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밥상의 재설계 - 공손하게 밥상을 모시자
정호 광주불교환경연대 감사
생명에 대한 전일적 각성
광주불교환경연대의 감사를 맡은 후, 첫 기고를 준비하면서 내 서재의 여러 책 가운데, ‘물은 답을 알고 있다’를 다시 손에 든 것은 행운이다. 이 책에 실린 물의 결정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맑아지는 것을 느낀다. 마치 지리산 세석산장의 음양수를 한잔 들이킨 것 같다. 세석산장의 음양수는 이 책에 소개 된 야마나시현 용천수의 결정과 흡사할 것이다.
요즘 마음에 여유가 없다. 고도로 긴장되어 있는 나를 보고 놀란다.
짐짓 태연한 듯 보이는 겉과 달리 광우병쇠고기 파동으로 몰아닥친 온 국민의 생명안전문제와 공장식 축산의 야만적 폭압에 시달리는 소의 운명 그리고 세 살 된 딸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혼돈 즉 카오스다. 공명이론에 따르면 모든 국민의 마음도 혼돈일터, 일상이 무겁다. 그러나 90%의 물로 구성된 천진난만한 딸아이를 보면서 이내 마음을 다시 고쳐먹는다. 분위기를 바꾸려 애쓰고, 즐겁고 행복한 아이의 미래를 위해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어린 딸을 통해 평상심을 회복하고 무한한 감사와 용기를 갖는다. 조화 즉 코스모스다. 헉슬리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애처럼 사실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선입견을 버릴 준비를 하라. 자연이 이끌어 가는 혼돈이 어떤 것이든 겸손하게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혼돈과 질서는 사실은 혼돈이면서 동시에 질서다. 카오스모스다. 혼돈 속에서도 조화로움을 잃지 않으려면 늘 감사하고 사랑에 충만한 의식이 일상을 지배해야 한다. 그러나 근대산업자본의 욕망에 길들여진 노예화 된 의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의 권력에 용감히 맞서다 다우치수용소에 감금된 에드가 쿠퍼의‘서로 사랑하라는 신의 계율이 통치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양심과‘내가 동물의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다른 생명의 고통과 죽음에 힘입어 나를 살찌울 수는 없다’는 생명에 대한 전일적 각성이 수반된 의식이어야 한다.
이럴 때 광우병쇠고기 사태의 본질이 제대로 보인다.
하루에 세 번 대하는 밥상
눈 덮인 오후 식당에서 때 늦은 점심식사를 하던 중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먹는 우리의 일상을 새삼 돌아보았다. 부대찌개를 시키고 나서 무심코 소시지와 라면사리에 우리의 미각이 점령당해 있음을 발견했다. 계란말이는 또 얼마나 맛있는가? 식사하는 내내 우리의 식습관이 누군가에 의해 길들여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고픈 시절 구황작물로 끼니를 때운 민족적 기억을 가지고 있는 동안, 집단적으로 철저히 길들여진 것이다. 쌀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소시지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닭은 어떻게 사육되는지, 베이컨 창고라 불리는 양돈장에서 돼지는 어떻게 취급되는지, 기업형 축산도축장에서 소와 송아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런 것은 질문사항이 아니었다. 궁금해지기도 전에 우리는 밥상의 날조된 진실앞에 무력한 존재로 전락했다.
닭, 돼지, 소, 그들이 당하고 있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아토피, 비만, 당뇨병, 골다공증 등 수많은 병이 우리가 의식하기 전에 하루 세끼 이어지는 밥상을 통해 생성되고 진화해 간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가 지적한 대로‘습관은 사람들을 어떤 잔혹행위에도 타협시킨다’더니 우리는 이미 공범이 되어 버렸다. 하루 세 번 대하는 밥상,
이 자리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다. ‘인간은 자신의 이로 자기 무덤을 파고 있다. 이 치명적인 무기는 지금까지의 어떤 무기보다도 더 많은 살인을 불러왔다.’는 토마스 모페트의 지적대로 계속 욕망의 범죄를 저지를 것인지, 온 우주의 협동으로 살아가는 뭇생명과 공생할 것인지, 하루에 세 번 밥상 앞에서 성찰하며‘깊이 뉘우친
다’고 단언해야 한다.
생명죽임의 논리 - 동물성단백질 제국의 허구
지금 나의 몸무게는 67kg이나, 대학졸업 무렵까지 58kg 전후의 마른 체구였다. 신장이 173cm이니까 일반적인 신체건강의 기준에 따르면 불균형이었다.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가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당시 육류섭취는 건강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선이었다.
풀만 먹어서 무슨 힘을 쓰겠느냐? 우리는 이렇게 교육받아 왔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미국 어린이들을 겨냥한 전국방송의 테마 광고송“오, 내가 오스카 메이어 사의 비엔나 소시지라면! 난 정말 그것이 되고 싶어. 내가 만일 오스카 메이어 사의 비엔나 소시지라면, 모두가 날 사랑하게 될거야”와 같은 광고를 틀림없이 우리나라에서도 들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하루 단백질 양은 낮게 잡으면 하루 총열량의 2.5%, 높게 잡아도 8%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단백질 자본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30%의 단백질이 필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단백질은 그날 필요한 양을 뺀 나머지는 오줌을 통해 배설되는데, 평균 미국의 가정이 이 불필요한 단백질에 쓰는 돈이 매 달 40달러로, 이것은 단백질 생산자들에게 연간 360억 달러의 수입을 보장해주는 반면, 기아에 시달리는 제3세계 어린이들의 생명을 구할 단백질을 빼앗는 것이 된다.‘ 한 작은 행성을 위한 식생활’의 저자 라페는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지 않고, 완전 채식만으로도 충분한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다고 한다.
국립과학아카데미의 식품영양위원회도‘전세계 인구 중에서 완전 채식가들은 뛰어난 건강을 유지해 왔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한 여러 기관의 다양한 연구를 통해 채식이 육식에 비해 지구력을 증강하고, 골다공증 신장결석 신장병을 예방하며, 장수하게 하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물성단백질기업은‘하루에
우유 3잔 이상을 마셔라’‘계란은 완전식품이다’‘햄버거는 햄버거 밭에서 자란다’고 사기치고 있다. 닭, 돼지, 소가
겪고 있는 가공할 고통과 무자비한 살육을 ‘우리 닭은 천국에서 살고 있어요’‘넓고 푸른 목장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젖소’라며 방긋 웃는 사진까지 덧붙여 돈을 긁어모으는 저들의 야만이 두렵다.
저들의 거짓말에 속고 있는 우리들의 무지가 더욱 두렵다.
밥상의 재설계
예쁜 딸 아이의 아토피는 지금 거의 나았다. 그러나 방심할 수 없는 일이다. 언제든 다시 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딸의 아토피는 우리의 식생활을 근본부터 뜯어 놓았다. 병은 늘 그렇지만 일상생활을 반성하게 하는 교사다.
가공식품과 GMO, 사육동물의 조작된 고기, 식용유로 가득 찬 우리의 밥상을 바꾸어야 한다. 가능한 한 제철에 난 음식으로 밥상을 다시 차려야 한다.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그 계절에 자라는 작물의 변화와 음식의 구성을 알아야 한다. 동해산 명태가 지금 있는가? 갑오징어가 서해바다에서 잡힌다? 왜 이런 일이 벌
어지는지 알아야 한다. 기후변화로 생태계와 우리 몸의 싸이클도 바뀌고 있다. 우리 땅에서 난 계절음식이 정말 중요하다. 제철음식은 온 우주의 협동으로 만들어 낸 기운이며, 생명력의 원천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밥상은 야만의 얼굴을 가진 다국적 기업의 컨테이너에 실려 온 방부제와 각종 첨가제로 무장한 식품들로 가득하다. 온갖 화학조미료와 첨가제, 방부제로 무장된 식품과 광우병 소고기가 웅변하듯 폭력과 질병과 소외가 뒤섞인 밥상에서 어떻게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이런 밥상에서 건강과 평화를 찾는 것은 기만이다.
현대의 식생활이 정신분열증 환자를 양산하고 있다는 보고가 쏟아지고 있다. 무섭고 매서운 보고서들은 모두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다시 밥이다. 밥상을 다시 차려야 한다. 제대로 차려야 한다. 솔직하게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라. 두 달 전에 사 놓은 식품들로 가득하지 않은가? 흰쌀밥과 고깃국에 맛있는 음식들을 차려야 한다는 관념을 버리고, 자연 상태의 제철식품들로 단순하게 차리기 위해 냉장고를 비워야 한다. 곡물 값도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먹다 남은 음식은 또 어떤가? 식단을 다시 꾸며야 한다.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구매하지 않으면 음식물쓰레기로 세상이 가득 찰 것이다. 다시 강조한다. 밥상을 창조적으로 재설계하자. 모두 생식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적당하게 삶거나 데치고 샐러드 소스도 다양하게 개발해서 내 가족의 입에 맞게 간단하게 요리하자. 그대가 부족한 2%를 채우는 가정의 행복CEO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 햇빛과 바람, 물과 흙, 정직한 땀으로 만들어진 경이로운 밥상의 설계자가 되자.
그리고 하루 세 번 꼬박꼬박 공손하게 밥상을 모시자.
혁명 - 일상의 깨달음
매일 아침 시원한 물 한잔으로 깨어난다. 그리고 저녁에 잠들기 전 까지 몇 잔의 물을 마시는 걸까? 하여튼 많이 마신다. 그러나 물 마시는 순간을 무의미하게 지나쳤다. 이 절대적 지존을 잊고 있었던 것이 다. 나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감히 단언한다. 하루를 다시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을 마시는 매 순간마다, 물에게 감사하고, 물을 함께 공유하는 만물들을 사랑하겠노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은 감사 둘과 사랑 하나의 결합으로 되어 있다는 설명은 의미심장하다. 사랑 때문에 저질러진 아픔의 역사를 돌아보고, 매 순간 경이로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야 말로 새로운 사랑의 원천이라는 말일게다. ‘단 하나의 마법, 단 하나의 권능, 단 하나의 구원, 단 하나의 행복이 존재하니, 그것은 사랑이라 불리는 것이다’라고 헤르만 헤세는 말하지 않았는가. 일상 속의 무한한 감사와 한없는 사랑이 혁명의 시작이다. 또 물이다. 모든 만물은 물로 구성되어 있다. 물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형제자매이다. 물을 대하는 것은 이 땅의 모든 생명을 대하는 것이다.
물이 모든 생명을 살린다.
물에게 감사하라.
모든 생명을 사랑하라.
혁명은 일상 속에서 자신의 삶을 생태적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다.
모든 생명이 물을 매개로 연기적 관계에 놓여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생태적 전환의 출발이다.
그래서 시인은 혁명을‘보듬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보듬는 것’ 이게 보살행 아닌가?

/ 이 글은 불교환경연대 소식지 2008. 7~8월 호에 실린 글입니다.
정호 광주불교환경연대 감사
생명에 대한 전일적 각성
광주불교환경연대의 감사를 맡은 후, 첫 기고를 준비하면서 내 서재의 여러 책 가운데, ‘물은 답을 알고 있다’를 다시 손에 든 것은 행운이다. 이 책에 실린 물의 결정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맑아지는 것을 느낀다. 마치 지리산 세석산장의 음양수를 한잔 들이킨 것 같다. 세석산장의 음양수는 이 책에 소개 된 야마나시현 용천수의 결정과 흡사할 것이다.
요즘 마음에 여유가 없다. 고도로 긴장되어 있는 나를 보고 놀란다.
짐짓 태연한 듯 보이는 겉과 달리 광우병쇠고기 파동으로 몰아닥친 온 국민의 생명안전문제와 공장식 축산의 야만적 폭압에 시달리는 소의 운명 그리고 세 살 된 딸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혼돈 즉 카오스다. 공명이론에 따르면 모든 국민의 마음도 혼돈일터, 일상이 무겁다. 그러나 90%의 물로 구성된 천진난만한 딸아이를 보면서 이내 마음을 다시 고쳐먹는다. 분위기를 바꾸려 애쓰고, 즐겁고 행복한 아이의 미래를 위해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어린 딸을 통해 평상심을 회복하고 무한한 감사와 용기를 갖는다. 조화 즉 코스모스다. 헉슬리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애처럼 사실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선입견을 버릴 준비를 하라. 자연이 이끌어 가는 혼돈이 어떤 것이든 겸손하게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혼돈과 질서는 사실은 혼돈이면서 동시에 질서다. 카오스모스다. 혼돈 속에서도 조화로움을 잃지 않으려면 늘 감사하고 사랑에 충만한 의식이 일상을 지배해야 한다. 그러나 근대산업자본의 욕망에 길들여진 노예화 된 의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의 권력에 용감히 맞서다 다우치수용소에 감금된 에드가 쿠퍼의‘서로 사랑하라는 신의 계율이 통치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양심과‘내가 동물의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다른 생명의 고통과 죽음에 힘입어 나를 살찌울 수는 없다’는 생명에 대한 전일적 각성이 수반된 의식이어야 한다.
이럴 때 광우병쇠고기 사태의 본질이 제대로 보인다.
하루에 세 번 대하는 밥상
눈 덮인 오후 식당에서 때 늦은 점심식사를 하던 중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먹는 우리의 일상을 새삼 돌아보았다. 부대찌개를 시키고 나서 무심코 소시지와 라면사리에 우리의 미각이 점령당해 있음을 발견했다. 계란말이는 또 얼마나 맛있는가? 식사하는 내내 우리의 식습관이 누군가에 의해 길들여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고픈 시절 구황작물로 끼니를 때운 민족적 기억을 가지고 있는 동안, 집단적으로 철저히 길들여진 것이다. 쌀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소시지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닭은 어떻게 사육되는지, 베이컨 창고라 불리는 양돈장에서 돼지는 어떻게 취급되는지, 기업형 축산도축장에서 소와 송아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런 것은 질문사항이 아니었다. 궁금해지기도 전에 우리는 밥상의 날조된 진실앞에 무력한 존재로 전락했다.
닭, 돼지, 소, 그들이 당하고 있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아토피, 비만, 당뇨병, 골다공증 등 수많은 병이 우리가 의식하기 전에 하루 세끼 이어지는 밥상을 통해 생성되고 진화해 간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가 지적한 대로‘습관은 사람들을 어떤 잔혹행위에도 타협시킨다’더니 우리는 이미 공범이 되어 버렸다. 하루 세 번 대하는 밥상,
이 자리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다. ‘인간은 자신의 이로 자기 무덤을 파고 있다. 이 치명적인 무기는 지금까지의 어떤 무기보다도 더 많은 살인을 불러왔다.’는 토마스 모페트의 지적대로 계속 욕망의 범죄를 저지를 것인지, 온 우주의 협동으로 살아가는 뭇생명과 공생할 것인지, 하루에 세 번 밥상 앞에서 성찰하며‘깊이 뉘우친
다’고 단언해야 한다.
생명죽임의 논리 - 동물성단백질 제국의 허구
지금 나의 몸무게는 67kg이나, 대학졸업 무렵까지 58kg 전후의 마른 체구였다. 신장이 173cm이니까 일반적인 신체건강의 기준에 따르면 불균형이었다.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가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당시 육류섭취는 건강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선이었다.
풀만 먹어서 무슨 힘을 쓰겠느냐? 우리는 이렇게 교육받아 왔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미국 어린이들을 겨냥한 전국방송의 테마 광고송“오, 내가 오스카 메이어 사의 비엔나 소시지라면! 난 정말 그것이 되고 싶어. 내가 만일 오스카 메이어 사의 비엔나 소시지라면, 모두가 날 사랑하게 될거야”와 같은 광고를 틀림없이 우리나라에서도 들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하루 단백질 양은 낮게 잡으면 하루 총열량의 2.5%, 높게 잡아도 8%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단백질 자본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30%의 단백질이 필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단백질은 그날 필요한 양을 뺀 나머지는 오줌을 통해 배설되는데, 평균 미국의 가정이 이 불필요한 단백질에 쓰는 돈이 매 달 40달러로, 이것은 단백질 생산자들에게 연간 360억 달러의 수입을 보장해주는 반면, 기아에 시달리는 제3세계 어린이들의 생명을 구할 단백질을 빼앗는 것이 된다.‘ 한 작은 행성을 위한 식생활’의 저자 라페는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지 않고, 완전 채식만으로도 충분한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다고 한다.
국립과학아카데미의 식품영양위원회도‘전세계 인구 중에서 완전 채식가들은 뛰어난 건강을 유지해 왔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한 여러 기관의 다양한 연구를 통해 채식이 육식에 비해 지구력을 증강하고, 골다공증 신장결석 신장병을 예방하며, 장수하게 하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물성단백질기업은‘하루에
우유 3잔 이상을 마셔라’‘계란은 완전식품이다’‘햄버거는 햄버거 밭에서 자란다’고 사기치고 있다. 닭, 돼지, 소가
겪고 있는 가공할 고통과 무자비한 살육을 ‘우리 닭은 천국에서 살고 있어요’‘넓고 푸른 목장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젖소’라며 방긋 웃는 사진까지 덧붙여 돈을 긁어모으는 저들의 야만이 두렵다.
저들의 거짓말에 속고 있는 우리들의 무지가 더욱 두렵다.
밥상의 재설계
예쁜 딸 아이의 아토피는 지금 거의 나았다. 그러나 방심할 수 없는 일이다. 언제든 다시 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딸의 아토피는 우리의 식생활을 근본부터 뜯어 놓았다. 병은 늘 그렇지만 일상생활을 반성하게 하는 교사다.
가공식품과 GMO, 사육동물의 조작된 고기, 식용유로 가득 찬 우리의 밥상을 바꾸어야 한다. 가능한 한 제철에 난 음식으로 밥상을 다시 차려야 한다.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그 계절에 자라는 작물의 변화와 음식의 구성을 알아야 한다. 동해산 명태가 지금 있는가? 갑오징어가 서해바다에서 잡힌다? 왜 이런 일이 벌
어지는지 알아야 한다. 기후변화로 생태계와 우리 몸의 싸이클도 바뀌고 있다. 우리 땅에서 난 계절음식이 정말 중요하다. 제철음식은 온 우주의 협동으로 만들어 낸 기운이며, 생명력의 원천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밥상은 야만의 얼굴을 가진 다국적 기업의 컨테이너에 실려 온 방부제와 각종 첨가제로 무장한 식품들로 가득하다. 온갖 화학조미료와 첨가제, 방부제로 무장된 식품과 광우병 소고기가 웅변하듯 폭력과 질병과 소외가 뒤섞인 밥상에서 어떻게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이런 밥상에서 건강과 평화를 찾는 것은 기만이다.
현대의 식생활이 정신분열증 환자를 양산하고 있다는 보고가 쏟아지고 있다. 무섭고 매서운 보고서들은 모두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다시 밥이다. 밥상을 다시 차려야 한다. 제대로 차려야 한다. 솔직하게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라. 두 달 전에 사 놓은 식품들로 가득하지 않은가? 흰쌀밥과 고깃국에 맛있는 음식들을 차려야 한다는 관념을 버리고, 자연 상태의 제철식품들로 단순하게 차리기 위해 냉장고를 비워야 한다. 곡물 값도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먹다 남은 음식은 또 어떤가? 식단을 다시 꾸며야 한다.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구매하지 않으면 음식물쓰레기로 세상이 가득 찰 것이다. 다시 강조한다. 밥상을 창조적으로 재설계하자. 모두 생식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적당하게 삶거나 데치고 샐러드 소스도 다양하게 개발해서 내 가족의 입에 맞게 간단하게 요리하자. 그대가 부족한 2%를 채우는 가정의 행복CEO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 햇빛과 바람, 물과 흙, 정직한 땀으로 만들어진 경이로운 밥상의 설계자가 되자.
그리고 하루 세 번 꼬박꼬박 공손하게 밥상을 모시자.
혁명 - 일상의 깨달음
매일 아침 시원한 물 한잔으로 깨어난다. 그리고 저녁에 잠들기 전 까지 몇 잔의 물을 마시는 걸까? 하여튼 많이 마신다. 그러나 물 마시는 순간을 무의미하게 지나쳤다. 이 절대적 지존을 잊고 있었던 것이 다. 나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감히 단언한다. 하루를 다시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을 마시는 매 순간마다, 물에게 감사하고, 물을 함께 공유하는 만물들을 사랑하겠노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은 감사 둘과 사랑 하나의 결합으로 되어 있다는 설명은 의미심장하다. 사랑 때문에 저질러진 아픔의 역사를 돌아보고, 매 순간 경이로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야 말로 새로운 사랑의 원천이라는 말일게다. ‘단 하나의 마법, 단 하나의 권능, 단 하나의 구원, 단 하나의 행복이 존재하니, 그것은 사랑이라 불리는 것이다’라고 헤르만 헤세는 말하지 않았는가. 일상 속의 무한한 감사와 한없는 사랑이 혁명의 시작이다. 또 물이다. 모든 만물은 물로 구성되어 있다. 물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형제자매이다. 물을 대하는 것은 이 땅의 모든 생명을 대하는 것이다.
물이 모든 생명을 살린다.
물에게 감사하라.
모든 생명을 사랑하라.
혁명은 일상 속에서 자신의 삶을 생태적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다.
모든 생명이 물을 매개로 연기적 관계에 놓여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생태적 전환의 출발이다.
그래서 시인은 혁명을‘보듬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보듬는 것’ 이게 보살행 아닌가?
/ 이 글은 불교환경연대 소식지 2008. 7~8월 호에 실린 글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