 족속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농업농촌 관련 소위 전문가들이며, 그들을 확대재생산시키는 부류들은 누구인고 하니, 농산업 자본가들과 농촌 건설업자들과 년 10조 예산을 주체 못하는 농정기획자들입니다.
이렇게 위기가 증폭될수록 괴로운 이들은, 1차는 도시 소비자이며 2차는 농민입니다. 이건 상식인데, 의외로 이 위기 국면에서는 농민들만 죽어날 거라고들 생각합니다. 그러니 농민들이 알아서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농민보다 도시 소비자가 더 위기에 따른 고통을 감당할 몫이 큰데도 말입니다. 거 참. 아쉽지만 이것도 이 글의 주제는 아닙니다. (다음에 계속)
- <초록이의 눈>은, 초록의 관점이 아닙니다. 딸 초록이의 눈을 거울삼는 제 이야기입니다.
- 2008. 9. 25
- 이진천 leftsky@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