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술집 풍경 구입하기*
그러고 보니 그도 주막 쥔장 행세를 했던 적이 있다.
주모 찾으며 문턱 성급히 넘어서는 과객이나 낮 시간도 하냥 술시로 만들어버리는 취객으로만 살기에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게다.
하여 고샅 지나는 길손들한테 술인심 베풀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으니. 지난 2006년 ‘중흥3동 공공미술프로젝트’가 펼쳐져 온 골목이 와글벅적했을 때 뜻맞는 동료 윤남웅·고재근 등과 더불어 주막을 차렸던 것이다. 이름하야 ‘와우주막’.
몇 해 동안 주인할머니만 오갈 뿐 백구 혼자 지키던 와우산 아래 비탈집에 술냄새 사람냄새가 훈짐나게 어우러졌었다.
쬐깐헌 선술집이나 시장통 국밥집과 통하는 기질
알 만한 사람들은 알아주는 술꾼 박문종(52). 이번 제7회 광주비엔날레에선 ‘복덕방프로젝트’가 펼쳐진 대인시장 골목에 아예 홍어집을 차렸다. ‘만만한 게 홍어 X’이라는 그 홍어 거시기를 본뜬 조형물이 주렁주렁 매달린 사이에 설치된 영상을 볼작시면, 그는 석찹한 술청에 들어앉아 주모 앞에 앉혀놓고 젓가락장단 맞춰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란 유행가를 목이 쉬게 불러대고 있다.
맛도 없고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홍어 X’을 작품 소재로 쓸모있게 끌어올려 만만해 보이는 것의 그리 만만하지 않음을 이야기한 반전의 묘미 역시 그가 홍어 마니아가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터.
남도 홍어를 둘러싼 수많은 예찬 중에 박문종의 곡진한 헌사를 빼놓으면 서운하리라.
“삼복더위에 재래식 변소에서 개운하게 일보고 나온 후련함이랄까. 통곡의 뒤끝이 이런 것은 아닐는지….”
울며불며 죽기 살기로 홍어탕을 먹은 소감이다. ‘통곡의 뒤끝 같은 맛’이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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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화가들을 꼬드겨 시장통 국밥집 전시도 여러 차례 열었다. 담양장, 말바우장에서. “관객도 없는 전시장에서 우아한 청승 떨고 있을 바에야 사람 많은 저자로 나서 보자”는 취지였는데 그 속내엔 ‘그림 걸어 놓고 밥도 먹고 술도 먹자’는 심사도 깔려 있었을 것.
더 먼저는, 그의 기질 자체가 골목 끄트머리에 붙은 쬐깐허고 이름 없는 선술집이나 사람들 복닥복닥한 시장통 국밥집 이런 곳들과 통하는 까닭이다.
할아버지들도 장에 나왔다가 들러 약주 한잔에 미술평론가로 나서고 장바구니 들고 나온 아짐들도 “여간 좋습디다”라고 치하하고. 그렇게 시장통 국밥집 전시의 맛을 봤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들어 현장미술 하겠노라며 잠시 장소만 빌리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 자신이 단골로 취객으로 부대껴온 술집들에 가선 취중진담처럼 “아짐, 그리 해봅시다”라고 넌지시 약조해놓곤 노는 듯 일하는 듯 술 마시는 듯 스며드는 게 그의 방식.
담양장·말바우장의 국밥집 선술집에 들어서 “화가 박문종 아요?” 물으면 “아, 그 키 큰 양반, 그 대맹(담양) 양반?(그는 담양 수북면에 작업실을 갖고 있다)”이란 답이 돌아올 것이다.
그가 지닌 빽과 인맥이란 애시당초 돈이나 권력 주변과는 터럭만큼도 인연이 없고 그저 제 주머니 속의 지전 몇 장과 제 몸을 축내가며 술 퍼서 한세상 한세월을 함께 흘러온 선술집 아짐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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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냄새 나는 그림, 간재미회 씹듯 개미 있는 글
그런 박문종의 면모를 시인 고재종은 이렇게 말한다.
“박문종은 술꾼이다. 청탁불문에 그 두주불사는 이미 여기 남도의 명물이 되어 있다. 박문종이 술꾼으로 행세할 수 있는 곳은 선술집이 딱 맞다. 늘 면도하지 않는 덥수룩한 구레나룻이며 구부정한 어깨의 거구는 시골 장터 국밥집에서 뜨건 쐬주나 텁텁한 탁배기와 함께 만날 수 있는 우리 민중의 원형에 맞춤하다.”
그러니 이번에 그가 펴낸 《선술집 기행》(전라도닷컴)은 그저 자신의 정직한 ‘생활’에서 나왔다 할 것이다.
시장통 선술집 어느 한 귀퉁이에 앉아 혼자 따르는 독작(獨酌)만으로도 행복에 다다를 이로는 박문종이 제격인 것이다.
지난 2004∼2007년 광주지역 일간지 <광주드림>에 연재한 글과 그림을 묶은 《선술집 기행》에는 광주·화순·담양 등지의 선술집 40여 곳이 담겼다.
굽이굽이 인생사 풀려나오고 세상 울분 토로하는 술집 정경들을, 연탄불에 전어 굽는 꼬순 내랑 서대 장대 박대 쭉쭉 찢어 양념간장에 찍는 맛을 실시간 중계마냥 전해주는 글솜씨는 독자들을 대번에 그 술판으로 합석시킨다. 통성명은 뒷전이고 금방이라도 막걸리잔 이쪽에 건네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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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보이려는’ 허세나 거짓을 털어 버린 그의 그림들 역시 연탄불 한 장으로 온갖 재미진 맛 내고 별스럽지 않은 재료들로 한 상 푸지게 차려내는 선술집 아짐들 손맛 같다.
소설가 공선옥은 글과 그림으로 권하는 이 권주가를 두고 “박문종의 그림에서는 잘 뜬 누룩냄새가 난다. 박문종의 글은 ‘막걸리로 꼭 짜내서 부뚜막에 잘 익은 식초로 버무려 놓은 간재미회’를 오독오독 씹고 있는 것만치로 개미가 있다”고 말한다.
‘모르는 사람끼리도 정들겠네’라는 제목으로 묶인 1장에는 함지박째 내놓은 안주에 한식구처럼 숟가락질하며 모르는 이와도 한상에서 허물없는 술집들이 나오고, 2장 ‘한번 잡사 봐’에는 입천장 다 헐도록 먹는 홍어탕, 스산한 날 식구들 모여 앉아 까먹던 추억 떠올리는 꼬막 맛, 머릿고기 순대 썰어놓고 새우젓 찍는 맛, 꼬소롬하니 쩍쩍 들러붙는 낙자 맛, 모락모락 김나는 두부에 신맛 깊은 김치 두르는 맛 등등 안주 이야기가 걸다.
3장 ‘술청 분위기에 취해 볼딱지 꽃 피고’에는 술잔에 무등산 고스란히 들일 수 있는 선술집이나 저마다 뜨끈한 사연 국물에 말아먹는 시장통 국밥집들 이어지고 4장 ‘허름한 선술집 빛나는 주인장들’에선 내 돈 내고 술 마시면서 걸죽한 욕도 같이 얻어먹는 선술집 등 주인장들의 카리스마와 오지랖과 오랜 연조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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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배 고프지 않아도 그 작은 밀창문 들여다보고 싶은 집들
그러니, 선술집 찾아드는 이들의 이구동성은 “오매 이란 집 없었으문 어쩔 뻔했소?”.
‘이란 집’의 정체를 살펴본다.
큰손 아짐이 국자 들고 술국 끓여대는 집. 만 원짜리 한 장이면 종일 마실 수 있는 집. 1코 2애 3날개 따지며 홍어탕 앞에 놓고 울며 먹는 집. 그 집 아짐 인생 역정 기구해서 낙자 한 ‘사라’ 시켜놓고 젓가락장단이라도 셀 것 같은 집. 각기 따로여도 술주전자 탁자를 넘나드는 집. 싸가지 없는 놈들은 아예 발도 못 붙인다는 허름한 술집 차려놓고 ‘가오’ 먹는 집. 새벽일 나서는 이들 해장술로 속 푸는 집이니 행여나 일하지 않는 이들은 그 술국 넘볼 자격 없다는 집. 상술이 난무하는 시대에 허름함으로 위장한 집. 옆집 이발소 아저씨가 갈아주고 세탁소 아저씨도 갈아주고 저기 시골마을 영감님도 시내 일보러 나왔다가 갈아주는 집. 객지에 있다 온 사람들이 “아짐 지금도 하요이!” 하면서 찾아드는 집. 꾸벅거리는 취객 매몰차게 내쫓지 못하는 집. 술배 고프지 않아도 그냥 한번 그 작은 밀창문 슬며시 들여다보고 싶은 집. 드나드는 손님마다 아짐이 일일이 내바람(배웅)하는 집. 외상장부 빼곡이 달아놓기는 했지만 언제 받을지 모를, 돈 좀 벌어보겠다는 생각은 애시당초 하지 않을 것만 같은 집. 장사를 할라고 하는지 말라고 하는지 짐작 안되고 술집 같기도 하고 밥집 같기도 한 집. 주인의 자존심이 짱짱하니 살아있는 집 등등.
이런 선술집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세태 속에서 그는 시대를 보기도 한다.
“두 번 세 번 골목을 접어들어 가야 하는 집들은 이제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선술집이라 부를 만한 정서를 지닌 집들이 점점 귀해져 가고 있다. 개발 속에, 새롭고 휘황한 것만 찾는 세태 속에 헐리고 무너져 간다. 빠르게 사라져간 집들이 부지기수인지라 안타까움 같은 것이 발길을 재촉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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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뜻밖에 ‘기록’의 의미까지 더하게 된 이유다.
“한번은 원고를 마쳐놓고 미진한 게 있어 저 계림동 꼭대기 집을 다시 찾았는데 불과 며칠 상관에 이미 뜯기고 없었다. 잔해를 대신 만나고 불도저 소리 등을 뒤로하고 내려와야 했으니 거기 언제 그런 집이 있었던가 싶게 마치 거짓말처럼 돼버린 것이다. 내려오는데 그날따라 석양빛이 어찌나 곱던지 눈물이 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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꾼은 ‘명품’을 알아보는 법. 모다 해서 탁자 3개가 고작인 집, 빛 바랜 꽃무늬 벽지에 흔한 액자 하나 달력 하나 없는 집도 그는 발탁한다. “그 ‘없음’이 좋다”는 그의 담담한 말을 듣고 보면 우리는 ‘있어 보이는’ 것들에 너무 휘둘려 왔단 것도 알게 된다. 골목길 저 끝 가물가물한 그 선술집들을 눈밝게 알아보고 술 마시는 것으로 말없이 응원하며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우리에게 그 선술집들의 길잡이가 되어준 술꾼 박문종에게도 감사를.
바야흐로 찬 바람 불 때니, 옴팍한 선술집 뜨끈한 아랫목 차지하고 앉아 볼딱지에 뽈그작작 꽃피게 마셔볼 일이다.
책 구입 문의: 전화 062-654-90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