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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세품 덕에 도라꾸로 돈 싣고 간다 했어”
담양 월평리 왕산마을

▲ 담양 월평리 왕산마을의 한 집. 어느 집이랄 것 없이 대나무를 두르고 있기 십상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밭을 ‘황금밭’이라 한다. 그 대나무로 온 식구 목숨 부지하며 살았으니 그런 애정어
린 이름이 붙을 수밖에.
ⓒ 심홍섭

담양이라, 참으로 오랜만의 담양길이다.
그런데 속이 팍 상한다. 담양에서 장성으로 넘어가 바심재로 이어지는 15번 국도가 변해 있다. 그 아름답던 도로가 달리고 싶지 않은 도로가 돼 버렸다. 도로공사를 하면서 그 많던 가로수들은 다 어디로 가고 넓은 도로에 가려 마을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속이 상한 채로 왕산마을이라는 작은 표지판을 따라간다.

“대나무로 지금까지 묵고 자석들 키우고 돈도 벌고”
담양군 월평(月坪)리 왕산(旺山)마을. 구불구불 작은 길을 따라 가니 넓은 벌판이 나타나고 뙤약볕 아래 농부들 손길이 분주하다.

마을 뒷산을 도마산, 남쪽에 있는 산을 치기봉이라 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도마산을 ‘옥녀봉’, 치기산을 ‘서방산’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벌판을 신랑 신부가 예를 갖추는 곳이라 하여 ‘제례청’  ‘제례들’이라고 한다. 남녀가 화합하는 곳이고 자식이 생산되는 곳인지라 항상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황금들판이 아니겠는가.

원래는 모두가 대밭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담양의 죽세품 산업이 사양화되면서 대들은 모두 파헤쳐지고 논으로 변했다. 마침 담양댐이 만들어지면서 마을 뒤로 해서 장성으로 가는 물길이 생겨 그 물길 덕에 풍년가가 끊이지 않았을 터이다. 

▲ 자식들 학교 보내고 시집장가 보낼 밑천이 돼주었던 대바구니.
ⓒ 심홍섭

현재도 마을 주변에 대나무가 많다. 대밭 속에 마을이 있어 바깥에선 마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왕산마을은 조선 성종 때인 1480년 형성되었다. 그때는 ‘王山’이라 했는데 조선 중엽에 ‘旺山’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무슨 연유로 한자가 바뀌었는지는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다. 처음에 이 마을에 들어온 경주이씨가 마을 뒤편으로 국사봉과 도마산이 우뚝하고 마을 앞으로 넓은 들이 있어 살기 좋은 곳이라 여겨 옥천조씨 딸을 맞아들이고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이후 경주이씨 집안에서는 진사가 났으며 1900년 말에 흥성장씨 가문에서 장군이 났고 창녕조씨 가문에서 검사가 났으니 마을 터가 좋긴 좋은 모양이다. 그렇게 좋으니 지나던 사람들이 눌러앉게 되어 현재 여러 성받이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는 산막골면에 속했고 인근 고래 마을에는 면역소를 두었다고 한다.

마을 가운데 있는 정자에 가봤더니 텅 비어 있다. 가을로 치닫는 요즘 한줌의 햇살이 아까울 때인데 마을 사람들 정자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을 터이다. 마을회관 앞으로 가니 오래된 손수레를 수리하고 있는 분이 있다. 몇 마디 여쭈니 어김없이 대나무 얘기가 나온다.
“우리 동네는 대나무 동네여. 나도 대나무로 지금까지 묵고 자석들 키우고 돈도 벌고 했제.”
장천수(70) 영감님은 대나무 얘기를 술술 풀어놓는다.

“중국 제품이 들어옴서부터 없어졌지만 담양하면 죽세품 아니여? 담양 죽세품이 아니여도 담양장으로 와야 전국으로 팔려 나갔응께. 장날이믄 대단했제. 그런 구경은 다시는 못헐 것이여.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온께, 전국 소식은 다 듣제. 그렁께 하루종일 있어도 재미져. 아홉시 뉴스가 따로 없어.”

오토바이 타고 지나던 영감님이 뭔 일인고 길을 멈추고 기웃거린다.
“나는 열다섯 살 때부터 동네 선배들한테 대바구니 맹그는 걸 배웠어. 뭐 배우고 말고 헐 것도 없어. 맨날 보는 것이 대나무고 대바구니 맹그는 거 보고 자랐는디 그거 안허고 뭘 허고 살겄소. 그래서 지금도 고맙게 생각허요. 대나무가 없었으믄 살도 못했을 것이요. 죽세품 맹글어 갖고 돈도 많이 벌었소. 그때는 좋은 시절이었제. 동네 사람들이 모다 죽세품 맹글어서 돈을 벌었는디, 딴 마을 사람들이 왕산마을은 도라꾸로 돈을 싣고 간다고 헐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제. 근디 요즘은 옛날 같지가 않어. 대나무를 너무 무시허는 경향이 있단 말이요. 그래서 나(내)가 전에 있던 군수한테 가서 그랬어. 당신 말이여, 뭐 묵고 컸소. 그랬더니 당신 부모님도 죽세품 맹글었다고 글드만. 그걸로 컸다고. 근디도 군에서는 대나무를 소중히 허지를 않는 것 같어.”

▲ “우리 동네는 대나무 동네여. 나도 대나무로 지금까지 묵고 자석들 키우고 돈도 벌고 했제”
라고 말하는 장천수 할아버지.
ⓒ 심홍섭

▲ 장천수 할아버지의 손. 평생 대와 함께 해왔다. 대나무 쪼개는 칼을 든 손이 그 오랜 세월을
말해 준다.
ⓒ 심홍섭

장날이면 대바구니 이고지고 비포장길 걸어 장에 가고

당시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대밭을 ‘황금밭’이라 한다. 그 대나무로 온 식구 목숨 부지하며 살았으니 오죽 했겠는가.

그래서 초등학교만 다니기 시작해도 죽세품 만드는 일에 매달렸다. 집집마다 골목마다 긴 대나무 쩍쩍 쪼개가면서 대바구니를 만들었다. 장날이면 마을 사람들은 자기 몸뚱아리의 몇 배나 되게 바구니를 묶어서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자전거에 싣고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 십리 길을 걸어갔다. 1973년에 정부에서 마을 공동작업장을 지어주어 그곳에 모여 작업을 했다.

“저 건물이 정부에서 지어 준 공동작업장이어.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그때 풍경 중에 바뀌지 않은 것은 저 건물뿐여. 요 앞에도 대나무밭이 있었는디 지금은 다 논으로 바뀌어 불었어.”
공동작업장 앞에서 사진을 찍는데 장천수 영감님의 구릿빛 얼굴이 환하다.

“지금은 대바구니 맹그는 사람이 없어. 누가 그거 맹글고 있겄어. 돈 몇 푼 주면 좋은 거 산디. 그래도 나는 심심풀이로 맹들어. 맹근 거 한번 볼랑가?”
장천수 영감님이 자전거를 끌고 앞장선다. 영감님은 이 길을 통해 자전거에 대바구니를 쌓아 싣고 담양장으로 갔다고 했다.

“요런 대바구니 제품은 전국에서도 우리 집에서 처음 맹근 거여. 원래 대바구니는 요렇게 야차운(얕은) 것이 아니고 지펐어(깊었어). 대바구니는 다 그랬어. 근디 우리 집에서 요런 대바구니를 맹글어서 돈 좀 벌었제. 지금 같으면 신상품이었제.”

장천수 영감님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두 병 꺼내 따라 주고 시원하게 한 컵 들이킨다.
“그 제품이 나온 배경이 재밌어. 대바구니 장사를 헐라믄 바구니를 만들 줄 아는 여자한테 장개를 가야 해. 남자가 대나무를 쪼개 주면 여자는 바구니를 맹글거든. 그래야 손발이 맞고 빨리 일을 헐 수가 있어. 근디 우리 안사람은 바구니를 안 맹글어 본 사람이여. 넘들 허는 것을 보고 맹근 거라 넘들처럼 조리있게 지프게 맹글 수가 없었제. 어쩔 것이여. 그거라도 갖고 나가 폴아야제. 근디 장에 간께 나가 맹근 것보다 우리 집사람이 만든 바구리를 더 사 가더란 말여. 그것이 보기도 좋고 쓸 디가 더 많다는 거여. 그래서 나도 한번 맹글어 봤는디 요것이 지프게 맹그는 것보다 훨썩 빨리 맹글어. 대나무도 적게 들고. 그래서 넘들이 열 개 맹글 때 우리는 열 다섯 개 맹글고 대나무도 적게 들고. 그런께 돈을 벌제. 근디 사람들이 이것이 잘 폴린께 자기들이 한나썩 사갖고 가서는 연구해서 똑같이 맹글어 와 갖고 폴아부네.”

그렇게 해서 4남1녀를 모두 학교 보내고 출가시키고 집도 동네에서 가장 넓은 평수로 뽑아 집을 짓고 해서 잘 산다고 한다.

▲ 왕산마을 뒷산을 도마산, 남쪽에 있는 산을 치기봉이라 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도마산을 ‘옥
녀봉’, 치기산을 ‘서방산’이라고도 부른다. 그 가운데에 있는 벌판은 신랑 신부가 예를 갖추는
곳이라 하여 ‘제례청’ ‘제례들’이라고 한다.
ⓒ 심홍섭

▲ 왕산마을 뒤에 있는 오제정(梧霽亭). 마을과 제례들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벽오동
오(梧)’자 쓰는 정자는 봉황을 보자는 뜻이었을 터.
ⓒ 심홍섭

“대바구니를 플라스틱 바구니에 비허겄소”

“요즘은 사람들이 죽부인을 찾는갑서. 그거 맹그는 거라도 배와 놨드라면 써 묵을 것인디. 지금은 바구니나 소일거리로 몇 개씩 맹글어. 며느리들 오면 주는디 몇 개씩 더 달라고 해. 사람들이 좋다고 가져가 분다고. 플라스틱 바구니에 비허겄소. 긍께 좋아헌 사람들은 지금도 좋아합디다만.”

장천수 영감님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선물이라며 직접 만든 바구니 두 개를 묶는다.
장가가고 한 달 만인 23살 때에 군에 가고 제대하고 나서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것이 평생을 까칠한 대나무 만지며 열심히 살았다 한다. 대나무 쪼개는 칼을 든 손이 그 오랜 세월을 말해 준다.
“인생이란 것이 좋은 일만 있으란 법도 없어. 나도 13년을 보증 때문에 죽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았어. 그래서 요렇게 잘 살고 있제.”

영감님이 준 대바구니를 들고 마을 뒤에 있는 오제정(梧霽亭)에 오른다. 왕산마을과 제례들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경주이씨 이봉우가 1931년 건립하였다.

‘벽오동 오(梧)’자 쓰는 정자는 봉황을 보자는 뜻이었을 터. 왕산마을을 감싸는 대나무밭 위로 대의 열매만 먹고산다는 봉황이 이곳에 깃들었구나 싶다. 그래서 인물도 많이 났나 보다. 세상과 더불어 열심히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큰 인물도 많이 났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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