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0/01/수/성북/맑음]
월곡교회/밤나무골공부방/진각종/성북평화의집
= 걸은 거리: 10km
= 일 정 : 성북구 길음시장근처(100대 절명상) - 미아리 텍사스촌 - 월곡교회 - 밤나무골 공부방 - 장위골목시장 - 대한불교 진각종(점심) - 성북정보도서관 - 장위시장 - 월곡초등학교 - 애기능터(100대절명상) - 장위시장(저녁) - 성북선교본당/성북 평화의집(간담회/잠자리)
= 글쓴이 : 백선희(강릉등불)
늑대에 의해 키워진 아이
아침 누룽지를 먹고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절명상 27,28번 문안입니다.
‘인위적 질서를 극복하고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는 삶이 생명평화의 길임을 확신하며 절을 올립니다. 생명의 실상에 입각하여 설명한 진리의 세계관인 생명평화경을 음미하며 절을 올립니다’ 인위적 질서와 무위자연의 법칙, 그 사이에서 서로 상반되지 않고 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삶이 생명평화의 길인가? 질문이 오갔습니다. 이성구님은 늑대에 의해 키워진 아이를 사회적 존재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질문하셨고, 도법스님께서는 소유하고 독점하고 군림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삶은 결국 권력·전쟁으로 나타난다 하시며, 자연적으로 자란 아이에게서는 생존욕구만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공회 나눔의 집 송민기님께 등불을 전달하고 길음시장 근처 공원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피스 워커 일본분들과 지역분들과 함께 100대 절명상을 하였습니다. 절명상 한구절한구절 정스럽게 하는 것이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주원님의 안내로 발걸음을 옮겨 길음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재개발된 인근 아파트의 소비자층은 대형마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 그런지, 재래시장이 300m 이상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길음 뉴타운 위쪽 산동네는 판자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음 시장을 이용했고, 이 시장은 성북구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고 합니다.

줄어들고 있는 길음 시장을 돌아 미아리 텍사스촌을 향합니다. 미아리 텍사스촌은 주변지역 개발로 인해 400여개 되던 낱낱의 텍사스가 40여개로 대폭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텍사스촌이 있는 이 곳, 월곡동은 그 이름처럼 달이 계곡 안으로 숨어드는 현상을 보여주는 듯 하였습니다. 길음역 사거리를 돌아 골목길을 걷습니다. 골목어귀에서 만난 월곡교회, 마치 난장이가 살 듯한 작은 집이었습니다. 아이들 공부방이 운영되고 있었고, 작디작은 교회당 안은 성령의 보금자리인 것만 같았습니다. 함석헌, 문익환, 제정구 등 당시 반체제 독재 투쟁하셨던 민주화세력들이 이 교회를 보금자리 삼아 재야활동을 했다던 장소, 십자가가 땅에 박혀있었습니다. 십자가가 하늘을 향하지 않고 땅에 박혀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하월곡동 모랫말 근린공원 근처에 있는 밤골아이 네 공부방으로 뚜벅뚜벅 길어진 행렬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밤나무가 많았던 동네에 그리스도의 성혈흠숭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이 공부방에서 환영의 인사말이 걸려있었습니다. 조손가정·한부모가정·다문화가정·저소득층 맞벌이가정 등 초중고 100여명의 아이들이 공부하며 가족적인 분위기의 대안가정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만나지는 못했지만, 탁발순례단을 응원해주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괜시리 기분이 좋아졌더래요. 현장에서 아이들과 열심히 생활하고, 기도하며 마음으로 함께하겠다는 김희경 수녀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월곡 산2번지, 꼬방동네 사람들
방천시장입구 사거리를 돌아 산2번지에 오릅니다. 성북동 비둘기가 앉을 번지수도 없다는 그 달동네 언덕을 올랐습니다. 그러나 옛 판자촌의 풍경은 온데 간데 없고, 몇 십층인지 감이 안 잡히는 높은 아파트들이 우뚝우뚝 제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난곡동·월곡동·삼양동은 서울에서 가장 큰 판자촌이었다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 곳 모두 개발이 되어 그 모습을 온데간데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속에 생계를 꾸리고 터전을 이루며 살던 사람들은 인근 상계동·당고개·장계동으로 이사를 가야했습니다. 먹고 살 터전이 이곳에 뿌리내려졌으니, 그 터전마저 버리면 더 오 갈데없는 신세이기 때문이지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월곡 산2번지에 살았다던 문정호님은 깡패들이 판자촌 사람들에게 마구 행패를 부리던 시절을 절절히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다양한 폭력이 얼룩져있는 전면철거방식은 판자촌 사람들의 아픔이 깃들어 있어 <나눔과 미래>단체에서는 부분적 개발과 순환 재개발을 하기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언론에도 나오지 않았던, 영화 속에서만 얼핏 상상할 수 있었던 모습들이 현실 속에서는 무수히 많은 모습들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문정호님은 아직 개발조합이 설립되진 않았지만, 곧 아랫동네 밤나무골 시장도 개발계획을 가지고 있다하여 세입자 상인들은 오갈데 없는 신세를 한탄하며 세월을 보낸다 하셨습니다.
산2번지는 영화와 소설의 배경이었던 ‘꼬방동네 사람들’로도 유명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빈민운동가들과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 그 속에서 함께 했던 동월교회 허병섭 목사님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멋도 모르고 십년 전 사라진 동월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월곡 산2번지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로 얼룩져버린 아픔의 땅이었습니다.
언덕을 내려와 동덕여대를 지나서 대한불교 진각종에 도착하였습니다. 진각종은 밀교계통의 종교인데, 시방삼세에 하나로 계시는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을 교주로 하고, 부처와 종조의 정전인 육자대명왕진언(옴마니반메훔)을 신행의 본존으로 받들어 법신불의 진리를 체득하고 현세정화함을 종지로 한다고 합니다. 진각종 어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취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자연도 사람도 숨쉬지 않는 땅
오후에는 장위골목시장을 들렀습니다. 이곳 장위동은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이 살아있는 동네인데, 장위시장이 살아있는 이유는 주변에 대형마트가 없는 8만명 소비계층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장위초등학교를 지나 장위동 성당에서 쉬었다가 애기능터로 가는 언덕에 올랐습니다. 애기능터는 1907년 고종황제의 장자였던 안왕이 12세 때 일찍 세상을 떠나 묻혀있었으나, 곧 공주와 왕자묘가 있는 곳으로 이장되었다 합니다. 애기능터 앞에는 시야가 확 트였습니다. 의릉·한국과학기술원·예술고등학교·성북구의회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가운데에는 내부순환도로가 속력을 내며 질주하는 자동차들을 품어 안고 있었습니다. 듬성듬성 산이 보였지만, 아파트촌과 그 위로 싸여진 뿌연 기체들 때문인지 ‘저 속에서 어떻게 살까’ 싶게 마치 죽음의 도시를 연상시켰습니다. 그 하늘 위로 제트기가 세상의 소리를 마음껏 빨아들이듯 엄청난 소음으로 저 멀리 날아가더니, 색색의 연기를 뿌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국군의 날입니다. 함께 순례하고 있는 피스 워커 분들은 이 풍광을 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하였습니다. 애기능터 뒤 공원에 둥글게 둘러앉아 오늘 순례를 마무리하는 100대 절명상을 하고,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내 육신은 낡은 수레와 같다
아침에 절할 때는 의미를 잘 몰랐는데, 계속하다보니 둥그렇게 모여 절하는 모양이 보석같아 보였다던 마까시님, 이야기로만 듣던 달동네와 판자촌은 사라졌지만 다시 세워진 건물 하나하나에 알게 모르게 흔적들이 남아있는 것처럼 느꼈다던 길혜미님, 지역을 조직하는 게 쉽지 않았고, 국정감사기간·뉴타운재개발 문제 때문에 이리저리 바쁘셨다던 이주원님은 내일 순례할 강북 판자촌이었던 동네가 고향이시라며 기도해 달라 하셨습니다.

‘내 기계가 낡아가는 구나!’ 새삼 느끼시고, 생명평화의 화두를 가지고 지금여기 걷고 있지만, 내가 왜 걷는지도 모르고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정신이 산만해지는 것에 안타까워하셨던 천선혜님은 숲 사이로 포크레인 움직이고 길가에 철벽을 쌓아놓고 아파트를 짓는 뉴타운 개발바람을 실감하였는데, 애기능터에서 바라볼 때 풍광의 3/2이상이 아파트와 도로인 것을 보며 ‘이 세상이 왜 이러나’ 내 마음이 그것과 함께 어떻게 평화로워야 될까 고민 하겠다 하셨습니다.
도법스님의 소감도 이어졌습니다.
“요즘 우리가 ‘지구가 위험해지고 있다. 긴급대책을 세워야 한다 시간이 얼마없다.’ 그런 얘기 들으면서 막연한 감이 있었는데, 서울순례를 하고 특히 오늘도 애기능터에서 조망한 것처럼 녹지가 얼마나 줄어들고 있는지 보이잖아요. 지구의 위험성이 그만큼이지 않겠나 생각하게 된다. 보이는 숲 언덕을 야금야금 짚밟고 가기도 하고 서울 스스로가 생명의 조건을 말살시키는 조건, 오늘 조망했던 이 모습을 지구에 적용하면, 지구가 이런 모습이겠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모든 것은 숨을 쉴텐데 서울은 땅이 숨을 쉴 수 없도록 뒤덮고 있다. 꼼짝 못하고 죽든가 폭발하든가, 둘 중하나, 둘 다 심각한 문제가 야기된다. 숨구멍을 이렇게까지 막아 내리면서 사는 우리들의 삶은 괜찮은가?
세 번째는 빈민운동이 활발하고 빈민에 대한 대책을 해결한다고 하는데, 왜 이 빈민문제는 반복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인가? 뭔가 다른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고 다른 길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나 걱정스럽기도 하고 답답한 순례길이었습니다.“ 하셨습니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공동작업장과 햇살놀이어린이집에 들러 주민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저녁 먹으로 식당에 가는 길, 시장골목에는 약속이나 한 듯,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마음속의 종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성북 선교본당에서 간담회를 했습니다. 주로 천주교 신자분들, 지역의 빈민사목하시는 수녀님들이 많이 참석하셨습니다. 어느덧 달빛이 동네를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오늘은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유난히 힘들었던 순례 길이었습니다. 달빛이 순례자의 마음을 녹아들게 합니다.

= 글쓴이: 김영지(대구 청소년, 순례 참여자)
오늘 처음 순례에 합류했다. 순례단과 엇갈려 처음엔 같은 곳을 뱅뱅 돌았지만 시장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하니 그 재미도 꽤 쏠쏠햇다. 월곡교회에 갔었는데 교회가 정말 아담하고 예뻤다. 또, 월공동네에 갔다. 가파른 길을 끙끙거리며 올라갔더니 여기가 달동네란다. 난 월곡이란 이름이 맘에 들었다. 달(月)을 노래한다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달빛이 비치는 계곡이라고 한다. 오늘 순례는 내가 생각했던 ‘순례’의 이미지와 완전 달랐지만, 거기서 나름 재미를 느꼈다. 앞으로 더 재미있어질 것 같다. 걸을 때는 골목을 걷는게 아닌 것 같았지만 막상 걷고나니 그것도 또 다른 공부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늘은 색다른 하루였다. 남은 3일도 즐거운 하루가 될 수 있기를!

** 함께한 사람들
= 도법, 장경훈, 이성구, 이도담, 최성진, 이상환, 김경찬, 정수영, 백선희
= 안명옥(양주), 전민기(대구), 임현수(대구), 김영지(대구), 김윤정(대구), 문정호(성북구), 노일경(목사/성북구), 박창완(진보신당), 피스 워커(마사키,간페이,후지이), 나눔과 미래(이주원/실습생), 김은미(성북구), 미지(종로구), 성북평화의집(4명) 외 서울시민2명, 김종훈(진각종) 외 3명, 김희경(수녀/밤골아이네공부방), 총26명
** 감사합니다!
= 순례안내(이주원/문정호), 점심식사(진각종), 저녁식사(월곡교회 노일경목사), 잠자리(성북평화의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