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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잔등의 파리를 쫓아주는 마음으로
‘풀꽃상’드린 토종한우 칡소

▲ ‘풀꽃세상을위한모임(대표 허정균)’은 제14회 ‘풀꽃상’ 수상자로 우리 소 칡소를 선정했다.
우리 민족과 함께 오래 살아온 칡소가 광우병 쇠고기 파문으로 잃어버린 먹을거리 주권을 되찾
는 상징이자, 소를 육식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함께 일하는 동료로 간주한 우리의 역사를 돌아본
다는 것에 이 상의 뜻이 있다.
ⓒ 허정균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동요 ‘송아지’는 박목월 시인이 중학생이던 1930년 전후에 쓴 시다.

그런가하면 가수 정태춘의 소는 누렁소다.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
엄마소도 누렁소 엄마 닮았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충북 옥천 출신의 시인 정지용이 1920년대 중반 일본 유학시절에 쓴 시 ‘향수’의 일부다.
위 시들에 나오는 얼룩송아지와 얼룩배기 황소가 바로 우리 토종한우인 칡소다.

동요나 시 속에 남아 있는 토종한우 칡소
‘칡소’는 소의 몸에 칡덩굴 같은 무늬가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 머리와 온 몸 전체에  호랑이처럼 검은 줄이 세로로 있다 해서 ‘호반우’로도 불린다.

소 그림의 화가 이중섭(1916∼1956)의 그림에서도 칡소의 역동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칡소는 해방 전만 하더라도 이 땅의 소를 대표하던, 흔하게 볼 수 있는 소였다. ‘소’하면 바로 칡소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하면서 검정소와 함께 칡소를 일본으로 반출해 나가면서부터 그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일본이 우리 땅에서 가져간 칡소와 검정소를 개량하여 ‘화우’로 만든 데 반해, 이 땅에서는 1960년대 정부의 황우 단일화 정책으로 칡소의 씨가 마를 정도였다. 강원도 영월, 정선, 태백 등 일제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오지에서 명맥을 유지해 오던 칡소는 최근 충북, 경북 등 지자체에서 보급에 나서면서 현재 전국에 300여 마리가 있다.

고구려 16대왕 고국원왕(331∼371)의 묘로 알려진 평양에 있는 안학3호분에는 검정소 누렁소 얼룩소가 나란히 구유에 입을 대고 먹이를 먹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에 등장하는 얼룩소가 바로 칡소다. 그림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지만 얼룩무늬를 확인할 수 있다. 1600년 전에도 칡소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소였다고 할 수 있다.

1600년 전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칡소 그려져
고구려 고분 벽화가 말해주듯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동안 소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우리 민족은 소와 아주 가깝게 지냈다. 태어나자마자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송아지는 어미소 밭 가는 데까지 따라다니며 젖을 먹으며 자란다. 한 달쯤 지나면 젖을 떼고 풀만 먹는다. 7∼8개월 지나면 제법 커진다. 이 때 코뚜레를 꿰게 된다. 이 작업은 달밤에 하게 되는데 쇠부지깽이를 불에 달군 다음 콧구멍 사이를 불로 지져 뚫는다. 여기에 때죽나무를 매끈하게 다듬은 고삐를 꿰어 넣는다.

이때부터 소는 사람에게 예속당하게 된다. 그런 다음엔 바윗돌을 끌게 한다. 이런 일들은 나날이 그 산, 그 들판에서 심심하던 동네 조무래기들에게는 요즘으로 치면 이벤트와도 같았다. 어른들은 이런 모습을 일부러 아이들에게 보여주기도 하였다. 일테면 교육현장이었던 것.

‘5월 농부 8월 신선’이란 말은 소에게도 적용된다. 여름방학이 되면 소를 끌고 나가 풀을 뜯기는 일은 아이들의 몫. 밭둑이나 논둑의 소가 좋아하는 풀이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풀을 뜯게 한다. 이때 고삐를 맨 줄을 단단히 쥐고 있어야 한다. 남의 콩밭의 콩잎을 먹는 것을 저지해야 하기 때문. 때로는 힘에 부쳐 결국 한 입 허용하는 수도 있다.

▲ 칡소를 그린 화가 이중섭의 <소>.
ⓒ 전라도닷컴

농사꾼과 함께 농사짓는 동료로서의 소
소똥이 묻은 엉덩이 부분에는 늘 쉬파리가 앉아 있다. 그러면 소는 꼬리를 이용해 파리를 쫓는다. 꼬리가 닿지 않는 부분에 앉은 파리를 고삐줄을 이용해 쫓아주면 소가 고마워할 것이라 생각하며 파리를 쫓아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살이 오르고 힘이 세진 소는 가을걷이에서 힘을 발휘한다. 달구지를 끌고 나락을 실어나르고 볏가마를 싣고 정미소로, 정미소에서 다시 집으로 오간다. 소를 부리는 사람은 소와 함께 하루 종일 일한다.

자갈이 많은 신작로 길을 가려면 짚으로 만든 신발을 소에게 신긴다. 신발을 신길 때 소가 울기도 한다. 힘든 일을 미리 예측하는 것이다. 짐을 부리고 나면 소는 어둑어둑한 밤길을 빈 달구지에 주인을 싣고 재를 넘어 돌아오기도 한다. 막걸리 한잔을 걸치고 수레에 탄 채 잠이 들어버린 주인을 싣고 혼자 집에 찾아오는 것이다.

소는 겁이 매우 많은 동물이다. 소의 한쪽 귀밑에 풍경을 달아주는데 밤길을 올 때면 풍경소리를 전혀 내지 않고 오다가도 집에 다 오면 풍경소리를 크게 내서 주인을 깨우기도 한다.

소는 농가에서 재산목록 1호다. 소는 해마다 송아지 한 마리씩을 낳아 농가 소득에 큰 도움을 주었다. 소 한 마리 팔면 서울 간 아들 등록금이 해결됐다. 남의 밭을 갈아주면 그 보상으로 논일이나 밭일 한나절 품앗이를 해주었다. 밭 주인은 주전자에 막걸리 소승 한 되(1리터)를 받아 밭으로 내갔고 그 심부름은 늘 아이들 몫이었다.

논밭을 갈러 나갈 때 주인은 지게에 쟁기를 지고 소를 앞세워 좁은 논둑길이나 비탈진 산밭으로 간다. 늦가을 보리 파종할 밭을 갈 때는 소의 입에서 흰 김이 펑펑 나오기도 한다.
소가 더 이상 새끼를 낳지 못하게 되면 우시장으로 데리고 나가 팔기도 하지만 어떤 집에서는 10년도 훨씬 넘게 주인과 함께 일을 한다.

자본이 저지른 자연질서 파괴 용납하지 않아야
이처럼 농사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소를 키우는 것을 유기축산이라고도 한다. 농사를 짓고 생긴 볏짚이나 고구마순 등 부산물은 소의 먹이가 됐고 소의 배설물은 거름이 되어 다시 밭으로 되돌려져 순환하였다.

70년대 들어 불어닥친 산업화 바람은 농촌에도 밀려들었다. 상품으로서 농산물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 서너 마지기 밭 전체에 양파를 심어 가격이 폭락하면 갈아엎는 현상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축산에도 이러한 바람이 불어왔다. 논갈이 밭갈이는 경운기가 맡고 소의 임무는 축사에서 살찌는 것이 됐다. 경운기가 올라갈 수 없는 산밭이나 다랭이논은 소가 다 농사를 지었지만 80년대 들어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며 일하는 소는 구경하기조차 힘들어졌다. 내 고향 변산에서도 7∼8년 전까지 소를 몰고 동네 산밭은 다 갈아주던 친구가 있었는데 경쟁력이 없는 산밭은 이제 묵밭이 돼버렸고 쟁기는 골동품이 돼 버렸다. 이제 막 자라나는 세대들은 수천 년 이어온 소와 사람의 끈끈한 유대관계마저 알 수 없게 돼버렸다.

오직 이윤의 극대화만 추구하는 미국의 축산자본은 결국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소에게 곡식을 먹이더니 동물성 사료까지 먹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국경을 넘어 우리에게 이를 먹으며 살라고 강요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환경단체 ‘풀꽃세상을위한모임’에서는 토종 한우인 칡소에게 열세 번째 풀꽃상을 드리기로 하였다.

이는 자본이 저지른 자연 질서의 파괴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미국의 한 축사에서 소 꼬리를 잘라내고 소를 기르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꼬리로 파리를 쫓으면 그만큼 에너지가 소비되어 살이 덜 찐다는 것이 이유라는 설명을 듣고 정말 놀랐다.
쇠잔등에 붙은 쇠파리를 쫓아주는 그 마음으로 우리는 소에게 상을 드리기로 한다. 이러한 마음이 하나하나 모여 큰 강줄기를 형성하기를 바랄 뿐이다.

허정균 <풀꽃세상을위한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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