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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문화곳간

(펌) 조각, 음악이 되다

흰그늘 2008. 11. 19. 10:57

조각, 음악이 되다
화음(畵音) 프로젝트 ‘현을 위한 순환-0’
한겨레 임종업 기자
 
» 조각가 이길래씨의 작품 <나이테>(▲)는 작은 구리고리를 이어붙임으로써 소나무 껍질 모양을 이루고
이것은 다시 나이테를 이룬다는 점에서 시(C)음을 기본으로 하여 변주와 변용을 거듭하는 강혜리씨의
창작곡과 구조적으로 일치한다.
아래는 화음 챔버오케스트라.
대저 선비는 시서화의 세계렷다.

매와 난을 치고, 그림 제목인 화제(畵題)를 짓고, 붓 들어 쓰는 일이 하나였다.
시는 곧 운(韻)과 율(律)이거니 시 속에 화(畵)와 운이 어우러져 있는 터.

난 치고 이를 기려 거문고 줄을 골라 창(唱)하는 것이 범상한 일이었다.
지금은 ‘상공사농’(商工士農)의 시대. 으뜸으로 치던 선비는 사라지고 없다.

잃어버린 시서화 일체의 시대. 전화 한통이 그리움에 불을 댕겼다.
‘화음’(和音)이 아니라 ‘화음’(畵音) 연주회가 있다는 것이다.
그림과 음악 어우러지는….

가을비 추적거리던 지난 15일 오후 조각가 이길래(47)씨의 귀띔으로 서울 압구정동의 한 건물
지하실을 찾아갔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18일 저녁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린 창작곡
<현을 위한 순환-0>을 연습하는 곳이다.

이길래 ‘나이테’ 모티브 강혜리 작곡
잃어버린 시서화 일체의 시대 꿈꿔

한 소절 끝날 때마다 4개 영역, 곧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더블베이스 파트장 중심으로
간단한 토론을 거쳐 곡을 해석하는 식으로 연습이 진행됐다.

지휘자가 따로 없어 얼핏 산만해 보일 정도다.

곡의 시작은 더블베이스와 첼로의 낮은 시(c). 타악처럼 궁, 궁~ 네 박자를 낮게 깔면
고음의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아주 여리게 천천히 천상의 소리처럼 합류한다.

고음과 낮은 시음의 울림 큰 공명. 다시 궁, 궁~.
합류하는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음이 다닥다닥 흩어지면서 ‘깽깽음’들이
시음과 불편한 분위기를 만든다.

“시음에 16개 음이 다 들어 있어요. 씨앗에 이파리, 가지, 줄기가 담겨 있는 것처럼.
제 곡은 더블베이스와 첼로의 시음에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배음렬 화음으로 공명을 이루는 방식을
기본 모티브로 해서, 반복-순환되는 구조입니다.”

<순환-0>의 작곡자 강혜리(29)씨의 설명이다.

“트레몰로, 트릴, 하모닉스, 피치카토 등 다양한 연주기법과 4분의 3 샵 따위의 미분음을 써
색깔의 미묘한 변화를 시도했지요. 하지만 이들 변주를 잇는 것은 시음입니다.”

전체는 세 부분.
두번째에서 화려한 변화와 응집을 거듭한 흐름은 세번째에서 다시 처음 시음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씨앗은 다른 얼굴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렇게 18분이 끝나면 봄에서 혼란스런 장마철을 지나 가을 초입에 이르는 북유럽의 세 계절을
거친 듯한 느낌이 든다.

 
» 미술작품을 곡으로옮겨 연주하는 화음프로젝트 이야기
<현을 위한 순환-0>은 조각가 이씨가 소나무를 소재로 만든 <나이테>에서 얻은 악상을 기본으로 했다.
지난 7월 씨제이문화재단에서 화음프로젝트의 하나로 공모한 결과 당선작으로 선정된 강씨의 창작곡.

<나이테>는 동파이프를 잘게 잘라낸 다음 일그러뜨려 만든 구리 고리가 기본.
한 줄로 이어붙인 작은 고리가 몇 바퀴 돌다 두 겹이 되고 두 겹은 곧 네 겹, 여섯 겹으로 두꺼워진다.

좀더 큰 고리들이 섞여 들면서 일그러진 고리들은 소나무 껍질 무늬로 변화하고 겹겹이 겹치며
줄기 모양이 된다. 이것이 다시 회오리처럼 돌면서 나이테가 되고 그게 점점 커져 나무의 세월이 된다.

이씨는 “동파이프를 잇는 과정은 한국화의 붓 터치 같은 숨결로 드러난다”며
“동파이프와 나무껍질이 절묘한 형상으로 만나는 것은 척박하고 기계적인 현대사회에
생명을 심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1993년 서울 삼풍백화점의 삼풍갤러리에서 현악 사중주로 시작했다.
음악가들만의 유희가 되어가는 현대음악을 청중 눈높이로 낮춰보자는 취지에서 택한 화랑음악회.

95년 백화점 붕괴로 중단됐다가 2002년 경기도 남양주 서호미술관에서 재개되고
2006년 챔버악단으로 확대되어 지난해부터 씨제이문화재단의 후원을 받기에 이르렀다.

애초 연주를 처음 이끌었던 이는 현재 악단 예술감독이자 비올라 연주자인 박상연씨.
화-음 어울림의 시도는 어머니가 화가였고 자신 역시 그림에 관심이 많은 박 감독의 취향과도 무관치 않다.

“미술과 음악은 정서의 흐름을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일종의 언어들이죠.
서로를 구분하는 장르의 거죽을 걷어버리면 맞닥뜨리는 부분이 있다는 거죠.
그 부분이 바로 새 영역입니다.”

10년여 동안 70회 이상을 치른 화-음 어울림 연주의 결과는 연주장 옆 미술관을 차릴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공간 속 미술과 시간 속 음악의 만남. 그들은 잃어버린 시서화 일체의 시대를 꿈꾼다.


한겨레신문/ 임종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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