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
허임의 묘 자리에서 발견된 접시와 그의 저서 침구경험방 |
![]() | |
|
출생
![]() |
출생지가 어디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가 쓴 침구경험방 서문 끝부분에 하양허임(河陽許任)이라고 밝혀 하양(河陽)이 그의
본관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양허씨세보(河陽許氏世譜)를 검토하면 허임은 하양허씨 문경공파 21세손으로
허락(許珞)의 아들이고,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의 품계)로 양주목사
(楊州牧使)를 지낸 것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허임의 묘는 원래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에 있던 것을 그의 부모 묘소와 아들의 묘소가
있는 공주군 우성면 한천리로 1981년에 이장되어 있습니다.
허임의 출신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부친은 허억봉(許億逢) 혹은 허억복
혹은 許億福)이라는 이름의 악공(樂工)으로 관노(官奴)였고, 그의 모친은 사비(私婢)
였다고 전합니다.
이러한 사정의 배경에는 그 시대로부터 약 10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 허임 선생의
조상이 겪었던 역사적 사건과 관계가 있습니다.
허임의 9대조는 세종대왕 때 좌의정을 지낸 문경공 허조(許稠)였습니다. 그러나 그 허조
(許稠)의 아들 허후(許?: 허임의 8대조인 허눌의 친형)는 수양대군의 정권장악에 반대하다
귀양을 가서 교형을 당하고, 그 허후의 아들인 허조(許稠: 허임의 7대조인 허담의 친형,
허후가 자식이 없어 허눌의 큰아들을 양자로 들였음)는 사육신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기도하다 발각되어 자결하였고, 이에 연루되어 허조(許?)의 두 아들도 교형을 당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던 세조 2년(1456년) 당시 허조(許?)의 손자 허충(許忠)은 어린 아이였으므로
괴산으로 유배되었다가 관노가 되는 것으로 하였고, 그 당시 허임의 조상도 장손 허충의
집안과 함께 괴산으로 유배되어 관노로 부처된 것입니다.
허임의 7대조인 허담의 묘가 괴산에 있는 것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그 후 세조 10년(1464년)에 사면이 되었으나, 허임의 조상들은 복권이 늦어지고,
한번 관노가 되면 쉽게 그 신분을 벗어나기 어려운 시대사정으로 허임의 아버지를
관노라고 한 것으로 풀이 됩니다.
하양 허씨 족보상에는 허임의 아버지는 허락(許珞)으로 되어 있고,
벼슬이 한성판윤이라고 되어 있어 조선실록의 기록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당시 자식이 벼슬을 하면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도 사후에 벼슬을 내려
위계질서를 세우려는 유교국가의 제도가 있었고, 이름이 조선실록의 기록과 족보상의
기록이 다른 것은 허임의 부친이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초년

![]() |
“어려서 부모의 병 때문에 의원의 집에서 일하며 오랫동안 노력하여 어렴풋이나마 의술에 눈이 틔었다.” 허임이 침술을 배운 동기에 대해서는 침구경험방 서문에서 ‘어렸을 때 부모님의 병 때문에 의원의 집에서 일을 해주며 오랫동안 노력하여 어렴풋이나마 의술에 눈이 틔었다’고 털어놓고 있습니다. 이로 볼 때 그는 침구술을 교육기관에서 배우지 않고 의원에게서 직접 배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악공 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부모님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풀이됩니다. 허임 선생의 부모 묘소와 자식의 묘소가 충남 공주에 있는 것으로 봐서 공주가 그의 삶의 터전과 어떤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전라도 나주에 있는 집에 내려가 있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언급으로 보아 나주에서도 생활을 했을 것으로 풀이됩니다. 허임의 아버지(허억봉)가 당시 조정에서 악공을 시험하는 악보를 만드는 데 참여할 정도로 지명도가 높은 악공이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하면 허임의 아버지 대에서 이미 한양에서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크고, 따라서 허임이 나서 자란 곳이 서울일 수도 있습니다. 중년
|
![]() |
![]() |
![]() |
허임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지 않은 지 20년 후인 1644년, 허임이 70대에 이르러 조선시대 최고의 침구서적인 침구경험방이 간행됩니다. 당시 조선사회는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을 겪으며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각종 외과질환과 응급증 등에 대한 대처가 절실히 요구되던 시기였습니다. 허임은 왕실에서 떠난 이후 전란으로 고통 받고 신음하는 병자들을 돌보며 민중들과 함께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자신의 평생의 임상경험을 널리 그리고 후대까지 전하기 위하여 침구경험방의 저술에 힘을 쏟았던 것입니다. 침구경험방의 발문을 쓴 당시 춘추관이면서 내의원 제조를 맡고 있던 이경석은 당대의 문장가이다. 그는 발문에서 허임의 침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태의 허임은 평소에 신의 의술로 일컬어졌고 평생 동안 치료한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낸 경우도 많아 일세에 명성을 떨쳤으며 침의들에게서는 으뜸으로 추앙되었다. 지금 이 경험방의 글은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손으로 시험해 본 것이다. 분명치 않은 것은 분명하게 하고, 번거로운 것은 요약하고, 틀린 것은 바로잡았다. 질병의 원인과 치료의 중요한 묘방이 한번 책을 열면 곧바로 눈앞에 선명하니 간략하면서도 쉽고 요약되었으면서도 상세하다고 할 수 있다.” 허임은 그의 책 서문에서 “이제는 늙어서 그나마 올바른 법이 전해지지 못할까 근심하고 있다. ”며 노침구의원(老鍼灸醫員)의 심경을 피력하고, “감히 스스로를 옛사람의 저술에 견주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생동안 고심한 것을 차마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읽는 사람들이 궁리해서 구급활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라며 자신의 임상경험을 후대 사람들이 널리 활용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기대는 그 후 침구경험방이 판본으로 여러 차례 간행되고, 전국각지에서 필사본으로도 수없이 만들어졌고, 언해본까지 나올 정도로 백성들의 생활의술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의 뜻은 이루지고 있었습니다. 허임이 세상을 떠난 반세기가 지난 1700년 전후 조선에 유학 왔던 일본 오오사카 출신 의사 산천순암 (山川淳菴)은 일본으로 돌아갈 때 침구경험방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1725년 일본판 침구경험방을 펴내면서 그는 서문에서 “조선의 침가(鍼家)들이 하나같이 다 허임의 경험방을 배우고 이용하여 좋은 효과를 거두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담을 전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습니다. “유독 조선을 침자(鍼刺)에 있어서는 최고라고 부른다. 평소 중국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다는 말이 정말 꾸며낸 말이 아니었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