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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공황'의 정체, ‘생장소멸’의 경제학
-글로벌금융위기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
난리가 났습니다. 다른 수사를 발견하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어제 오늘 다소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연일 경제기사의 타이틀은 ‘패닉’, ‘패닉’이란 말뿐이었습니다. 돈이 되는 곳이면 지옥에라도 달려갔던 ‘투기자본’(Investment Bank)과 그의 프렌드(정부)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의 몰락, 금융자본주의의 붕괴, 자본의 세계화의 후과 등을 거론하나 필자는 사실 경제를 잘 모릅니다. 다만 최근의 공포와 불신의 연쇄폭발은 세상의 이치로 보아 필연적이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우선 주식이든 펀드든 선물이든 파생상품이든, 이것은 돈 놓고 돈 먹는 투전판이나 화투의 끗발을 겨루는 ‘섰다판’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영화 ‘타짜’가 가르쳐준 것처럼 도박판에서는 ‘아무도 믿을 놈이 없다’는 것을 몰랐단 말입니까? 이런 의미에서 크레딧(credit), 즉 신용(信用)이란 탐욕과 불신의 ‘현상유지(status qua)’일 뿐, 월스트리트와 금융시장에 믿음과 신뢰는 애당초 없었다는 것입니다. 신용위기는 시한폭탄이었다는 말입니다. 시장지상주의는 오히려 이를 부추겨 뇌관역할을 했고요.
어렸을 적 화물기차에서의 화투판이 떠오릅니다. 어쩌다 타게 된 완행열차의 화물칸. 논두렁 건달들 몇이 모여 사과궤짝 위에 판을 만들어 화투를 칩니다. 지폐와 고성이 오가며 판이 무르익을 즈음 갑자기 열차 안이 컴컴해졌습니다. 터널을 지나게 된 것입니다. 객차가 아닌 화물차에는 조명등이 없었습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이내 난리가 났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내 돈 내 돈” 하며 ‘패닉’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윽고 다시 열차 안이 밝아졌습니다. 하지만 이미 상황종료, 회복불능, 화투장과 동전과 지폐가 어지럽게 널려있습니다. 상대를 탓하며 욕설이 난무하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가 더욱 근본적입니다. 돈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저토록 무섭게 비대해질 수 있을까요? 돈은 이자를 먹고 자랍니다. 어떤 돈은 많은 이자를 먹어 더욱 빨리 자라고 어떤 돈은 조금 늦게 자라기도 합니다. 욕심을 내다 꺼꾸러지는 돈도 자주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은 예외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에는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본주의 즉 ‘무한성장경제’입니다.
태어나고 자라고 쇠하고 사라지는, 돈에도 생장소멸(生長消滅)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모든 생명은 시간과 함께 늙어갑니다. 물건들도 낡아갑니다. 그런데 돈은 낡지도 늙지도 않습니다. 가만히 은행금고에 누워있어도 계속 부풀어 오릅니다. 그렇다면 진짜로 풍선처럼 터지는 것은 필연적인 운명이 아닐까요?
20세기 초반 유럽의 실비오 게젤이라는 사람이 창안했다는 ‘노화하는 돈(Aging Money)’이 생각납니다. 돈에도 생장소멸이 있답니다. 돈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감가상각’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게젤이 ‘자유화폐’라고 이름 붙인 그 돈에는 마이너스 이자가 붙습니다. 안 쓰고 가지고 있으면 새 물건이 낡듯이 가치가 조금씩 줄어듭니다. 그러니 얼른 소통을 시켜야합니다. 때문에 순환율이 높아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자연 사이에 더 많은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순환성, 관계성의 경제학. 바로 생명과정의 본성입니다.
1930년대 세계 경제공황 시절 미국을 비롯해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자유화폐’의 개념을 빌린 다양한 지역통화들이 경제시스템 붕괴의 실질적인 대안으로 실험되었고 실질적인 효과가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화폐시스템을 독점하려는 중앙정부에 의해 모두 저지되었지만.
달러경제의 붕괴, 혹은 글로벌 경제공황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이즈음, ‘무한성장 경제학’의 신화에서 벗어나 ‘돈과 경제의 생장소멸’을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삶/생명 경제학’의 소박한 시작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