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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사건 - 구례, 큰 산 아래에서의 대학살

때때로 글은 자체가 고통이다


글을 시작하는 지금 고민스럽다.
10월 13일 지리산편지를 발송한 이후 이곳을 쉬고 있다. 이후 며칠 동안 새롭게 주민으로 가입하신
분들도 계시다.
그분들은 아직 지리산편지를 한 편도 받지 못하신 상태다. 눈이 시원해지는 지리산 자락의 풍광을
기대하고 계실 것이다.
그러나 이장은 분량을 가늠할 수 없는 60년 전의 우울한 이야기로 지리산닷컴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
추수가 막바지다. 지난 며칠간 촬영한 추수 풍경이 있다. 농부의 한 해가 저물어 가고 나의 '사진농사'
도 함께 마감해야 한다.
'쌀의 시작에서 끝까지'를 다룰 수도 있을 것이다. 따뜻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담배
한 대 피면서 잠시 가다듬고 이 우울한 60년 전의 이야기를 먼저해야 한다는 결론을 선택했다.
나는 항상 빠른 결정을 내린다. 대부분의 경우 갈팡질팡하지 않는다.
연역법은 멀리 하고 귀납법을 주로 취한다. 그리고 이미 내린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
그래서 오류가 자주 발생한다. 귀납적 사고는 전제를 우선하지만 그 전제는 항상 결론의 필연성을
논리적으로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60년 전 이곳에서 발생한 학살 역시 그러한
사유 방식이 초래한 비극적인 결과이다.









2008년 10월 20일. 3~4시간 동안 구례를 쏘다녔다.
사무실 앞 들판은 며칠 동안은 베어지지 않을 것이란 말씀을 아침에 들었다.
산동을 바라고 시동을 걸었다.
기록에 기대어 '그곳'을 찾아야 한다. 그곳은 한 장소가 아니다.
 
1948년 10월부터 1949년 7월 사이에 지리산자락 중에서도 서편 땅인 구례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주요한 즉결처분과 매장 지점들이다.
산동면 이평리 횟골을 시작으로 시상리 시랑마을, 계천리 송평마을, 원촌초등학교, 상관마을을
촬영하고 간전면으로 넘어와서 간문초등학교와 간전천변, 문척으로 넘어가 토금마을 주변을
촬영했다.

중간에 점심을 먹었고 함께 점심을 한 지인은 나에게 "어째, 기분이 좋지 않으세요?" 라고 물어왔다.
그랬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반나절 동안 사람 죽은 곳만 쫓아다녔다. 이전에 모르고 지나칠
때에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던 곳은 여지 없이 '그곳'이었다.
그곳의 공통점은 다리 아래였고 모두 물水과 가까운 곳이었다.
그곳 중 많은 장소는 내가 자주 쉬었던 곳이고 풍광을 찬讚했던 곳이기도 했다.


A4 스무 쪽 정도의 자료에서 출발한 나의 여정은 지난 밤(화요일)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지난 8월에 보고를 마감한 '구례지역 여순 사건' 이란 조사자료 150 쪽을 일별하면서
'한번 다루어보자' 라는 나의 생각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깨닫는 것으로 마감되었다.

보고서 속에는 어제 내가 들판을 찍을 때 촬영한 마을 사람들의
이름이 지나갔고 누군가는 토벌군에게, 누군가는 산사람들에게, 누군가는 그 두 세력의
강요에 의한, 마을 사람들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사연들을 '알게 되었다'.

내 머리 속과 몸은 완전히 방전되어 버렸다. 더 이상의 정보를 담아 낼 머리와 몸의 용량이 없다.
10월 20일 낮 동안의 촬영은 어쩌면 헛짓거리였다. 여러분들이 지리산닷컴에서 보았던 풍광 좋은
구례의 사진들, 바로 그곳에서 대부분 총살과 매장이 이루어졌다.
구례읍, 산동, 간전, 광의, 토지, 문척, 마산, 용방 전역이다.
그 대부분의 장소는 물론 내가 알고 있고 머물렀고 밥을 먹었던 곳이기도 했다.

지리산을 찾았던, 화엄사를 찾았던 암컷과 수컷이 하루 저녁 오르가슴의 순간 몸을 떨었던 '
그 모텔들'이 서 있는 산기슭과 강가의 땅은 60년 전 어느 날, 앙천의 눈매 부릅 뜬 시신들이
누워 있던 땅이다.
우리는 참으로 진하게도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금부터 전개하는 내용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지난 8월에 마감한
'구례지역 여순 사건' 이라는 150 쪽 문건을 90% 인용, 각색한 것이다.
그 150 쪽의 '사람 죽은 이야기'를 머리 속으로 집어 넣고 살을 발라내고 뼈를 추스리는 작업이
내 몫이었고 두 편으로 나누어서 나갈 이번 이야기의 사진은 대부분 지난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큰 산 아래에 살면서 찍은 사진들이다. 따라서 이미 보았던 사진들이 많을 것이다.
2편에서 나갈 일부 사진은 구례군청 김인호 형의 도움을 받았고 김진오의 패러글라이딩 비행 중
사진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번 편에서는 대부분 이전 사진들로 구성될 것이고 2편에서는 10월 20일에 새로이 촬영한
사진들이 제법 사용될 것이다. 시간과 자료 상의 한계로 2~3 장의 사진은 다른 책과 인터넷으로
검색한 이미지들을 사용할 것이다.

토벌군, 반군, 우익, 좌익 등의 표현을 두고 잠시 고민했다.
내 안의 목소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었지만 읽는 이에 따라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는
문제이다보니 인용한 자료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혹시 본인과 관련한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리산닷컴을 보고있는 마을 어르신들의 후손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하여, 혹 불편한 대목이 있다면 연락을 주시면 바로 해당장면을 삭제하거나

변경하도록 하겠다. 4dr@naver.com 으로 연락주시면 됩니다.






14연대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무냉기에서 내려다 본 새벽의 구례읍.


노고단에서 광양 백운산, 그 너머 광주 무등산 방면을 바라보고 있다.
1948년 10월 23일 반군이 구례에 들어왔다. 김지회와 홍순석이 이끄는 14연대 반군 약 2,000명은
순천 삽재와 백운산을 넘어 구례로 들어온 다음, 구례군 간전면과 토지면 문수리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그들 중 500여 명은 10월 24일에 구례읍을 점령하고, 우익인사를 처단했다. 사진의 왼편으로 진입해서
저 멀리 불빛이 모여 있는 구례읍으로 들어선 것이다. 새벽이면, 해질 무렵이면 반군은 바로 이곳에서
이렇게 구례읍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산 아래 그곳은 그들의 '적지'이기도 했고 '고향'이기도 했다.

1948년 10월 19일 오전 7시, 육군본부는 여수 제14연대에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출항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나 명령은 접수되지 못했다. 14연대 소속 군인 약 2,000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제14연대 반군은 지창수 상사의 지휘 아래 차량을 동원하여, 경찰의 저지선을 무너뜨리고 여수를
장악했다.
10월 20일 반군의 주력부대가 시내에 침입하여 교전이 개시되었으나, 소수의 경찰병력은 반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
반군이 시내로 들어오자, 여수 시민 600여 명이 반군에 합세하였다.
10월 20일 오전 9시에 이르러 여수시는 완전히 반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반군은 주요 기관과
건물을 접수하고 체포된 경찰관과 기관장.우익단체원.유지 등을 여수경찰서 뒤뜰에서
집단으로 사살하였다.
이어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인민공화국 깃발이 주요 건물에 걸렸다.

여수를 장악한 반군의 주력 2개대대는 김지회 중위의 지휘 아래 여수역에서 통근열차를 이용해
 순천으로 진출하여, 순천 시내를 장악하였다.
이어 반군 1개 대대는 광양.구례.곡성.남원을 경유하여 전주로 향했다.
다른 1개 대대는 벌교.보성.화순.이리로 진출하였다.

정부군의 진압이 본격화된 10월 21일 이후 반군은 다시 순천으로 집결하였다가,
광양의 백운산과 구례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구례는 지리적으로 반군이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곡성.광양.순천.보성.남원 등지와
연결되는 길목이다.
구례는 여순 사건 발생 직후부터 남로당 구례군당과 여러 면당이 중심이 된 좌익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10월 21일 좌익세력은 구례경찰서와 경찰지서를 장악하였고, 반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수 명의
경찰이 피살되었다.
또한 군인민위원회가 활동하기 시작했고, 각 면단위까지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좌익세력은 경찰과 우익인사를 연이어 습격하였다.
구례 주민들은 반군이 입산할 때 숙식을 제공하거나, 보급품을 산으로 운반하기도 했다.

구례에서 활동하던 좌익인사 등 구례 주민 일부가 김지회 부대와 함께 입산하기도 했다.
입산한 반군과 좌익세력은 지리산 일대에 유격 근거지를 구축하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덕유산과 백운산에 분산하여 은거하였다.

반군은 지리산 주변마을을 보급지로 삼아 지리산 인근을 다니며 경찰지서나 관공서를 습격했다.
이에 지리산 일대의
주민들은 밤이면 반군에게 식량과 물자를 빼앗기고, 낮이면 국군에게 협력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 구례읍내 봉동리 주조장. 구례합명회사 자리였다.


구례는 다른 지역에 비해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1927년 3월 신간회 구례지회가 조직되었다. 청년회.소년회.구매조합 등을 설립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36년에는 금란회金蘭會가 결성되었다. 일종의 좌우합작 모임이었다.
회원 대부분은 신간회운동과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해방이 되고 1945년 8월 17일 구례건국준비위원회(이하 구례건준)가 결성되었다.
금란회원인 박준동의 집에서 구례건준을 결성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다.
건준사무실은 김종필이 운영하고 있던 구례합명회사로 정했다.
 지금의 구례읍 봉동리 명지장 맞은편 주조장이 바로 그곳이다.
위원장에 황위현이 선출되었다. 황위현은 당시 60여 세의 한학자로 매천 황현의 차남이었다.
그는 3.1운동에 직접 관계하였고, 신간회 구례지회 위원장을 지냈다.
구례건준은 1945년 9월 10일 서울건준이 좌우로 나누어진 것과 맞물려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위원장에 김종필이 선임되었다. 토지면 송정리(위원장 김인수).문척면 금정리(위원장 임정업)
등에도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문척면 월전리에는 농민연맹(위원장 서정열) 등이 조직되었다.
구례의 좌익은 군단위를 장악하지는 못했지만 일부 면 단위와 리 단위에서는 지배력을 유지했다.

구례에서도 좌우대립 양상은 격렬한 편이었다.
그것은 여순사건이 구례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맺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수순이기도 했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파도리3.1만세사건'이다.
1947년 3월 1일. 구례군 토지면 파도리 마을 옆 언덕으로 10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오전 9시경이었다. 파도리를 안고 있는 구례군 토지면은 다른 지역에 비해 지식인이 많았다.
조선에서 절대명당이란 토지면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상을 추구하는 선조들이 많았다.
후손들은 하동포구를 통해서 일본 유학을 다녀 오기도 했다. 사회주의 사상을 이상을 추구하는
개화사조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읍내도 아닌 인근 면 단위의 작은 마을에서
100여명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던 기반이기도 했다. 우익과의 대립이 점점 예각으로 변하던 시절,
'사회주의해방만세대회' 라는 집회명은 경찰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당시 토지초등학교 교사였던 박지래가 집회를 주도했다.
파도리에서 토지면으로 나오는 길목은 봉쇄당했다. 실랑이가 벌어졌고 경찰은 '발포한다'라고
위협했지만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았다. 결국 총구는 불을 뿜었다.
고형수(高炯洙, 전 토지면장, 토지면 파도리)의 증언에 따르면 사망자는 주봉만.이판용.임오주.
임병문.김판구.장경호.박지래.김일봉.임승규 등 20여 명이고, 부상자는 10여 명이었다.
이와 같은 경우가 바로 제주도에서도 발생했는데 파도리에서의 경우보다 훨씬 사태가 커진 경우다.
그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순사건의 원인으로 작용한 제주 4.3항쟁이다.

악화는 악화를 구축한다. 1948년 4월 28일 구례군 토지면에서 우익인사 타살 사건이 발생했다.
광의면에서는 대동청년단 단장과 선거사무원 습격 사건이 발생했고 4월 29일 20여 명의 군중이
4명의 우익인사 집을 습격해 타살했다. 구례에서는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 당원이 중심이 되어
5.10선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들은 이후 전설적인 빨치산의 한 사람인 박종하
(구례군 간전면 출신)를 중심으로 약 50명 정도의 구례군 유격대로 변화한다.

여순 사건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8년 9월 24일. 구례에서는 군인들이 휴가 중 귀대를 위해 구례읍
모 이발소에서 휴식하고 있었다. 구례경찰서 수사과장이 만취하여 이발소를 지나가다가 이발소 주인이
자리에 앉아 인사를 했다고 구타를 했다. 군인 한 명이 이를 보고 수사과장을 말려 돌려보낸 후,
동료 45명과 함께 그 수사과장을 방문해 충고를 했다. 격분한 그 수사과장, 구례경찰서원을
비상소집시키고 구례읍에 유숙하고 있는 국군 사병 9명을 구금하고 군복을 벗겨 린치를 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제14연대에서 대원을 석방시켰다. 그 군인들은 한 달 후에 여순사건 반군의 주력부대,
바로 제14연대 군인들이었다. 전조인지 우연인지.






거센 바람 앞의 불, 구례



*구례읍내 모습. 상가는 문을 많이 닫았다.


여순사건의 해결 주체는 정부와 주한미군이다.
1948년 10월 20일, 임시군 사고문단장 사무실에서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
육군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임시 군사고문단장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 국방부 고문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를 비롯한
미군과 한국군 참모들이 모여 비상회의를 가졌다. 광주에 토벌군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한다.
12연대 부연대장 백인엽의 진술에 따르면, 본 사건발생지역인 구례지역 진압작전을 주도했던
12연대에도
미군 고문관이 동행하면서 작전에 관여했다.

“순천에 들어갔는데 (중략) 우리 부대는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미군 고문관이 박격포
출신이었어요.
그 사람이 박격포를 잘 아는데 (중략) 박격포를 정비해서 들이 때렸죠. (중략) 그 사람하고 같이하다가
도중에
내가 지리산 노고단, 반야봉, 천왕봉, 심원 (중략) 화개장으로 해서 작전을 끌내는 길이 있어요.
그 길을 고문관하고 동행을 하다 노고단에서 헤어졌어요. 미고문관이 연대에 둘인가 셋이 있었어요.
다 있었습니다.”백○○, 진술조서(2008. 5. 26.)

1948년 10월 22일, 정부는 여수.순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포고문을 위반하면 군법에 의해
사형 및 기타에
처한다고 밝혔다.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은 10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라는 포고문
내용은 이렇다.

- 제14연대 반란은 국법 상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며,
- 총살당하지 않으려면 즉시 투항하라.
10월 23일, 대통령 이승만은 여순 사건과 관련하여 일반 국민에게 경고문을 발표한다.
진압군은 여순지역의 탈환작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치안유지와 반군협력자 색출을 위한 최소
병력을 탈환지역에
남겨두고 지리산과 백운산 등지로 들어간 반군을 추격, 소탕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진압군의 조직도 재편되었다.
1948년 10월 30일, 반군토벌전투사령부는 호남방면전투사령부(사령관 : 원용덕 대령)로 개편되었다.
구례는 북지구전투사령부의 작전지역에 포함되었다. 이어 1949년 3월 1일, 호남방면전투사령부가
호남지구전투사령부
(약칭 호전사, 사령관 : 원용덕 대령)와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약칭 지전사, 사령관 : 정일권 준장)로
개편되면서,
구례는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가 관할하였다.
불은 이미 붙었고 세찬 바람이 불어 올 것이다. 구례는 거센 바람 앞의 불이 될 수밖에 없었다.








* 오산에서 내려다 본 구례읍내 전경. 오른편으로 지리능선이 이어진다.


구례에서 반군토벌작전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7월 사이에 진행되었다.
토벌군의 주력은 제2여단 소속 제12연대와 제5여단 소속 제3연대였다.
토벌군은 주로 구례읍과 산동면에 주둔하면서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작전을 진행했다.
제12연대는 순천을 경유하여 구례로 이동하였으며, 반군의 주력인 김지회 부대를 토벌하기 위한
포위작전을 전개했다.
1948년 10월 28일 백인엽 부연대장이 지휘하는 제12연대 제2대대와 3대대가 구례에 집결하여
반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또한 연대장 백인기 중령이 이끄는 1대대와 하사관교육대가 구례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조재미 대위가 지휘하는 제3연대 제2대대 2개중대는 10월 27일 오전 6시경 구례로
들어왔다.
제3연대는 10월 28일 구례를 출발하여 노고단 중턱 토지면 문수리로 진격하여, 약 2시간의 교전 끝에
문수리를 점령했다.
제3연대는 반군이 사령부로 사용하던 문수국민학교와 문수리 일대를 수색했고, 반군의 반격으로
퇴각했다.
이후 제3연대는 구례군 산동면 원촌리 원촌국민학교에 주둔하여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그래서 산동면에서의 민간인 살상은 주로 3연대, 읍내를 중심으로 간전 등에서의 민간인 살상은
12연대가 주도했다.

국군 토벌부대가 구례에 주둔한 직후인 11월 1일 계엄령이 전남.북 일원으로 확대되었다.
군이 사법과 행정기능을 담당하고 민간인을 통제하게 되었다. 구례지역의 치안을 담당했던
북지구전투사령관 원용덕은
11월 1일 계엄지구에 포고문을 발포하였다. 포고문은,
- 계엄사령관의 사법권과 행정권 장악
- 야간통행금지
- 대한민국 국기 게양
- 반란분자의 신고
- 군사행동 방해 금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를 위반할 경우 군율에 의해 총살에 즉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결, 현지 지휘관의 재량이나
판단에 따라
재판 없는 처형이 가능하다는 소리다. 그것의 합법성 여부를 가늠할 겨를도 없이 그 자체는 바로
민간인에
대한 살인면허증 같은 것이었다.






연대장의 죽음 그리고 그 이후



* 산동면 시상리 시랑마을 버스 정류장.


진압군이 토벌작전을 전개하는 동안, 반군의 습격도 계속되었다.
반군은 11월 11일부터 13일 아침까지 경찰지서 8개소(구례경찰서 관내 6개지서.곡성경찰서 관내
2개지서)를 공격했다.
그 중 구례경찰서 관내 산동지서에서는 지서원 3명이 살해되고, 3명이 납치당했다.
그 중 국면이 아주 사나워지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제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이 사망한 사건이다.
1948년 11월 3일. 간전면 간문초등학교에서 12연대 하사관교육대원 100여명은 음식과 술을
대접받았다.
이날 밤 반란군은 간전지서를 점령하고 학교에서 잠자고 있던 교육대원들을 생포했다.
다음날 새벽 백인기 연대장은 화엄사계곡 방면으로 추격에 나섰지만 반란군의 주력을 찾는데
실패했다.
북부지구 전투사령관 원용덕 대령은 이 사건을 논의하기 위해 남원에 있는 사령부로 지휘관들을
소집한다.
날짜에 대한 혼선이 있지만 일단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자료에 의하면 11월 14일,
백인기 12연대장은
구례를 출발해서 남원으로 향한다.트럭에 헌병 1개 분대가 동승한 상태였다. 반란군은 경찰경비
전화를 도청하고 있었다.
구례에서 남원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산동지서에서 약 150m쯤 떨어진 지점에서 매복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총격이 가해졌고 헌병 6명이 사망했다. 백인기 연대장은 반란군의 추격을 받고 산동면
시상리 시랑마을
농가로 피신해 있다가 퇴로가 없음을 알고 부근 대밭에서 권총으로 자결한다. 오후 5시경으로
알려져 있다.
실질적으로 구례에서 토벌군을 지휘하던 장수가 사망했으니 보통 일이 아니다.
사건 발생 직후 실종 12연대 2대대 전 병력이 수색을 나갔다. 2대대 5중대가 산동면에서 기습을
받아 40여 명이 죽고
5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반군의 습격이 계속되자, 진압군은 11월 17일까지 제12연대와 제3연대
소속 200명,
제2연대 1대대, 그리고 1개중대를 증원하여 남원과 구례지역의 반군을 토벌하도록 명령하였다.
진압군은 인근 부락민이
반군에게 협력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이때부터 구례지역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 봉성산에서 내려다 본 구례읍.


북부지구 전투사령관 원용덕 대령은 백인기 연대장의 사망 이후 12연대를 군산으로 나가 있던
부연대장 백인엽에게 맡긴다. 백인기가 사망한 다음 날인 11월 15일부터 크리스마스 무렵까지
(백인엽 본인 진술)
구례의 주력 진압군 지휘관은 백인엽이었다. 그 한 달 동안이 전체 토벌 기간 중 가장 민간인
피해가 극심했다.

11월 19일. 대략 200여 명의 반군은 구례읍 12연대 주둔지인 구례중앙국민학교를 습격한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진격 작전인데 이 습격 작전의 실패로 반란군 주력은 화력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제12연대 군인 3명이 죽었고, 16명이 부상당했다. 반군은 약 50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제12연대는 반군 뿐만
아니라 다수의 남로당원을 체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기록으로는 이 사건 직후인 1948년 11월 20일 백인엽 부연대장(연대장 대리)은 제17연대장으로
승전하였고,
11월 26일 송석하 중령이 제12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백선엽과 백인엽. 형제다. 백선엽은 만주에서 항일 세력을 토벌하던 일본 만주군 중위였다.
백인엽은 구례에서 12연대를 떠나 17연대를 맡은 이후 한국전쟁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다.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서울 수복작전에 투입된 주력군이 백인엽의 17연대다.
대한민국 軍史에서는 백인엽이란 이름값은 제법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구례의 노인들에게도
백인엽이란 이름은
아직도 또렷하다. 또렷함을 넘어 거의 육신과 마음에 새겨진 문신과 같은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불행하게 그 의미는 칭송이 아니다. 그 자세한 이야기들은 2부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당시 국내 신문에서는 구례중앙국민학교 습격사건의 전투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가장 치열한 격전이 전개되었던 19일 상오 5시경 800명으로 추산되는 반도는 구례읍내를 포위하고
일부 시가까지
돌입하여 약 3시간에 걸쳐 시가전이 전개되었는데, 아군은 이 반도들을 삼리지점까지 진격하여 전과를
거둠 (중략)
사체 200, 포로 75, 소대장 3, 중대장 1, 김지회 비서1, 박격포 2, 기관총 7, m1 카-삐 다수, (중략)
일반폭도 300(일부사살)
아방피해 전사 12명, 부상 24명”(동광신문, 1948. 11. 23)."

물론 기록마다 습격인원은 차이가 난다. 미군 정보보고서에서는 200명~300명, 국내 신문은 800명으로
언급하였다.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11월 19일 04시 15분부터 17시까지 제12연대는 반란자 203명을 사살했고 37명을
체포했으며,
남로당원 450명도 체포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당시 11월 19일 새벽 김지회가 포로로 잡혔다는 정보를
접하자,
제5여단장 김백일은 직접 지휘하고자 20일 오전 11시 구례로 출동하였다고 한다. 김지회는 이후 뱀사골
부근에서
사망한다. 이 날은 아니다.








* 구례읍내 곳곳에서는 노고단이 잘 보인다.


반군은 구례중앙국민학교 습격사건 이후 확연하게 밀리기 시작한다.
반군은 진압군의 토벌작전에 밀려, 구례 간전면 지역의 반군 근거지로 철수하였다.
한편 구례 북쪽의 산동면에서 반군은 위안리 만복대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이에 제3연대와 제12연대는 각각 산동면과 간전면.토지면을 중심으로 토벌작전을 진행하게 된다.
산동면과 간전면의 반군 근거지는 지리산 진입로인 토지면 문수골.피아골과 함께 식량 등의 보급이
용이하고
산악지역을 끼고 있어 반군에게 유리하였다. 산동면 위안리 지역은 산동면 좌익활동가들의 본거지임과
동시에
지리산의 만복대를 끼고 있었고, 간전면 금산리 효곡리 등지는 박종하.박대수 등 구례군 유격대 사령관의
근거지이자,
유격활동이 용이한 백운산을 끼고 있었다.

12연대는 11월 20일경 현 순천시 황전면 방면에서 매재를 넘어 간전면 금산리.효곡리 등지를 포위하고
마을을 소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12연대는 많은 민간인을 간문국민학교로 연행하여 집단사살하였는데,
이른바 ‘간문천변 사건’이다.
호남 방면 전투사령부 예하 남.북지구전투사령부의 작전은 1948년 11월 30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제12연대는 1949년 초까지 구례지역에서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제3연대 제1대대가
제12연대와 교대하여,
1948년 12월경부터 구례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하며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비록 1949년 2월 5일
여수.순천지역과
지리산 일대에 내려진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대규모 토벌작전은 일단락되었지만, 지리산 일대를
포함한 구례지역의
토벌작전은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 설치(1949년 3월 1일)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결국 이런 국면은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까지 완만하게 이어지고 지리산은, 구례는 계속 낮과 밤 모두 '내어 놓은 목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죄목은 간단했다.
이른바 '큰 산 아래에 산 죄' 가 그것이다.






확인 165명, 추정 800명, 기억 2,000명



* 60년 전 어느 밤에는 이 골목에 군화 소리가 가득했을 것이다.


구례에서는 민간인 약 3,000명이 여순 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국군과 반군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를 그대로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본 보고서는 구례지역 여순 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 중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까지 군경에
의한 희생규모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피해자현황조사용역사업결과보고서를 통해 희생규모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또한 참고인 진술과 진실규명 접수기간에 신청하지 못한 희생자 유족들의 주장을 참고하여 피해규모를
확인하였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가 발주한 피해자현황 조사결과,
구례지역에서는 여순 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총 1,318명의 민간인이 희생되거나 피해를 당했다고
보고되었다.
특히 1948년에서 1949년까지의 여순 사건 관련 피해자는 총 1,086명으로 전체의 82.4%를 차지했고,
그 중 진압군경에 의한 피해자는 총 813명으로 74.8%를 차지했다.
이는 여순 사건 발발시점인 1948년 10월에서 1949년 초까지 진압군이 매우 강경하게 좌익 및
반군협조혐의자를 색출 및 처리하면서, 많은 민간인이 살해되거나
피해당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참고인 이○○는 구례군 전체에서 1,500~2,000명 정도가 ‘사살자명부’에 기재되어 있었고,
면별로는  산동면에서
약 500명, 간전면에서 약 300~400명, 광의면에서 약 200명 등이 등재되어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사살자명부’ 등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관련 기록들은 1982~83년 무렵 연좌제 폐지 지시가 내려와 대부분
소각되었다고 진술했다.
참고인 이○○, 진술녹취록(2007. 9. 20.). 실제로 전라남도경찰국은 1969년 12월 한국전쟁 전후
사살자의 유자녀들의
동향을 감시하여, 불순분자와의 접선사실 및 친목계 등 조직사항을 철저히 내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살자 가족 동향 감시 철저 지시」(전남경찰국 정보 2061-6942, 1969. 12. 5.).
이에 전라남도 각 경찰서에서는 한국전쟁 전후 ‘사살자명부’를 작성하여 사살자 가족들의 당시 동향을
전남경찰국에 보고하고 관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본 사건을 조사하면서
확인한 결과,
당시 구례지역에서는 약 800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체적으로는,









구례읍 봉성산에서 약 72명,









구례읍 계산리 유곡마을에서 약 22명,









섬진강 양정지구에서 약 100~120명,









마산면 서시천변(서시교 아래)에서 약 46명,









광의면 대산리 유산부락에서 약 20명,









토지면 용두리.오미리에서 약 30~40명,









간전면 간문천변에서 최소 70명 이상,









산동면(시상리.신학리.이평리.원달리.계천리 등지)에서 약 450명이 각각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
그렇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은 정리되는 것인가?
나는, 나의 지인들과 함께 이 길들을 자주 돌아다녔다.
계절과 시간을 달리해서 언제나 찬연한 아름다움이 가득한 길들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는 땅 위를 바라보고 그 땅 아래 퇴적된 육신과 기억에 대해 알지 못했다.




백인엽 - "사건 당시 구례에서 진짜 우익은 단 한 명 뿐이었으며···"

보고서를 계속 인용한다.

구례군에서 1948년 10월 말에서 1949년 7월까지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된
여순사건 신청건수는 총 146건, 신청된 희생자 수는 총 157명이었다. 또한 진실규명신청 기간 중에
접수하지 못하여
추후에 진실규명을 요청한 미신청 희생자 유족은 총 15명, 그들이 주장하는 희생자는 17명이었다.
신청인과 참고인의 진술을 종합한 결과,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청된 희생자 157명 전원의 희생 사실을
확인하였다.
미신청 희생자 17명 중 총 8명의 희생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나머지 9명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신청인과 참고인 진술을 통해 총 165명의 희생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상을 종합하면, 구례지역 여순사건 관련 군경에 의한 희생자는 대략 800여 명 정도로 추정되지만,
이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희생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희생자는 총 165명 이며, 희생자로 추정되는
사람은 총 9명이다.  



지금까지 정부와 군경은 여순사건을 공산반란 또는 폭동으로 규정하면서, 당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본 사건 당시 양민과 폭도를 구별하기 어려웠으며, 주로 ‘민간폭도’를 처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12연대 부연대장이었던 백인엽은 사건 당시 구례에서 진짜 우익은 단 한 명 뿐이었으며,

체포된 민간인들은 대부분


남로당원으로 남로당의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1999. 10. 17. 방영).
그러나 본 사건 당시 반군 활동 지역에 거주했던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반군에게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아래의 <표 13>은 신청인이 주장하는 피해이유와 그 구성비를 정리한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세 가지 이유



* 만복대에서 내려다 본 산동면


죽음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반란군협조혐의. 반군협조혐의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였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숙식이나
식량제공,
노무동원, 반군과의 연락이나 반군은닉 등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신청인이나 참고인 진술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된다. 경찰 참고인 김○○에 따르면, 밥해주고 짐져준 사람들을 싹 잡아다가 학교로 데리고 갔으며,
학교 너머 냇가(간문천)로 끌고 가 총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3연대 2대대 5중대 4소대 소속
유○○에 따르면,
사살대상자들은 주로 반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잡혀온 마을 민간인들이었다고 진술하였다.
신청인들은 이에 대해 당시 반군의 이동이나 활동 지역에 거주했던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반군의
강요를 거부할
수 없었고, 이에 불가피하게 반군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신청인 최삼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여순 사건 이후 반란군들이 저녁마다 와서 양식이나 소를 끌고 가거나 생활용품들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낮이면 경찰들이 마을에 들어와 반란군에게 무슨 물건을 줬냐에 대해 조사를 받았습니다.
(중략)
마을주민들은 이로 인해 양쪽으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총을 가져와 가져가는데 별다른 반항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이 준 것이 아니라 반란군들이 집을 뒤지면서 돌아다녔기 때문에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반군 활동 지역 또는 군 작전지역에 거주했다는 이유로 희생된 것이다.
단순보복이나 젊고 말 잘한다는 이유로 희생당한 경우 등도 모두 이러한 조건에서 발생하였는데,
대표적인 지역이 산동면이다. 산동면은 반군이 위안리와 대평리 일원을 거치면서 지리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다.
밤이면 반군이 마을에 내려와 식량을 조달하고, 낮이면 군경이 올라와 작전을 펼치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주민들은 반군과 토벌군의 중간에서 거주하고 있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실제 반군협조 여부와
관계없이 많은 피해를 당하게 되었다.








* 구례읍 백련리. 좌익인사들이 읍내에서 가까운 은신처였던 절골로 이동할 때에는 이 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둘째는 남로당 등 좌익단체에 가입한 혐의로 희생당한 경우이다.
산동면에서는 ‘좌익문서’가 발견되면서 문서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이 좌익 또는 협조자 혐의로 희생을
당했다는 진술이 있다. 이 경우에 문서에 기재된 내용은 이런 식이다. ‘아무개 댁’, ‘아무개 양반’.
자신도 모르게 이름이 올라 있는 경우가 많았다. 희생자가 좌익단체에 가입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경찰 참고인 이○○은,
“수백 명을 취조하다 보니 (중략) 그 중엔 좌익활동한 이들도 있고, 그냥 가입도장만 찍어 준 이들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닌 이들도 있고 (중략) 조사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형식적인 조사만 있었다”고
진술했다.
특히 특정한 이유 없이 젊고 말 잘한다는 이유로 희생당한 경우도 있었는데, 당시 젊고 말 잘하는 사람이
좌익이라는 세간의 편견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는 본 사건 자체와 무관한 대살代殺이다.
바로 좌익 및 입산자 가족 또는 동료라는 이유로 희생된 경우이다. 이러한 사실은 참고인 진술에서도
나타난다.
12연대 1대대(1중대) 출신 참고인 최○○는 부락에서 50대 할아버지를 잡아와 구례경찰서에 넘겼는데,
경찰서에서 조사한 후 그의 아들이 공비와 연락했다는 이유로 중대장이 사살 명령을 내려 분대원들이
그를 사살했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당시 백○○은 구례면장 (김도문)이 반군에게 배급미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연행하여 조사했으나 부인하자, 면장의 동생이 반군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그를 대신
사살했다.
이 밖에도 연행 및 피해이유를 모르거나 무고와 모략, 고문으로 희생된 경우도 있었다.




학살의 주체는 누구인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까지 구례에서 민간인 집단학살을 주도한 주체는
국군 제3연대, 국군 제12연대, 구례경찰서 소속 경찰들이다.


학살주체1 - 제3연대

“부락 수색 작전 나갔다가 잡아온 50~10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을 산동면 원촌국민학교 맞은편
창고에 가두어
경찰과 군인의 간단한 취조를 거쳐 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을 가려내고, 죽일 사람들은 묶어서 당일로
처형지로
군인들의 인솔 하에 걸어가도록 했습니다. 국군 제3연대 1대대 대대본부 의무과 소속 의무병이던
나는 처형예정자들과
함께 처형장소로 이동하여 총살이 집행되면 시체 위에 소독을 하고 군인들과 함께 내려왔습니다.
가보면 일꾼들이 미리 파놓은 호가 있었고, 사람들을 호 안으로 넣고 밖에서 M1으로 총살을 했습니다.
내가 주둔하던 3달 동안 5~6번 소독 나갔고, 한 번에 5~60명을 즉결처형했습니다. 처형지는 원촌학교
부근
돌이 없는 야산으로 대나무가 많은 마을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참고인 안 ○○, 진술녹취록(2007. 7. 12.).




* 산동면 원촌초등학교.


“대대장이 ‘이번에는 3중대가 가라' 하면 중대장이 몇 소대 가라는 식으로 명령이 전달되었습니다.
세워 놓지도 않고 무릎을 꿇려놓고 총살했습니다. 총살시킬 사람들을 그 앞 섬진강 백사장에 갖다놓고
구덩이 파놓고 쏴 죽이곤 했는데, 그곳이 총살장이었습니다. 현장에서 목격한 것은 한꺼번에 20~30명씩
두어 번 처형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즉결처형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참고인 하○○, 진술녹취록(2007. 10. 10.).

당시 3연대 2대대 6중대 최○○에 따르면, 2대대는 구례 산동에 도착하여 면사무소 인근 학교에 주둔하여,
민간인들을 학교에 집결시켰다. 참고인 최○○, 면담보고서(2007. 8. 16.). 참고인 유○○은 당시 사살
주체와
대상 그리고 그 과정을 상세히 진술했다.
“총살대상자들은 반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마을에서 잡아온 민간인이었으며 대부분 남자들이었습니다.
총살명령이 내려오면 김○ 중대장이 와서 몇 중대 몇 소대 누구누구 지명하여 동원했으며, 사병들은
총살집행인지 모르고 나갔습니다. 보통 소대단위(약 30명)로 번갈아 나갔는데, 총살은 한 번에 보통
5~6명을 했고,
본인은 최대 11명까지 해보았습니다. 총살장소는 산동면에서 남원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야산으로
산동국민학교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100~500미터 떨어진 야트막한 야산 일대로 장소가 대부분 학교
주변이었습니다. 총살장소까지 걸어서 이동했고 총살집행은 소대장이 인솔했습니다.
총살장소 주변에 경계병이 배치되고 마을인부들이 와서 총살대상자 수에 맞게 구덩이를 파놓았습니다.
당시 산동면장 내지 이장이란 사람이 마을인부들을 동원해줬다고 들었습니다. 총살 대상자들은 구덩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앞을 보게 해 앉히고, 25~50미터 뒤에서 사수들이 사격명령에 따라 M1 소총으로
사람들을 겨냥해 사격했고, 총을 맞고 사람들은 구덩이로 쓰러졌습니다.
집행이 끝나면 밑에서 대기하던 인부들이 매장했습니다.”
참고인 유○○, 면담보고서(2008. 1. 18.).

산동면 한청단원이었던 전○○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20명 정도 타는 트럭 한 대에 묶인 죄수를 태우고, 다른 한 대는 경비를 서는 사람들이 타고
처형지로 이동했습니다. 호를 파고 호 주위에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처형당할 사람들은 손을 뒤로
묶인 채
호 밖에 쪼르르 앉혀놓고, 고개를 숙이게 한 후에 뒤에서 ‘땅, 땅, 땅’하고 머리를 쏴서 앞으로 쓰러지게
했습니다.
군인들은 처형할 때 소대단위로 동원되어 경계를 서고 사형집행을 했습니다.
군인들은 한 줄로 서서 총을 쏘고 다시 다음 군인들이 줄을 서서 총을 쏘는 방식으로 즉결을 했습니다.
이장을 통해 일반인을 동원해 구덩이를 파게 하기도 하고 한 청단원들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총살지는 시상리 온천 주유소 오른쪽의 꽃쟁이(꽃정)입니다.”
참고인 전○○, 진술녹취록(2007. 9. 18.).








* 광의면 유산부락. 구례에 내려와서 이곳에서 운전면허증을 준비했다.
  주로 뒷켠 수돗가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멍하니 마주보았던 그 작은 동산이 바로 '그곳'이었다.


김○○의 경우 광의면 유산부락 일명 새미골 집단희생 사건 당시 시신 매장자로 참여하여
사살과정을 목격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현재 운전면허시험장으로 있는 곳(유산부락-인용자)에서 20명 정도를 즉결했습니다.
사형시킬 사람은 포승줄로 묶지 않고 새끼줄로 묶어서 나왔기 때문에 죽일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군인들이 수용되었던 사람들 중 20명 정도를 트럭에 실었고, 본인은 의경으로 차를 타고 따라갔습니다.
3연대 군인들이 사람을 싣고 갔고, 3연대 대장은 조○○였습니다. 의경들은 구덩이를 삽으로 팠고,
군인들이 사람들을 데리고 올 때는 보지 못하게 저리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밑에서 숨어서 보니,
발로 차서 구덩이에 넣고 군인들이 뺑 둘러서서 ‘팡’하고 쏘았습니다. 다시 올라오라고 해서 올라가니
묻으라고 했습니다. 흙을 덮은 다음에 그 위를 밟으라고 해서 (밟으니-인용자) 꿀럭꿀럭했습니다.
날짜는 구정 전으로 밤에 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참고인 김○○, 진술조서(2007. 12. 13.).

육사졸업생의 저자인 장창국도,
“11월 초 구례군 산동면 중동부락에서는 좌익계 70명이 조○○ 대위의 부대에 의해 즉결처분을 받았다.
그 통에 이 동네는 과부촌으로 불리게 되고 지금까지 같은 날 제사를 지내게 됐다.”고 서술했다.
참고인 강○○의 진술에 따르면, 3연대 3대대 12중대는 2대대와 함께 구례로 출동했으나, 얼마 있지 않아
순창 회문산 등지로 이동하여 작전했다. 당시 3연대 3대대 9중대장이었던 서○○에 따르면,
3연대 3대대 9중대는
여수와 순천을 진압한 후 남원에 결집하여 남원 산내, 함양, 마천 등지에서 반군을 토벌했다.
따라서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 설치(1949년 3월 1일) 이전 구례지역 민간인 희생과 관련하여, 3
연대 3대대의
가해혐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서○○은 여순 사건 당시 구례와 지리산 인근지역에서
민간인을 즉결처분한 사실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참고인 서○○, 진술조서(2007. 11. 2.).








* 마산면에서 광의면으로 넘어서면 이 들판을 만난다. 이 길을 따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끌려 나왔을까.


학살주체2 - 제12연대

신청인들은 국군 제12연대가 구례읍에 주둔하며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사살했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부)연대장 백인엽이 지휘한 12연대를 ‘백인엽 부대’로 지칭하며 가해주체로 지목하였다.

“민간인의 경우 부대가 마을로 출동해 부락민들 가운데 지목된 이들을 잡아서 학교까지 데려오지 않고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 즉결처분했습니다. 1~2명을 잡은 경우 군인 2명 정도가 배정되고, 잡은 이들을
세워놓고 총살했고, 수가 많은 경우 구덩이를 파고 그 앞에 앉혀놓고 총살했습니다.
매장하지 않고 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결처분은 부대단위에 따라 중대장이나 소대장이
명령했습니다.
군인들이 개별적으로 잡은 경우에도 성가시다고 학교로 데려오는 도중 총살했습니다.
당시 잡으면 그냥 총살하는 걸 군인들은 보통 일로 알았습니다.”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2008. 1. 8.).

12연대 3대대는 여수 진압 직후 구례로 이동하여 작전한 후 군산으로 복귀했다.
3대대는 백인기 연대장 사망 직후 다시 구례로 출동하여, 1948년 12월까지 분대와 소대단위로 작전했다.
12연대 3대대 12중대 참고인 김○○은 구례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마을 소개와 소각 작전에
참가했다.
김○○은 이 과정에서 민간인을 사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고, 민간인을 학교에 수용할 겨를도 없이
혐의가 있다고 판단되면 바로 ‘즉결’했다고 진술했다.
또 3대대 10중대 참고인 황○○도 마을을 수색할 때 민간인 중 좌익혐의자를 색출하면 상부에 호송했고,
그 후 이들을 섬진강변 모래사장에서 ‘즉결처리’했다고 진술했다.
제12연대의 민간인 사살은 당시 구례 한청단원과 의용경찰 출신의 참고인 진술에서도 확인된다.
참고인 이○○는 12연대 군인들이 광의면 당촌부락에서 젊은이 14명을 사살하는 현장을 목격했으며,
‘백○○ 부대’가 철수한 후 마을주민이 무차별적으로 사살되는 경우가 줄어들었다고 진술했다.








* 구례읍 경찰서 앞. 항상 꽃들이 만발하다.


학살주체3 - 구례경찰서 경찰

구례경찰서 사찰계 형사였던 참고인 김○○의 진술에 따르면,
경찰서 조사과 또는 사찰과가 부락 내 좌익 연락선을 색출하여 취조했다. 사찰주임은 취조결과에 따라
사살 여부를 결정하여 경찰서장에게 사살대상자 명단을 보고했다. 경찰서장이 이를 결재하면,
전남경찰국에 상신하여 최종 승인을 얻어 사살했다.
구례경찰서 경찰들이 민간인을 사살한 장소는 주로 섬진강변 양정지구였다.
당시 구례경찰서 유치장은 6평 크기의 방 5칸 정도의 규모였다. 보통은 한 방에 6~7명을 수용했으나,
당시에는
대략 70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했다. 연행된 민간인들은 혐의의 경중에 따라 갑.을.병으로 분류되어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하지만 구금된 민간인은 구례경찰서 유치장의 수용인원의 한계로 즉시
 사살되는경우가 많았다. 참고인 진술을 통해 확인된 구례경찰서 경찰의 민간인 사살장소는 주로 섬진강변 양정지구.
봉성산.서시천변(서시교 아래).토지면 용두리 야산.구례경찰서 상무관 등이었다.






대한민국 만세!



* 산동면에 산수유가 피고 늦은 눈이 내리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꽃이 서럽다.


먼저 군경은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여 조사하였다.
진압군은 토벌작전지역에서 일정한 심사나 조사 없이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였다.
신청인 임창규에 따르면, 끌려간 30여 호 되는 마을사람 모두가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차가운
논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는 얼마 후 갑자기 군인들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너, 나와!” “너, 나와!” 했는데, 당시 까까머리였던 셋째형도 지목되어 또 다른 지목된 젊은 남자들과
논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있던 트럭에 실려 떠났다고 진술하였다.

신청인 홍성관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산동면 위안리에 살 때 군인들이 와서 마을사람들을 모두 집 밖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주민들이 다 모이자 군인이 주둔하고 있던 원촌학교로 모두 데리고 갔습니다. 산사람에게 연락을 했는지
않았는지를 취조했습니다. 학교 마을에다가 동짓달에 옷을 벗겨 세워놓고 몸에 물을 부었습니다.
아버지 홍원표는 그 과정에 얼어 죽었습니다. 우리 마을 두 명이 얼어서 죽었습니다.“

3연대 1대대 본부에 근무했던 참고인 안○○은,
즉결처형된 사람들이 “대부분은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고 진술하였다.








* 산동면에서는 지리 능선이 넓게 펼쳐진다. 지난 겨울 풍경이 추웠다.


무차별 연행, 즉결처분 그리고 마을들은 불태워졌다.
참고인 최○○는 마을 소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마을 소각 때 부대에서 주민들에게 사전에 소각 계획을 통보하지 않았다.
마을을 소대나 중대가 둘러싸고 집집마다 수색한 뒤 사람들을 공터로 소집한 뒤 불을 질렀다.
현장에 도착해서 조사 후 부락이 공비와 협조하는 마을이라고 판단하면 불을 질렀다.
소각 시 서까래를 뽑아 불을 붙였으며, 주민들이 살림살이를 꺼내지 못하게 했다.
소각 후에는 부락 공터에 사람들을 소집하고 중대장이 마을이 공비와 협조했으니 소각했다고
소각 사유를 설명하고, 공비와 협조하지 말라 연설하였다."

소각 이후 주민들 이주 대책은 없었고 그대로 방치했다고 할 수 있다.
자연히 무리한 소각과 소개에 따른 부작용도 드러났다. 특히, 사전계획 통보나 사후대책 없이
늦가을이나 겨울에 이루어진 가옥 소각은 사실상 주민들의 생존기반을 박탈하는 행위였다.
이에 대해 3연대 출신 참고인 강○○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성냥하고 휘발유를 주고 마을에 불을 지르라고 하였다. 병사들에게 너는 무슨 리 너는 무슨 리에
가라고 지정하였다. 한 집에 둘씩 들여보내서 집에 있는 사람들을 나오라고 하고서 집에 불을 질렀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악이 받쳐서 산으로 올라가서
빨치산이 되었다."

소개 및 소각된 마을은 다음과 같다.

•구례읍(1개) : 논곡리 봉황마을
•간전면(7개) : 효곡리 효죽마을.논곡마을.금산리 금장마을. 운천리 백운천마을.
                     중대리 거석마을.중한치마을.묘동마을
•토지면(16개) : 문수리 상죽마을.중대마을.불당마을.율치마을.오미리 중산마을.내죽마을.
                      밤재마을.감나무골마을.송정리 내한마을.내서리 신촌마을.원기마을.
                      남산마을.내동리 평도마을.당치마을.구산리 단산마을.외곡리 기촌마을
•마산면(4개) : 마산리 청내마을(현 마산마을).광평리 광평마을.사도리 상사마을.하사마을
•광의면(1개) : 온당리 온동마을
•용방면(1개) : 죽정리 죽정마을
•산동면 (18개) : 원촌리 원촌마을.계천리 현천마을.원달리 상원마을.달전마을.
                       수기리 수락마을.대평리 평촌마을.신평마을, 위안리 상위마을.하위마을.
                       좌사리 원좌마을.당동마을.상관마을, 관산리 사포마을.반평마을.
                       탑정리 정산마을.이평리 우와마을.평산마을.둔사리 둔기마을.






무법천지의 주범은 바로 국가권력



* 구례읍 봉성산의 동백꽃. 지다.


반군 진압을 명분으로 한 민간인에 대한 즉결처분은 다름아닌 살해이자 학살이다.
학살자들은 대부분 계엄령하에서 즉결처분권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급자들은 대부분 즉결처분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즉결처분은 없었다는 것이다.

1948년 10월 28일과 11월 1일에 전남.북 일원으로 계엄령이 실시되었다.
같은 해 11월 6일, 제8관구경찰청에서 발포한 포고 내용 중에는 (3) 군의 ‘즉결처분권’ 이라는 표현이 있다.
당시 헌법에 대통령의 계엄선포권을 규정하고 있으나, 계엄법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1948년 7월에 제정.공포된 대한민국 헌법 제64조에서는 대통령의 계엄선포권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그에 따른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에 법률 제69호로 제정.공포되었기 때문에, 당시 계엄령은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채 선포 및 적용되었다. 따라서 당시 계엄령은 불법적으로 선포되었으며,
법령 선포의 일반적 요건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은' 계엄령이 필요했을 뿐이다.

계엄령은 순천을 진압하던 1948년 10월 22일, 현지 사령관인 제5여단장 김백일에 의해 처음 내려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22일 발표에서 현지사령관에 의한 계엄령을 인정하는 형식을 취했다.
일제 하의 계엄령도 일정한 범죄에 한정하여 민간인을 군사재판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하였을 뿐,
민간인을 재판 없이 살해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순사건 당시는 재판 없이 민간인을
‘총살에 즉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무법천지의 주범은 바로 국가권력이었다.

군의 ‘즉결처분’의 기원은 1948년 11월 1일 호남방면 사령관 겸 계엄사령관인 원용덕이 발표한
계엄포고문에서 비롯된다. 원용덕은 1948년 11월 1일 발표한 포고문에서 전라남.북도는 계엄지구이므로
사법과 행정 일반은 자신이 독할督轄한다고 선언하면서 관.경.민에 대해,
(1) 관공리는 직무에 충실,
(2) 20:00시부터 05:00시 까지 야간통행금지,
(3) 국군 주둔 시 또는 반도 번거 접근지역에서 대한민국기를 게양,
(4) 불규남루(不規襤褸)한 국기 게양시 국가민족에 대한 충실이 부족하다고 인정,
(5) 반란분자 혹은 선동자는 즉시 근방 관서에 고발,
(6) 폭도나 폭도의 무기.금전 등을 은닉하지 말 것,
(7) 군사행동을 추호라도 방해하지 말 것 등을 철저히 준수할 것을 명령하고,
     이를“위반하는 자는 군율에 의하여 총살에 즉결”한다고 공고하였다.

원용덕이 계엄포고문에서 밝힌 “총살에 즉결”한다는 내용은 군이 계엄지구에서 민간인을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 실제로는 처형이나 총살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의 근거가 되었다.
당시 진압작전에 참여하였던 군 참고인 가운데 일부는 군의 민간인
‘즉결처분’이 계엄령에 법적 근거를
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2연대는 군인들을 상대로 전투했지, 민간인을 처리하지 않음."
백인엽 제12연대 (부)연대장 2008. 5. 26 / 조사장소 - 진실화해위원회








* 구례군 마산면에서 바라 본 초겨울 노고단. 산은 시리고 눈은 아리다.


그렇게 된 일이다.
그리고 60년이 흘렀다.
그리고 오늘 2008년 10월 23일 오전 11시.
구례읍 서시천변 위령탑에서 국가가 구례지역 여순사건에 대해,
국가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학살이었음을 인정한 첫 위령제를 올렸다.

보고서의 처음과 마지막엔 결정 요지가 나열되어 있다.

결국 본 사건은 현지 토벌작전 지휘관의 명령 아래 발생했지만,
최종적인 감독책임은 국방부, 그리고 대통령 이승만과 국가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본 사건에서 군경당국은 법적 통제를 받지 않고 작전의 편의성이나 효율성만을 고려하여
‘즉결처분’을 남용하였다. 이에 많은 민간인들은 반군에 협조한 혐의만으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살당하였으며, 이는 ‘즉결처분’이 사실상 학살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렇게 죽은 사람은 죽었고 남은 사람은 남았다.
남은 자들은 가족의 상실과 그에 따른 경제적 빈곤을 겪어야했다.
죽은 이들의 대부분은 젊은 가장이었거나 앞으로 집안을 책임질 아들들이었다.
혹독한 가난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를 박탈했고 그런 집안의 가난은 대물림되었다.
그것에 더하여, 반공을 국시로 한 사회에서 ‘요시찰인’이나 ‘관찰보호자’ 또는
‘사살자(처형자) 연고자’로
등재되어 국가의 감시와 통제대상이 되었다. 사실상의 열외국민으로 살아왔다.
그 시간이 60년이었다.
국가는 이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 대략적인 흐름은 장구하게 나열한 위 내용 그대로이다.
'여수·순천사건 - 구례, 큰 산 아래에서의 학살2' 에서는 좀 더 생생한 이야기를 계속할 것이다.
1주일 정도 기다려 주시기를.


4d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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