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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선언>을 다시 읽는다

- 삼재론과 음양론으로 본 한살림과 지역생명운동 -


윤형근 (모심과 살림 연구소 부소장)



그동안 세상이 꽤 많이 변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동구와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면서 20세기 내내 세계를 지배하던 냉전도 막을 내렸다. 정보화의 물결에 따라 자본과 노동의 이동이 자유로워지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기 시작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인종과 민족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아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게 하던 21세기는 벽두부터 초대형 테러로 시작하여 그에 대응하는 테러와 전쟁으로 지구촌을 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전쟁의 주역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오만함은 이제 동북공정의 역사 왜곡을 기도하는 중국이란 패권으로도 전염된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대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중국이 무장을 강화하며 우경화하고 있는 일본과 대립하고, 이런 정황이 북핵 위기가 맞물려 동북아시아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정세 속에서 한반도는 전쟁의 위험에 가로놓인 최전선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변화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지난 시절의 외피를 벗어가고 있다. 군사정권에서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에 이르러 절차적 민주화는 차츰 자리를 잡아가는 듯하다. 초고속 경제성장의 뒤안길에서 헤지펀드의 농간에 IMF 구제금융이라는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았던 경제는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경제 불황에서 쉽사리 헤어나지 못하면서 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참여정부조차 박정희 시대와 또 다른 개발주의로 돌파구를 찾으려 하고 있다.

대형 국책사업과 행정수도 이전, 국토 균형 개발 등은 명분과 달리 전국토를 개발과 투기 광풍으로 몰아가고 있다. 한편 한미FTA 추진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좇으면서 사회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탈락과 낙오(落伍)에 대한 공포가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 한편에서는 카드 대란과 투기 광풍, 다른 한편에서는 무기력과 절망이 우리를 지배하면서 사회 내부의 평화가 흔들리고 있다.

더 넓게 지구적으로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자연 생태와 생명의 파괴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해졌다. 지축을 흔들 정도의 초대형 지진과 쓰나미, 태풍과 허리케인, 폭설과 폭우 등 대규모 재난과 기상이변이 끊이지 않았고, 북극 빙하의 해빙으로 인한 해수면 상승은 이제 과학자들조차 어떤 재난을 초래할지 상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생명체 지구의 자정력(自淨力)을 과신한다 싶은 ‘가이아 이론’을 내놓았던 제임스 러브록조차 지구온난화로 인한 ‘가이아의 복수’로 인류가 수십억 명이 숨지는 종말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석유를 둘러싼 전쟁과 테러의 악순환은 이어지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유전자 조작과 생명공학을 통해 생명의 근원조차 상품화하면서 생명 평화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지구적인 위기, 삶의 근원적 위기을 극복하고 전망을 제시할 주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의 붕괴와 더불어 좌표를 잃은 것처럼 보이던 민중운동은 한국 사회의 후진성에 기대어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으나 통합적인 전망을 제시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이고, 1990년대를 거치면서 사회운동을 대표하는 동력으로 성장하고 기능했던 시민운동은 2000년 총선시민연대 이후 그 힘을 상실하고 모색기에 접어들었다.

<한살림선언>1)이 발표된 이후 십수년의 세월은 이렇게 흘렀다.


<한살림선언>을 다시 쓴다     


21세기를 10년 앞둔 1989년 10월 발표된 <한살림선언>은 20세기 인류사의 반성과 21세기 인류의 삶에 대한 전망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선언이 발표된 이후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다.

<한살림선언>은 일본어와 중국어 그리고 영어로 번역되기는 했지만 세간에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한 주체였던 한살림모임도 4~5년 정도 활동하다 1993년 무렵 구심력을 상실하여 사실상 해체되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아쉽게 하는 것은, 선언에서 제시한 ‘한살림운동’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보편적인 사회운동을 나타내는 보통명사가 아닌 특정단체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한편에서는 생명문화운동을 펼치던 한살림모임이 문을 닫고, 다른 한편에서는 운동의 보편화가 좌절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한살림운동은 유기농산물 직거래 운동을 통한 실천운동을 중심으로 전국 13만 명 가까운 회원을 가진 거대조직으로 발돋움하고, 그 영역도 흙살림, 물살림, 생태지역농업, 가공사업, 연대사업, 생활협동운동, 지역문화운동, 지역자치, 지역복지, 일 공동체, 시민운동, 연구소 등으로 확장하고 있다. 또한 선언이 초지일관 주장하던 ‘생명’은 이제 시대의 화두처럼 되었다.

그러나 테러와 전쟁, 지구온난화와 기후 재난들, 대규모 개발이 초래한 생태계의 파괴, 아토피와 천식 같은 환경 질병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양극화, 농업·농촌의 몰락과 지역사회의 해체, 무한경쟁과 주류사회에서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 거기에 따르는 부동산 투기 광풍, 무기력과 절망 등 생명 파괴의 현실은 더 심화되고 있다. <한살림선언>이 발표될 당시보다 오히려 더 절박하게 희망의 깃발이 필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한살림운동도 확장된 만큼 규모에 맞는 그릇으로 새로운 갱신과 진화가 필요하며, 또한 확장된 만큼 복잡해진 조직을 통합하는 내부적 전망과 동시에 <한살림선언>이 기획했던 대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사회적 전망을 제시할 의무도 안고 있다.   

<한살림선언>을 다시 읽는 작업은 적어도 한살림의 첫 출발을 되새기면서 우리가 왜 세상에 <한살림선언>이란 문제제기를 했으며, 또 왜 이 운동을 시작했는지 확인함으로써 좁게는 한살림이라는 조직의 진화, 운동체의 진화를 전망하고, 넓게는 우리 사회의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한살림운동의 역사적 뿌리와 전개과정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함께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낡은 틀을 새롭게 갱신하여 <한살림선언>을 다시 쓰는 작업일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살림선언>을 통해 처음 생명운동이 의식적이고 집단적, 조직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현재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생명학’을 정립하는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2)  


   창조적 진화의 선언


“생명이란 스스로 자라는 생성 그 자체이며 자라는 과정에서 자기의 구조와 질서를 스스로 조직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 인간은 창조적으로 진화하는 생명이다.”


<한살림선언>은 한마디로 ‘생명은 진화한다’는 ‘창조적 진화’의 선언이다. 지극히 당연한 이 명제를 통해 <한살림선언>은 시대의 전환을 밝히고 있다.

근대과학은 생명이 진화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환경도태설이나 적자생존론처럼 생명이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환경에 일방적으로 적응하면서 진화한다는 다윈의 진화론으로 집대성되었다. 이 진화론은 경쟁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근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이론으로 변주되었다.  

그런데 <한살림선언>에서 말하는 진화는 이런 다윈의 진화론과 궤를 달리한다. 그것은 일리아 프리고진과 에리히 얀치의 신과학 연구에서 입증된 ‘생명의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를 통한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를 뜻한다.3) 자기조직화는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으로 자기 성장의 프로그램을 스스로 체계 안에 갖추고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이 환경에 의해 지배되거나 굴절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세계를 창조해 나간다는 것이다. 한살림운동이 기존 시스템에 대항하거나 대응하는 시민운동이나 전통적 사회운동과 달리 부분적이라도 새로운 사회질서, 사회 시스템을 창조해 가는 것에 중점을 두어 왔던 것은 사회운동도 살아있는 생명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기조직화’를 원리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런 ‘자기조직화’라는 특성을 바탕으로 생명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역동적이고 개방적으로 진행되는 진화의 과정 속에 있다. 이와 같이 자신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또한 환경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바로 ‘공진화’이다. 생명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자기조직화를 통해 서로 협동하고 경쟁하면서 절묘하게 ‘동적인 균형(dynamic equilibrium)’4)을 이루는 생태계를 만들며 진화해 나간다.

<한살림선언>은 이어 생명의 질서는 복잡화하면서 동시에 질서화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진화의 과정인데, 여기서 “진화란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으로 분화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가 ‘많은 것’으로 분화된다는 의미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진화는 복잡하게 혼돈된 무질서가 질서화되는 과정이다. 즉 ‘많은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진화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이는 ‘복잡화’와 ‘질서화’의 두 경향을 통합하는 순환적 역동과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복잡화와 함께 질서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생명(조직)은 죽음(해체)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한살림의 ‘한’이 지닌 의미에 대한 설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하나이며 또 여럿을 동시에 뜻하는 ‘한’은 여럿으로 분화해 나가는 ‘원심적 확산’과, 가운데로 통합하는 ‘구심적 수렴’의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한’은 자율, 자치, 독립, 능동성을 갖고 있는 개체를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하나의 체계로 가지는 전일적(全一的) 전체로 엮어낸다. 여러 요소들의 하나로의 통합, 내지는 하나인 전체의 개체적 분리의 진행 과정으로 진화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적 진화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자기조직화’와 ‘공진화’이다. 이 두 가지 기본적인 특성을 바탕으로 진화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 생명의 세계이다. 주요섭은 ‘자기조직화, 공진화, 그리고 창조’라는 원칙을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자율과 연대, 창조’를 생명운동의 모토로 제안하기도 한다.

 

선언의 시대 인식


이와 같은 창조적 생명 진화의 관점을 가지고 <한살림선언>은 현재 세계를 기계 모델의 산업문명이 지배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기계 모델은 모든 사물과 물건을 자르고 잘라 개체로 환원하는 요소론(원자론)과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기계로 보고 기계로 만들어버리려는 기계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기계 모델이 만드는 사회문화 모형은 모든 생명, 모든 존재를 분할, 고립, 폐쇄, 소외, 구속, 예속시키며, 대상화시킨다. 즉, 모든 존재는 대립과 배제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어 버린다. 나와 남을 가르고, 모든 것을 남의 일로 여기며, 소외시킨다. ‘항상 나는 고정되어 있고 남이 변해야 한다거나, 남은 고정되어 있고 나는 변하고 있다’는 사고방식 내지는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생각에 빠진다. 부시 미국 대통령의 우파 기독교 원리주의가 갖고 있는 선악의 이분법은 요소론적 세계관의 극단을 보여준다.

여기에 대해 <한살림선언>이 내세우는 대안은 관계의 회복, 소통과 통일이다. 생명의 세계가 관계의 그물 속에 있다는 시각, 세계관의 회복을 대안의 첫 걸음으로 내세운다. 작은 부분이 전체의 기억을 담고 있다는 홀로그램 우주론, 티끌 안에 사방, 팔방, 시방 세계가 들어있다는 화엄경의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등이 말하는 관계론의 세계를 그 대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대립적으로 보이는 남과 북의 정권이 상호작용하고, 테러와 전쟁이 연동(連動)하며, 인체의 각 부분이 연관되어 있다는 한의학의 세계 이해는 <한살림선언>이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관계론적 세계’의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세계관으로, 생활양식으로 관계의 세계를 이루는 것, ‘각각의 개체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안다’는 각지불이(各知不移), 즉 생명의 통일 활동을 창조해 나가는 것이 <한살림선언>이 내세우는 대안이다. 여기서 통일은 하나의 몸통, 똑같은 형상을 복제하거나 합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이 조화를 이루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관계 회복이며, 다양성의 순환성과 관계성,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각기 다른 악기가 함께 연주해 내는 조화로운 음악과 같은 뜻을 지닌다.

즉, <한살림선언>은 세계를 균일한 요소들의 집합으로 보지 않는다. 서로 관계를 이루는 다양한 개체들이 존재하며, 그 개체들이 다차원적으로 얽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은 <한살림선언>의 세계관이 세계를, 혹은 인간을 균일한 요소들의 집합으로 보는 사회주의의 평균주의와 근복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자기만의 빛깔을 가진 다양한 자율적 존재들이 다차원적으로 얽혀 인드라의 생명 세계를 이루는 것이 <한살림선언>이 기계 모델의 산업문명을 대신하여 제시한 새로운 세계의 모습이다.  

선언의 두 가지 사고 틀, 삼재론과 음양론


<한살림선언>이 세계를 보는 눈, 그리고 제시하고 있는 대안에는 두 가지 사고 틀이 바탕에 깔려 있다. 세계의 실상, 본체(體)로서의 생명을 나타내는 삼재(三才), 그리고 그 생명이 현실 속에서 전개되는 양상(用)으로서의 음양(陰陽) 혹은 평화이다. 삼재와 음양은 우리 전통, 조금 더 넓게는 동양 전통에 깊이 뿌리내렸던,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우실하 박사는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북방 유목민의 삼재론을 중심으로 하면서 남방 농경민의 음양론이 결합된 음양론적 삼재론이라고 규정한다.5) 이 3과 2의 세계 이해는 서구에서도 전통적인 삼위일체의 기독교적 세계관, 바울 이후의 이원론 등으로 시대에 따라 변주되었으나 전반적으로는 이원론이 득세하였다. 특히 근대에 들어서 자연과학의 발달과 함께 이 이원론이 원자론, 기계론으로 고착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 동양 전통은 세계를 3과 2가 교차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3의 역동성과 2의 안정성이 상호 교차되고 보완되는 관계로 세계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6) <한살림선언>도 3과 2가 서로 번갈아 들며 역동성과 안정성을 이어나간다는 동양 전통의 세계관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본체로서의 생명, 삼재론(三才論)


  “우주생명인 ‘한’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이 생겨나고(一折三極), 하늘과 땅과 사람이 각각 생명을 지니면서 하나의 우주생명에 합일되어 가는 것이다(天地人大三合).”


“물질과 사람이 다같이 우주생명인 한울을 그 안에 모시고 있는 거룩한 생명임을 깨닫고 이들을 ‘님’으로 섬기면서(侍) 키우는(養) 사회적, 윤리적 실천(體)을 수행할 것을 우리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한살림선언> 곳곳에는 하늘, 땅, 사람, 또는 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달리 표현하는 인간, 자연, 사회나 우주, 생태, 인류, 또는 대안으로서 자아실현, 생태적 균형, 사회정의라는 개념들이 등장한다. 생명의 세계가 천지인 삼재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를 근거로 현재 산업문명의 위기를 파악하며, 그 대안까지 마련하고 있다.

삼재를 관계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천(天)은 신과 사람의 관계를, 지(地)는 자연과 사람의 관계를, 인(人)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의미한다. 하지만 요소론, 기계론에 바탕한 산업문명은 이들 관계를 단절시킴으로서 인간성 상실, 생태환경 위기, 공동체 해체를 가져왔다. 이것은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가 자본주의 시장의 특징으로 규정한, 인간의 노동을 통해 생산할 수 없는 노동력과 토지 그리고 신용의 상품화와 무관하지 않다. 노동력의 상품화가 가져온 인간 존엄성의 위기, 토지의 상품화가 초래한 생태환경 위기, 그리고 신용의 상품화가 낳은 공동체의 해체가 <한살림선언>의 산업문명에 대한 진단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대안은 단절된 관계를 새롭게 잇고 회복하는 데 있다. 그것이 <한살림선언>에서 말하고 있는 자아실현, 생태적 균형과 사회정의의 실현인 셈이다. 하지만 이들 가치는 별개로 존재하지 않고, 역동적 관계를 통해 하나로 통합된다. 우주 영적인 삶, 생태적 삶, 그리고 공동체적 삶을 통합하는 개인, 그리고 이 세 삶을 통합하는 세계의 실현이 <한살림선언>이 제시하는 산업문명에 대한 대안이다.

이 삼재는 윤리론과 교육론 그리고 리더십론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 우리 사상사의 전통을 집약하고 있는 동학(東學)도 이 삼재의 틀 속에서 윤리와 실천의 근거를 마련한다. 윤리로서의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과 동학 실천의 표현인 시천(侍天), 양천(養天), 체천(體天)이 그것이다. <한살림선언>은 바로 이 동학의 윤리와 실천을 오늘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표1. 삼재론의 세계 이해7) 


天(우주생명)

地(지구생명)

人(인간생명)

선언의 표현

인간을 인간답게

본성, 참된 자기

인간과 인간

전우주/자아실현

자연을 자연답게

생존의 모태, 자연

인간과 자연

전생태계/생태적 균형

사회를 사회답게

공동체, 이웃사람

인간과 사회

전인류/사회정의

선언에서 표현된 산업문명의 위기

인간성 상실․소외

생태․환경 위기

공동체 와해

위기의 근원

(폴라니를 빌어)

노동력의 상품화

토지의 상품화

신용의 상품화

관계

신과 인간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성격

영성

감성

이성

삶의 모습

우주 영적인 삶

자연 생태적 삶

사회 공동체적 삶

관계 방식

예술․종교(문화)

노동․경제

정치․사회

성장의 내용

영적 각성(미적 감수성)

생태적 감수성

자율성, 주체성, 자치력

리더십

(동학의 六任制)

장로, 어른, 영적 리더십

敎長, 敎授

경제 리더십

中正, 大正

정치 리더십

執綱, 都執

사회적 기능

문화, 교육, 복지

생태적 뿌리로서의 농업  그리고 경제

자치를 바탕으로 한 공론의 장 형성

운동영역

영성․문화 운동

환경․생태 운동

자치․공동체 운동

윤리

敬天

敬物

敬人

실천

侍天/모심

養天/기름

體天/살림


특히 주목해야 할 것 중 하나는, 동학 지도력 체계를 집약하고 있는 육임제(六任制)도 천지인을 포괄하는 리더십론을 정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육임제는 조직의 규율과 관계되는 도집(都執)과 집강(執綱)의 정치 리더십뿐만 아니라 장로에 해당하는 교장(敎長), 교수(敎授)의 영적인 리더십, 그리고 살림살이와 관련되는 중정(中正), 대정(大正)의 경제 리더십을 포괄하고 있으며, 각 영역의 아버지 역할, 어머니 역할 등 음양의 틀을 응용하고 있다. 지혜의 리더십, 경영의 리더십 그리고 정치의 리더십을 하나로 포괄하고 있는 통합적 민주주의의 기획이었던 셈이다. 즉, 오늘의 민주주의가 숫자를 바탕으로 한 정치 리더십만을 강조하고 또한 시장(market)의 효율을 강조하는 경영의 리더십만을 강조하는 데 대해 전통사회의 지혜의 리더십을 하나의 지도력 체계 속에 담고 있는 동학의 리더십론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 삼재론의 세계 이해는 우리 전통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삼위일체론, 영지체(靈知體)의 인간론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서구문명의 위기를 생태공동체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생태마을 네트워크(global ecovillage network)에서도 생태마을을 구성하는 요소를 영성․문화(cultural/spiritual), 생태(ecological), 사회․공동체(social/community)의 세 차원으로 나누어놓고 있다8)는 점을 볼 때, 삼재론의 세계 이해는 세계적 보편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좀더 정치(精緻)한 작업이 필요하겠지만, <한살림선언>의 생명 이해의 틀인 삼재론은 새로운 문명의 인간론이나 사회론, 우주론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살림선언>으로부터 제기된 이 문제는 앞으로 우리가 풀어야 할 중요한 숙제이다.


생명의 전개양상(用)으로서의 음양론


한편, <한살림선언>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삼재의 생명이 현실적으로 전개될 때는 동양 전통에서 연유한 음양의 관계론으로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음양은 동양인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한 방식이었다. 여러 가지 자연적 성질을 음양으로 나누어 생각하며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구분했던 것이다. 세상은 이 두 가지 성질인 음양의 생성과 투쟁, 그리고 둘 사이의 조화에 의해 움직여나간다. 마오쩌뚱(毛澤東)은 이런 동양적인 세계 이해를 바탕으로 맑시즘을 변용한 모순론을 썼다. 두 극 사이의 대립과 투쟁, 그리고 이의 통일로 역사를 이해하고, 이를 역사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중심에 두었던 것은 조화가 아니라 대립과 투쟁이었다.

음양론이 더 발전하면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 물(水)의 오행론이 된다. 세상만물을 다섯 성질로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오행에는 상극론(相剋論)과 상생론(相生論)이라는 것이 있다. 불이 물을 이기는 것처럼(火剋水) 세상만물은 서로 물리치고 대립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다섯 성질 모두 서로 물리치고 대립하는 상극의 성질이 있다. 이것이 바로 상극론이다. 반면 나무에서 불이 나오듯이(木生火) 서로 돕고 살리는 특성도 있다. 이것이 바로 상생론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새겨야 할 것은 세상만물은 상극도 하면서 상생도 한다는 것이다. 상생하면서 또 동시에 상극한다. 상극과 상생이 우주 만물 안에, 역사 안에, 우리의 삶 안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양적 관계론이다.

동양적 관계론의 특성은 음과 양, 상극과 상생이라는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 특성을 모두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다.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상생의 방향, 즉 생명을 존중하고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믿는다.

<한살림선언>도 이런 동양적 관계론을 이어받아 상생과 상극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균형을 이루는 것으로 생명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선언은 상극(相剋)만을 말하거나 상생(相生)만을 말하지 않는다. 상생과 상극의 상호작용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 상극만의 강조는 극한의 대립만 존재하는 멈추지 않는 무한경쟁의 세계를, 상생만의 강조는 체제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있다. 

<한살림선언>에 의하면, 음양의 관계론은 생명의 시간적인 전개, 진화의 양상으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앞에서 이야기한 생명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한 공진화, 복잡화와 질서화의 이중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생명의 진화는 생명체가 자연선택에 의해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으로 보는 다윈류의 진화가 아니라 미시적 생명이 거시적 환경과 공진화하면서 자기를 초월하고 동시에 자기를 조직화하는 창조적 활동이다.” 


<한살림선언>에서는 이밖에도 전체와 개체, 원심과 구심, 확산과 수렴을 통칭하며 우주생명의 전일성을 나타내는 ‘한’(45쪽)의 이중구조, 선언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창조적 진화에 내재하는 ‘불연기연(不然其然)’의 논리·역설의 논리, 즉 ‘아니다, 그렇다’의 생명진화론, 부분과 전체, 개성과 통합, 자유와 필연, 자기 보존과 자기 초월(갱신) 사이의 역동적 균형(dynamic equilibrium), 혹은 균형을 잃지 않는 역동을 통해 생명에 대해, 생명의 진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수운은 형태를 갖추면서 생성·진화하고 있는 천고(千古)의 만물들이 그 현상으로 보면(所見而論之則) 그렇고 그런 것 같이(其然) 보이지만 그 생성으로 보면(所自而度之則) 그렇지 않다(不然)고 하였다. 그리고 생성하는 것을 변하지 않고 고정된 틀, 즉 ‘존재’의 구조로 보면 ‘그렇다’와 ‘아니다’의 대립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긍정(肯定)과 부정(否定)의 이원론은 ‘생성’을 ‘존재’로 보는 데서 성립된다는 것이다. 수운은 이원론적 대립이 시간의 개념에서도 성립된다고 보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도 ‘이미 사라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이분(二分)되어 어느 한 쪽을 ‘그렇다’라고 보면 그 다른 쪽은 ‘아니다’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운은 긍정과 부정의 대립이라는 이원론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해결을 진화의 시각에서 찾으려고 했다.” (불연기연의 생명진화론)

“모든 생명은 그 자신보다 큰 전체에 대해서 하나의 부분이면서 동시에 많은 부분을 통합하고 있는 전체, 즉 전일적(全一的) 아조직체(亞組織體)이다.” (부분과 전체)


“부분이 전체에 통합될 때 부분은 자기의 개성을 주장하려는 경향과 전체에 통합되어지려는 경향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 경향은 상반된 것인 동시에 상보적인 것으로서 균형을 유지하며 이 균형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전체적 통합과 개성적 주장 사이의 역동적 균형이 전일적인 생명에게 유연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개성과 통합의 역동적 균형, 혹은 ‘기우뚱한 균형’)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생명 자신의 선택이며 일단 한 방향을 선택하면 다음 분기점에 이르기까지는 필연이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와 필연은 생명의 진화과정 속에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것으로 통일되어 있다.” (자유와 필연)

“생명은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동이 일정 수준을 넘어 자신의 평형을 지나치게 불안하게 만들면 마치 자동제어장치 같이 변동을 억제함으로써 다시 평형을 회복한다...... 한편 생명은 적극적인 ‘되먹임고리’를 통해 변동과 요동이 증폭되면 전체의 평형이 붕괴될지도 모르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때 생명은 낡은 질서를 해체하고 전혀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게 되는데 결국 생명은 위기를 창조적인 진화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비평형을 통한 자기 보존과 자기 갱신/초월)

   

‘달이 기울면 찬다’는 이야기와 같이 서로 대립하는 음양의 두 양상이 시간적 진화 과정을 통해 들고 나는 관계가 생명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음양의 관계론은 테러와 전쟁이 악순환하고 있는 세계정세와 한반도의 전쟁 위기 국면 속에서 <생명과 평화의 길>이나 <생명평화결사>와 같이 최근 생명운동 진영의 평화론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여기서 생명은 체(體)이고, 평화는 용(用)이다. 삼재의 생명이 현실에서 전개되는 모습이 ‘평화’인 셈이다. 평화(平和)의 평(平)은 천칭저울을 의미한다. 천칭저울에 절대적 평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평형, 기우뚱한 균형을 말한다. 화(和)는 앞에서 이야기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화이다. 즉, 끊임없이 역동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평화의 세계가 <한살림선언>이 제시하는 세계상인 것이다.    


선언이 말하는 한살림운동


<한살림선언> 5장에 표현된 대로 한살림운동은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새로운 생활양식의 창조”, 즉 전일적 삶을 창조하는 운동이다. 다시 말해, <한살림선언>이 이야기하는 한살림운동의 자기 정체성은 천지인이 조화되는 ‘전일적 삶의 창조’에 있다.


표2. <한살림선언>이 말하는 한살림운동

생명의

세계관 확립

1. 생명에 대한

우주적 각성

2. 자연에 대한 생태적 각성

3.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각성

우주․영적인 삶(天)

자연․생태적 삶(地)

사회․공동체적 삶

새로운

생활양식의 창조

신(우주)과 인간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시천(侍天)

양천(養天)

체천(體天)

4. 자아 실현을 위한 생활수양활동

5. 새로운 가치, 양식 지향의 생활문화활동

6. 생명의 질서 실현의

사회실천활동

7.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생명의 통일활동


<한살림선언>에서는 천지인이 조화되는 전일적 삶을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생명의 통일활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의 통일활동에는 민족의 통일과 전일적 삶이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즉, 남과 북뿐만 아니라 이성과 감성의 인간 마음, 분석적 지식과 직관적 지혜의 인간 의식, 육체와 정신의 인간 생명, 개인과 공동체의 인간 사회, 그리고 자연 생태계와 인간 세계를 통일시키는 것이다. 한살림은 “전우주, 전생태계, 전인류를 생각하면서 민족통일을 위한 실천활동을 수행하고, 민족통일을 생각하면서 생태적 균형, 사회정의, 자아실현의 길을 모색한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봤을 때, 한살림의 교육론은 천지인(天地人)이 통합된 전일적(全一的, holistic), 혹은 전인적(全人的) 교육과 상극/상생의 음양론(상보론)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모든 교육 프로그램은 영성, 감성, 이성의 만남을 기초로 해야 한다. 즉, 교육이란 균일하지 않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만나 영혼과 몸과 이성이 충돌하는 적극적인 요동을 통해 새로운 인간, 세상, 우주를 창조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한살림운동의 진단과 미래 


한살림운동도 여느 생명과 마찬가지로 창조적으로 진화해 왔고, 또 진화해 가고 있다. 복잡화하면서 동시에 질서화(자기조직화)한다. 다만 우려해야 할 것은 자기조직화하지 못하면 해체될 운명, 죽음에 처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자기조직화를 통한 질서화의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잡화한 조직들이 함께 통합적 전망을 공유하고 그 통합적 전망을 현실로 창조하려는 끊임없는 학습과 공부(工夫)의 과정을 조직하며, 소통을 통한 전체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한살림은 현재 유기농산물 직거래에서 흙살림, 물살림, 생태지역농업, 가공사업, 연대사업, 지부활동, 지역문화운동, 지역자치, 지역복지, 일 공동체, 시민운동, 연구소 등으로 복잡화하고 있다. 문제는 이 복잡화한 일들의 질서화를 위한 통합적 전망이다. 그 통합적 전망은 무엇일까? <한살림선언>에 기초하면, 그 통합적 전망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천지인이 조화되는 전일적 삶의 창조’이다.


확장된 개념으로서 지역공동체
 

한살림운동은 위기에 처한 자연을 살리고 공유, 호혜적 교환, 나눔, 자급 등의 원리를 통해 작동되는 호혜 경제 내지는 사회적 협동의 대안경제9)를 강화해 나감으로써 생명 파괴의 산업문명과 시장 중심의 현대사회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 구체적인 실천으로 생명농업의 결과물인 유기농산물을 매개로 농촌의 지역농업 운동과 도시의 생활협동운동, 그리고 양자 사이의 공동체적 관계망을 실현해 간다. 즉, 이런 실천을 통해 대자연을 회생시키고 사회적 협동의 대안경제를 확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살림운동은 천지인이 조화되는 전일적 삶의 창조를 위해 주로 인간과 자연이 만나는 생태적 삶의 뿌리로서 농업의 육성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 이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고 앞으로도 더욱 강조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냉철하게 살펴봐야 할 것은, 유기농산물 소비의 확대를 통한 농업에 대한 육성과 지원이 살 만한, 살고 싶은 농촌으로 이어져 왔는가라는 점이다. 그 동안의 경험은 생태적 삶의 뿌리로서의 농업에 대한 소득 지원만으로는 여간해서 살 만한, 살고 싶은 지역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창조적 진화의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생태적 물질순환과 경제적 기반의 조성뿐만 아니라 영성 문화적 교감과 자치를 통한 공공영역의 창조가 통합되는 장으로서 지역에 대한 통합적 전망을 그려야 한다. 교육, 문화, 복지, 생태, 환경, 경제, 의료, 자치, 공동체를 포괄하는 지역……

그런 의미에서 풀무학교를 중심으로 한 홍성, 홍동면, 문당리는 좋은 본보기이다. 지금까지 한살림운동이 목표로 삼아 왔던 생태지역농업10)에서 말하는 지역도, 물질순환에만 초점을 두지 말고 그 폭을 확장한다면,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유기농산물 직거래의 확대를 통한 농업과 농촌에 대한 지원 체계도 전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지역은 천지인, 바꿔 말해서 영성 문화적 교감, 생태적 물질순환, 자치를 통한 공공영역의 창조가 통합되는 장이다. 나카무라 히사시(中村尙司)의 표현대로, 지역은 전일적인 생명활동의 장이다. 전일적 삶의 창조는 지역 속에서 가능하다.11) 전일적 삶은, 물론 세계로 열려져야겠지만, ‘지역적 삶’이라 바꿔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면 도시의 지역은 어떤가? 도시도 농촌과 마찬가지로 천지인이 조화되는 전일적 삶의 창조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12) 그렇기에 현재 삶에 대한 각성, 새로운 생활양식의 창조, 자기조직화의 자율과 자치를 통한 지역공동체를 창조하는 데 진력해야 한다. 지역자치는 한살림의 중요한 일감이며 실현해야 할 우선적 과제이다. 무엇보다도 자치의 바탕이 되는 자율성, 주체성이 한살림운동의 기초이다.  

하지만 도시는 생태적 삶의 뿌리로서 농업적 토대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토대를 포괄하는 도농공동체의 형성을 통한 농업에 대한 지원은 도시 지역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살림운동에서 말하는 지역은 개념적으로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확장된다. 농업과 농촌은 도시적 삶의 거울이다. 아무리 문명이 고도화하더라도 도시가 농업과 농촌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는 농업과 농촌의 지원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13)    

결론적으로 한살림운동의 지향은 사회적 협동의 호혜경제를 바탕으로 한 지역사회의 재구성을 통한 전일적 삶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농촌이든 도시든 지역사회에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호혜의 그물망을 짜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향에 비춰 오늘의 한살림운동은 평가되고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조직의 운영원칙과 인간론
 

<한살림선언>이 말하는 조직의 운영원칙은 ‘자기조직화’에 있다. 자기조직화는 인간사회에서 원칙으로서의 자율, 사회적 행위로서의 자치로 나타난다. 법치의 근거는 법률이듯이 자치의 근거는 자율이다. 자율, 자치는 모든 활동의 기본이어야 한다. 자율적 삶, 자치적 인간…… 자율과 자치를 바탕으로 한 민주적 운영이 조직 운영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정해진 법칙에 따라 미래를 엔지니어링하는 것이 아니라 ‘공진화’가 제기하는 바와 같이 자율적 인간들이 과정을 조직하는 운동의 방식, 조직 운영 방식을 취해야 한다. 즉, 운동의 과정은 학습 과정이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또한 <한살림선언>은 생산-유통-소비-분해(폐기)-다시 생산으로 이어지는 생태적 물질순환을 주장한다. 생산만으로, 유통만으로, 소비만으로는 통합적 삶을 이룰 수 없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 그러나 경제주의라는 틀에 갇힌다면 나락 한 알 속에 우주는 없다. 부엌에서 세계가 보인다. 그리나 조합주의의 한계에 빠진다면, 부엌에서 세계를 볼 수 없다.

직거래는 경제주의로, 생활협동은 조합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크다.14) 경제주의와 조합주의는 필연적으로 우주생명을 모시고 있는 무궁한 인간을 어떤 요소로 고착시키고 가두는 오류에 빠진다. 한살림은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천지인이 조화되고 생산-유통-소비-분해(폐기)의 물질순환을 통합하는 삶을 살아가는 통합적 인간을 지향한다. 따라서 운동의 주체를 생산자, 소비자로 한계지어서는 안된다. 직거래는, 혹은 경제주의는 출하자로서의 생산자와 구매자로서의 소비자를 고착시킨다. 직거래에서는 항상 생산자와 소비자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한살림운동, 생명운동의 주체는 천지인의 삶이 통합된 인간으로 개성적 지역문화의 창조, 생태적 뿌리로서의 농업 살림, 지역자치의 실현을 이루는 주체여야 하는 것이다.


진화의 방향, 정치기획과 문화운동


<한살림선언>은 내용 속에 실천운동, 생활운동과 함께 하는 문화운동적 전망을 담고 있었다. 사회주의의 붕괴가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기술적 산업주의의 위기라고 선언하고, 낭비적 소비문화의 확산에 대해 생태적 검약을 주장하는 생명의 세계관를 제기하였다. 또한 산업주의의 도구적 존재로 추락한 인간을 존엄한 우주적 존재로 복권시키고, ‘밥’을 매개로 한 생활협동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생활세계를 의미화하고 정치화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주변인이었던 여성들을 운동의 주체로 부각시키고 ‘살림’을 사회적 의미로 확장시키는 등 문화기획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한살림모임의 해체와 함께 한살림의 문화운동은 축소되어 버리고 생활실천운동의 동력만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따라서 <한살림선언>은 오늘 여기의 현장에서 새롭게 씌어져 문화운동이 실천운동을, 또한 실천운동이 문화운동을 앞에서 뒤에서 끌고 밀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선언해야 한다.

특히 생명문화운동은 자기 갱신의 정치기획을 통해 생명운동의 자족적 경향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공영역을 창조하는 한살림의 또 다른 중심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의 원리인 순환성, 다양성, 관계성을 새로운 사회원리로 제기하며 그것에 맞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문화기획, 정치기획이 필요하다. <한살림선언>이 세상을 향해 외쳤던 웅숭깊은 이야기가 조직 내부에 갇혀 축소되고 사회적 의제를 주도하지도 못하는 위축된 모습에서 벗어나 이제 시야를 넓혀 세상을 향한 평화의 메시지를 던져야 할 때이다.

한살림이 선언한 것은 진화하는 생명의 활력, 삶의 기운이었다. 전쟁의 공포와 환경재난, 공동체의 해체로 질병에 걸린 세상을 치유할 생명의 힘이었다. 사람들 속에 깃들어 있는 거룩한 생명의 힘을 다시 찾고 되살리는 것이었다.

<한살림선언>이 발견했던 바로 이 생명의 활력을 바탕으로 오늘 여기에서 우리는, 대지와 푸른 하늘의 공기,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마저 휩쓸어버리는 냉혹한 시장의 질서, 환경재앙과 자원 전쟁, 절망과 무기력와 같은 죽임의 질서가 지배하는 전생명계를 되살리며, 남과 북, 지방과 중앙, 지역과 세계, 공동체와 시장, 정착과 유목을 통합하는 새로운 전망을 밝히고, 다시 생명·평화의 길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한살림모임>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이것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생활양식의 창조’를 목표로 1989년 10월 29일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창립하였다. 재야운동가이며 서예가인 고 무위당 장일순, 시인 김지하, 한살림 회장 박재일, 최혜성, 김민기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한살림모임은 대중강좌, 영상물 제작, 수련법의 정립, 환경운동과 자치운동 등을 벌이며, 사회적으로 ‘생명가치’를 새로운 시대와 문명의 가치기준으로 삼을 것을 제안하는 생명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5년 가까이 적극적으로 활동을 벌이다 1994년 구심력을 잃고 유기농산물 직거래의 생활실천운동을 전개하던 사단법인 한살림에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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