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여보! 태안에 가자, 집에 보일러 끄고...’

정호(초록당(준) 집행위원, 환경분야 대변인/ (사)생명과 평화의 길 운영위원/ 광주천영산강살림생명네트워크 상임집행위원장/ 전 광주전남녹색연합 사무처장)

한 달 전에 아파트에서 주택 1층으로 이사를 왔다. 이사를 온 날 아내가 우울증에 걸렸다. 한 드럼에 21만 원 하는 기름 값 때문이었다. 살아오는 동안 자기와 가족의 생존을 위해 생태적 인간으로 거듭난 아내의 처지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 된 것이다. 아파트에 사는 동안에도 여간해서는 보일러의 온도가 15도를 넘지 않았다. 가끔 손님이 오거나 목욕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큰방 또는 거실 한 곳만 보일러를 틀었다. 그래도 별 추운 줄 모르고 살았다. 일 년 난방비가 기름 한 드럼 값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22개월 된 딸 시원이를 가진 우리 부부가 유가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는 2007년 연말에 기름보일러 주택으로 이사 온 것은 실패한 일이다. 족히 20년은 넘었을 주택은 곳곳이 바람길이다. 철물점에서 사 온 문풍지로 방문사이 빈틈을 메우고 광목천 커튼으로 창문을 막아도 바람은 기어 들어온다. 벽자체가 냉골(冷骨)이다. 아내는 이사 첫 날부터 기름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사실 아파트에서 매일 따뜻한 물에 목욕하는 특혜를 누린 남편에게 습관을 바꾸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시간은 새벽 1시, 아내와 딸은 가장 작은 방에서 잠을 자고 있다. 아내는 오늘도 틀림없이 중간에 깨거나 새벽이 되면 보일러 온도를 내리라고 할 것이다. 어제 새벽에도 아내는 여지없었다. 보일러 온도 11도, 더 내리라니, 새벽이불 속에서 아내와 나는 웃고 말았다. 며칠 전 아내는 처남댁에 김장을 도우러 갔다. 저녁 무렵 딸을 데리고 가 처남식구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했는데, 한참이 지난 뒤 아내와 딸의 얼굴을 보니 빨갛게 익어 있었다. 며칠 새 추운 주택에서 기름과의 전쟁을 치룬 상흔이었다. 얼었던 양 볼이 따뜻한 아파트에서 녹아내린 것이다. 기름보일러 주택은 기름 값이 무섭다. 그래서 춥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누리지 못하는 몇 가지 즐거움이 있다. 집 안에서 마음껏 뛰어 놀 수 있고, 작은 마당은 딸의 미끄럼타기, 아내의 줄넘기 등 가족 놀이터가 되었다. 아파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사 오기 전 시달렸던 층간 소음에서 해방된 것이다. 또 하나는 인간의 적응능력을 새삼 재확인하는 즐거움이 있다. 이불 속에 감춰진 딸의 발을 살그머니 감싸 쥔다. 아빠의 찬 손을 거부하지 않고 , 곤한 잠에 빠진 딸, 내일 아침이면 우리 가족은 다시 내복을 여미고, 양말과 외투로 무장한 채 마당 놀이터를 점령할 것이다. 지난 12월 발리 기후변화회의에 참가하지 못한 남편에게 우리 집이 유엔 기후변화총회가 다루는 온실가스의 전장(戰場)임을 강조하는 아내는 한 드럼의 기름으로 금년 겨울을 나기 위해 또 결의할 것이다.

이 사이 태안 앞바다는 온통 검은 기름에 뒤덮여 있다. 기름이 서해를 시커멓게 삼켜버린 것이다. 지난 달 14일 새벽 4시에 찾은 만리포는 참혹한 주검이었다. 여명이 동터 와도 태안 앞바다는 검었다. 천수만 습격이 시작되고, 멀리 개야도 까지 검은 기름띠가 흘러가고 있었다. 1만 3천 톤의 초대형 기름유출사고, 실로 상상을 초월한 재앙이다. 이미 우리나라 유일의 신두사막을 덮쳤고, 태안해안국립공원의 모래백사장과 자갈은 검은 흡착포와 기름으로 온통 범벅이 되었다. 갈매기 종적을 감춘 태안앞바다는 한동안 검은 바다의 통곡소리만 가득할 텐데,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철새도 떠나고, 자연산 전복도 살지 못하는 태안에 누가 깃들어 살겠는가? ‘여수 시프린스호 기름유출사고 때, 남의 일인 줄로만 생각했지요, 무섭습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만리포로부터 남쪽으로 4km에 위치한 파도리 주민 신용식 씨의 탄식은 검은 타르 이상이었다. ‘유화제로 인한 2차 오염이 더 걱정입니다...’ 방제당국이 연안생태계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시프린스호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기름유출사고선인 ‘허베이 스프리트’와 현대오일뱅크는 이중선체를 사용하지 않았고, 삼성중공업의 크레인 부선도 충돌위험을 알고도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않았으니, 이번 일은 기름을 둘러싼 자본과 권력의 해이한 태도, 한마디로 기름자본권력이 만들어 낸 재앙이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새벽냉골사이, 바람을 타고 들린다. 여전히 보일러 온도는 11도, 그러나 아내와 딸의 잠든 표정은 예쁘다. 내가 새벽 만리포를 다녀오기 전 부터 태안을 걱정하던 아내의 속살이 따습다. 불 꺼진 새벽 방, 아내가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에 깨지 않았으면 하고 아내와 딸의 따듯한 발을 살며시 잡는다. 아내가 속삭인다. ‘여보! 태안에 가자, 집에 보일러 끄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은 현실을 너무 모르고 하는 말이다. 태안에 가 보라. 남의 일이 아니다. 어떤 이는 그저 울기만 할 것이다. 그래도 좋다. 검은 파도가 검은 모래를 삼키고 뱉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무엇을 하는 것이다. 기름을 거두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태안에서는 쉬운 일이다. 혼자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운 겨울에 보일러의 온도를 낮추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복과 외투, 그리고 가족과 함께하는 즐거운 운동이면 거뜬하다. 지구온난화가 걱정이 된다면 유엔기후변화총회의 현장이 발리가 아니라 내 집이거나 태안의 검은 바다라는 점을 자각하면 된다. 문제는 기름이다. 기름을 어떻게 우리의 삶에서 거두어 낼 것인가?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혹 태안에 가거든 여럿이 함께 버스로 갈 일이다. 홀로든 둘이든 자가용은 안 된다. 자가용은 기름을 붓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태안에 가거든 집에 보일러는 반듯이 끌 일이다. 온도를 낮추거나 그대로 두어선 절대 안 된다. 그대의 집에서 새는 검은 기름이 지구온난화의 대재앙을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월간 숲 2008년 1월 호에 실린 글입니다.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TAG
more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