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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멈춰라!


이반 일리히 전집-4 성장을 멈춰라 : 자율적 공생을 위한 도구
이반 일리히 저/이한 역 | 미토 | 2004년 06월  \10,000원

책소개
이반 일리히는 『학교 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 『병원이 병을 만든다(Medical Nemesis)』,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Energy and Equity)』 등을 통해 이미 학교, 병원, 에너지 등 소위 ‘근대화’, ‘성장’을 상징하는 제도에 반기를 들고 이를 분석한 바 있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에서는 에너지소비가 일정한 한계를 넘게 되면 인간의 자율성을 마비시키고 제도적 통제를 필연적으로 강화한다고 주장하며 이에 대한 각종 자료를 제시했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도 ‘진보된’ 의료제도가 건강을 박탈한다는 점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논증했다. 『학교 없는 사회』에서는 배움을 의무취학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영혼의 구제와 교회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라는 멋진 수사로 현대의 보통교육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 책은 이반 일리히가 이렇게 자신이 개별적으로 비판했던 제도들에 대한 기본적?정신적 토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저작이다. 그는 이 책에서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까지 무한 성장하는 산업사회의 생산방식 대신 자율, 공동적 도구 사용과 인간의 자율적 행위의 상호교환을 중심으로 하는 공생의 사회를 주창하고 있다.

그가 성장에 반대하는 이유는 명쾌하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최소한도로만 통제하는 도구를 사용하여 가장 자율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질 때 우리는 공생적(Conviviality)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 및 역자 소개
저자 : 이반 일리히
이 책의 지은이 이반 일리히는 1926년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출생했다.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찰스부르크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1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아일랜드-푸에르토리고 교구에서
보좌신부로 일했으며,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하지만 가톨릭 사제로 있으면서 평범한 신자들만이 교회를 구원해 줄 것이라 믿으며 사제
확대정책에 반대한 것, 피임정책을 지지한 것 등 일련의 교회 정책에 반대한 것이 빌미가
되어 교황청과 마찰을 빚다가 1969년 사제직을 떠났다.

사제직을 떠난 후 『학교 없는 사회』, 『병원이 병을 만든다』 등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글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고, 독일의 캇셀대학과 괴팅엔대학에서 유럽 중세사를 강의하는 등
저술과 강의활동에 전념했다.

2002년 12월 2일 독일 브레멘 자택에서 향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가디언〉, 〈르몽드〉, 〈뉴욕 타임즈〉 등을 사후 특집 기사 등을 통해 그에게 20세기 최고의 지성 중 한 명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역자 : 이한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학력폐지연대에서 활동하며 학교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교육 질서를
모색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 시절 활동의 결과물인 『학교를 넘어서』(민들레, 1998), 『
탈학교의 상상력』(삼인, 2000)은 당시 교육에 대해 고민하던 이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최근 군복무를 마치고 개방형 정치경제학회인 ‘관악 민주주의 학회’ 대표로 있으면서
새로운 민주주의 제도와 경제제도에 대한 연구와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고민하고 있는 성과물들을 모아 『좌파 자유주의-새로운 청사진』이라는 이름으로
단행본 출간 준비를 하고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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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두 개의 분수령
II. 공생적 재건
III. 다중 균형
1. 생태계의 파괴
2. 근본적인 독점
3. 과잉 계획
4. 양극화
5. 노후화
6. 좌절

IV. 회복
1. 과학의 탈신화화
2. 언어의 재발견
3. 법 절차의 회복

V. 정치적 전환
1. 신화와 다수파
2. 붕괴에서 혼돈으로
3. 위기를 꿰뚫어 보는 통찰
4. 갑작스러운 변화

역자후기
 
• 출판사 리뷰
 
진보주의자들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1949년, 미국의 대통령으로 재선된 트루먼은 취임 연설에서 “미국에는 새로운 정책”이
있다고 선언했다. 이 새로운 정책이란 다름 아닌, 미개발의 나라들에 대해 기술적?
경제적 원조를 실시하고 투자를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당연히 우리나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연설에서는 향후 산업생산양식을 이끌어갈 중요한 단어가 사용됐는데,
바로 ‘미개발 국가(under-development country)’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이전에는 백과사전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미개발국가’, ‘근대화’는 금새 경제학과
사회학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로 정착됐다. 발전경제학이나 발전사회학이 대학의
정규과목이 된 것도 이 무렵이다.

트루먼의 취임 연설 이후 ‘개발’은 미국과 미국의 원조를 받는 제3세계의 국정지표
그리고 급기야 유엔의 정책이 되었다. ‘발전’과 ‘성장’은 구래의 지반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단어가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단어다.

마치 요즘 사용하고 있는 세계화가 그런 것처럼…

더욱 흥미로운 건 소련의 스탈린 역시 비슷한 시기에 자국민들을 ‘개발’의 바다로
노저어 가게 했다는 것이다. 개발’ 혹은 ‘성장’은 이때부터 신화가 되어버렸다.
누구도 ‘성장’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러시아의 예에서 보듯이 성장보다는 분배의
정의를 요구하는 자들조차 ‘성장’을 부정하지 못했다.
이처럼 ‘경제발전’에 대한 사고방식에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측면을 찾아볼 수 없다.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나 파시스트 그리고 나치나 레닌주의자 혹은
스탈린주의자들 역시 ‘성장’이라는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식대로 ‘성장’은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 선(善)인가?

이건 뜬끔 없는 질문이 아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장과 분배의 논쟁 역시 ‘성장’이라는
코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정부와 주류경제학자 그리고 재야 간의
대결구도로 형성되었던 성장과 분배의 논쟁은 이제 급기야 제도권 안으로까지 진입했다.

하지만 이 논쟁구도 역시 ‘성장’을 배제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성장’의 가치를 추구하던
세력뿐 아니라 소위 진보진영 역시 ‘진보적 경제발전론’이나 ‘분배를 통한 성장’을 주장하며
‘성장’에 힘을 보태고 있다.

하지만 일리히는 명쾌히 주장한다. “성장을 멈춰라!”

 

[자료출처 : www.ye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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