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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코리아 닷컴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늘 묻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세상은 무엇인가. 더러 곰곰 생각하기도 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일상으로 쫓겨나옵니다. 그런데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그 답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른바 세계화가 바로 그“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저것 눈에 보이는 현상들만 나열하는 사람들은 기껏 미국중심의 세계경제통합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러 근대국가, 그리고 그 세계체제가 와해되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조차 세계화가 지난 300백년 근대합리주의가 만든 개인과 사회의 정체성, 가치관에서부터 제도 관행, 먹고 사는 방법 모두를 바꾸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은 모릅니다. 더구나 예의 세계화가 지금 바로 여기서 우리부터 휩쓸기 시작한 것은 더 더욱 모릅니다.
“근대합리주의가 만든 세상과 나”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혼돈이 아니면 새로운 질서를 잉태할 수 없어서 대 혼돈이 빗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우주의 運行”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단지 순응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세계화를 바르게 대처하면 거기 우리 살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변해서 세계의 변화를 이끌게 되는 숙명이 있습니다.
한국의 세계화! 세계화를 제대로 알아 “네트워크 코리아”를 만들어야 합니다. 세계의 한민족 공동체를 모두 묶어 강대국에 볼모로 잡혀 있는 통일을 훌쩍 뛰어 넘을 수 있습니다.
“경제를 하나 더” 만들어 양극화와 청년 실업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생태주의 國土改造로 합리주의를 대신하는 새로운 녹색 세상을 먼저 펼쳐 갈수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은 상상력입니다. 탁월한 정치적 상상력들이 모이면 답답한 세상을 확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이미 IT 직접민주주의 시대여서 나라의 운명이 낡은 정치에서 네티즌에게로 넘어 왔습니다. 직접민주주의 공동체, 사이버 코리아 닷컴을 당장 만들어야합니다.
1. 정체성
언제부턴가 맹목적인 군중심리와는 좀 다른 “사회심성” 같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이 만든 영화 속의 괴물이 아니라, 인터넷 네트워킹이 만들어 낸, 살아 움직이는 괴물입니다. 뭔가 희망을 내놓으라면서 엄청난 기세로 뭉쳐가고 있습니다. 이 사회심성과 제대로 맞아 떨어져서 먼저 “대박”을 터트린 것이 영화입니다. 영화를 백만 관객이 보았다면 영화가 잘 된 것이지만 천만 관중이 몰리는 것은 한번쯤 더 생각해 봐야합니다. 영화이전에 시쳇말로 신드롬입니다.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동막골, 모두 제 나름대로 국가를 문제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나라의 정체성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시청 앞 광장에서 “대~한민국”을 외치지만 그들은 현실의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근사한 나라, 대~한민국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나 축구만이 아닙니다. 굳이 정치권 변두리에서 대통령 감이나 시장 감을 찾는다던지, 종합 일간지나 공중파 같은 제도권 언론을 외면하고 인터넷 포탈로 몰리고 있는 것에서도 뭔가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사회심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회적 영향력이나 신뢰도를 묻는 여론조사를 보면 정치권력 기관들은 대기업이나 시민단체들 밑에 가련할 정도로 깔려 있습니다. 사회심성이 저들에게서 떠났습니다. 왕의 남자와 괴물은 한 걸음 더 나간 것입니다. 성의 정체성이 문제가 되는가하면 사회의 정체성 위기가 다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시대를 읽는 감각은 이론을 앞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감독들의 번뜩이는 감각은 영화에서 일 뿐입니다. 몇몇 학자들도 우리 사회의 정체성 위기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사회심성이 요구하는 “대~한민국”을 내놔야 “나라를 살리는 대박”을 터트릴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만들 수 있습니다. 세계는 앞으로 우리가 이끌어 가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토고보다도 못한 반쪽짜리 나라면서 경제나 의식구조는 아무튼 일류인 나라, 지난 100년 세계사가 연출한 이 모순. 그 역동성이 앞으로 세상을 바꿀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길입니다. 우리가 먼저 변해서 세계의 변화를 이끄는 가시밭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프로그래밍을 제대로 읽어내고 거기 맞춰 나가야 고통을 줄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프로그래밍을 제대로 알려면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으며 거기서 “우리는 누구인가”를 철저히 알아야합니다. 예의 사회심성이 정체성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도 그 프로그래밍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새로운 정체성부터 찾아내야합니다. 이거다! 하고 내걸고, 영화처럼 사회심성을 울리면 그 이상 무슨 다른 컨셉이나 컨텐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회심성이라는 것이 있는가? 그것이 새로운 정체성을 요구하면서 “만들어져가고” 있는가? 어떻게 거기 일치할 수 있는가? 왜 사이버 코리아 닷컴이 그 답인가?
작년 봄(2005)의 일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만사가 여의치 못해서 주역에서 괘를 뽑아 보았습니다. “북쪽 오랑캐(狄)가 쳐들어 와서 같이 살자고 해서 편안치가 못하다”라는 괘가 나왔습니다. 평소 마음을 모아서 점을 치면 더러 맞기는 하지만, 이 괘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한달쯤 뒤 이 오랑캐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몸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서 병원에 갔더니 간암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간암이 “같이 살자”고 온 것입니다. 입원 일자를 잡아놓고, 비는 마음으로 다시 괘를 뽑았더니 이번에는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마차를 몰고 가다가 길이 막혔으나 바위덩이를 치우고 간다는 괘가 나왔습니다. 20여 일 동안 절망을 확인하는 절차와 같은 정밀검진이 끝났습니다. 전문의는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담도암, 암이 담도를 막고 있어서 3개월 남았다고 했습니다. 길이 막혔다는 괘도 또 맞은 것입니다. “어디서 자로가 나타나나” 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암 환자는 암에게 압도당합니다. 自我가 참혹할 정도로 무너져 갑니다. 생사여탈권을 쥔 염라대왕인양,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의사 앞에서 비굴하기만 한 자신의 언행이 절망을 더합니다. 암을 예견하고, 또 다시 만 오천 여 괘중의 하나가 담도가 열릴 것이라고 했지만 큰 위안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려서 무슨 정신력으로 암을 이겨낸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처방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비우자”는 처방이었습니다. 평소에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오래 생각해 왔고 또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7월 한 달 갖가지 병원 검사에 시달리면서, “마음을 비우자”를 주문처럼 되풀이, 죽음을 달랬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치료를 받지 않았는데도 황달 수치와 암 수치가 정상으로 반전되었습니다. 의사도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自我에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치매에 걸리면 다른 병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 후 대체의학이 만든 약으로 암 덩어리도 사라졌지만 병은 의사나 약이 고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고치는 것입니다. 근대합리주의에 찌든 저들 서양의학은 생명의 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절대자에게 귀의하거나 무슨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근대합리주의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 사실은 “자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전통이나 근대합리주의, 그리고 종교가 “만들어 낸 나”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여기서 벗어나서 생명을 만나는 것, 그것이 자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 초입에서 병을 고쳤습니다. 생명이 “체제”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평생을 거기서 헤매다가 죽는 것이 인간입니다. 생명, 그 지고한 의미를 바로 알면 삶이 스스로 기쁨과 사랑으로 채워집니다. 방사선 치료를 받기위해 순번을 기다리는 환우들에게 한없는 연민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미 암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가페든 에로스든 대자대비든, 사랑이야말로 실재하는 에너지가 아닐까? 세상이 강요하는 답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광막한 우주는 인간의 지혜로는 가늠할 길이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 지구 만해도 음속의 5배 가까운 속도로 자전하면서 다시 태양의 주위를 음속의 85배로 돌고 있습니다. 블랙홀은 빛을 끌어당기고 별조차 흔적 없이 삼켜 버립니다. 우주는 광속보다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신비로 가득한 우주지만 우주가 빚는 현상 가운데 가장 신비한 것은 그런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생명, 생명보다 더 신비한 것은 없습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두고 새삼 논쟁이 불붙고 있다고 합니다. 하버드대학이 발 벗고 나섰다는 대목도, 지금 세상을 덮고 있는 대 혼돈을 감지한다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들의 결론을 기다릴 것 없이 우주가 빚는 현상(現象) 가운데 가장 신비한 “현상”은 생명입니다. 인간을 빅뱅이라는 “핵폭발의 낙진(落塵)”이라고 간단히 규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꼭 태양의 크기와 에너지를 가진 항성을, 꼭 그만큼 떨어진 괘도로, 꼭 달만한 크기의 위성을 동반해서 도는 행성이 아니면 생명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은 이제는 상식입니다. 또 달의 인력(引力)으로 지구가 23.5도 기울어서 돌기 때문에 생명이 존속할 수 있는 기후가 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거기서 조금만 기울기가 달라져도 생명이 절멸한다고 합니다.
우주에서 가장 신비한 현상이 생명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우주가 생명을 빚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주 스스로의 자기조직화, “생명은 우주가 생명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대 합리주의 논리로도 그것을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떼야리즘은 벌써 50여 년 전에 생명이 우주의 자기조직화라는 것을 사실상 밝혀냈습니다. 떼야르 드 샤르댕 신부는 이 우주에는 무한대(無限大)와 무한소(無限小) 이외에 제3의 무한(無限)이 있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무기물, 유기물, 생명의 순으로, 내면에서 무한히 의식의 증대, 집중하고 외면에서 무한히 복잡화하는 진화(進化)가 제3의 무한이라는 것입니다. 헬륨 하나에서 시작한 물질에서부터, 흩어진 여럿이 어떤 힘에 의해서 하나가 되기를 되풀이, 유기물, 단세포 생물에서 은하계의 별 만큼이나 많은 3천억 개의 신경세포로 이뤄진 인간의 뇌에 이르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살아 있는 무한(無限)입니다. 이 제3의 무한, 생명화, 의식화가 바로 우주의 자기조직화, 우주가 생명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떼야르 신부는 그러나 물질에서 시작해서 인간의 뇌에 이르는 이 제3의 무한(無限)이 곧 바로 “우주의 자기조직화”라고는 말하지 못했습니다. 창조의 신을 섬기는 사제였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증거주의를 금과옥조로 하는 근대합리주의 인류학자로서의 한계이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떼야르 신부는 그가 말하는 '물질의 의식화'가 종내는 인간의 성화(聖化)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서 끝내 파문(破門)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입론(立論)에 한 발 더 나가 “생명이란 우주의 자기조직화이며 따라서 나는 내가 아니라 우주의 발현”이라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동양철학의 바탕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동학에서는 人乃天,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인식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러브 록은 가이아, 지구가 그대로 하나의 생명이라는 가설을 내 놨습니다. 종래의 생명관으로는 증명해 낼 수 없어서 '가설'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명으로서의 지구, 가이아는 지난 20여년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우리 인간의 의식을 확장하는 데 말할 수 없이 큰 기여를 했습니다. 가이아는 증명할 수 없지만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내가 아니라 우주의 발현이라는 가설도 자신과 세상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거기서 “자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큰 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프리조프 카프라는 그의 <물리학의 도(道)>에서 파동이냐 입자냐를 관찰자가 “관여(關與)”할 수밖에 없는 양자물리학의 세계가 주관과 객관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사물의 궁극적 실체에 대해 동양철학이 찾는 도(道)와 궤(軌)를 같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렵지만, 애당초 우주와 내가 하나이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하면 누구나 이해하기 쉽습니다.
坐忘, 道家에서는 앉아서 모든 것을 잊으라고 합니다. 무슨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비우는 것입니다. 근대합리주의와 종교가 만든 내가 버티고 있지만 쾌도난마로 나는 내가 아니고 우주의 자기 조직화, 우주의 發顯이라고 규정하면 머리를 비울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몰아의 경지라든가 주관과 객관의 일치라는 것은 자아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아니고 우주라는 입장에 서면 별로 부대끼지 않고 깊은 명상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아로부터의 해방”에 이르면,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면 궁극의 진리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합니다.
은하계의 별만큼이나 많은, 3천억 개의 뇌 세포를 그대로 텅 빈 우주라고 상정하고 눈을 감으면 이윽고 우주 자체이기도 한 아트만, 眞我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서양 녹색운동의 원조인 루돌프 슈타이너는 이 아트만을 사람들은 영혼이라고 부르는 데, 영혼은 훈련을 통해 보고 듣는 인식작용을 하게 할 수 있으며 거기서 마침내 자아로부터의 해방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죽음은 깊은 잠, 꿈 없는 깊은 잠입니다. 누구나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면 이런저런 잡념이 서로 부대끼면서 꿈까지 쫒아 오지만 이내 꿈 없는 깊은 잠에 빠집니다. 죽는다는 것은 이와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탄생은 해가 뜨는 것이지만, 죽음은 해가 지는 것이 아니라 달이 뜨는 것입니다. 죽음은 꿈 없는 깊은 잠이어서 거기 가면 이미 “나”는 없지만 죽어도 결코 죽지 않고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眞如, 참나가 죽음을 넘어서면 보름달처럼 명백합니다. 진여, 그것은 수행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원래 거기 있는 것입니다. 깨우는 것이며, 누구나 자아를 버리면 살아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의식화를 향한 되풀이, 낮은 단계의 의식이 파도가 되풀이 모래를 쌓아 올리듯 보다 고도화해서 생명이라는 의식으로, 다시 사람들이 영혼이라고 부르는 아트만으로 가고 있는 것을 봐야합니다. 그리하여 아트만은 다시 브라만이지만, “元始反終” 처음과 끝이 맞물린 우주의식의 자기구현은 時空 저 너머의 일입니다.
아무튼 나는 내가 아니라 "우주의 精華"여서 지금부터라도 거기 맞게 삶을 재구성해야 합니다. 간단합니다. 근대합리주의만 버리면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주의 運行”이 그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근대합리주의가 무너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후술하지만 “사랑의 패러다임”이 대신 들어서고 있습니다.
떼야르 신부는 오메가 포인트라는 마지막 임계(臨界)점을 넘어 서면, 마치 물질에서 임계점을 넘어 생명이 나왔듯이 “분자로서의 인간”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떼야리즘은 그 하나 됨, 분자로서의 인간이 “사랑의 역학(力學)”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자를 분자로 결합하는 힘은 현대과학도 알지 못하지만 사랑이 아니면, 우리 같은 “원자형 인간을 “큰 사람”, “분자인간”으로 바꿔 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랑이란 “우주 밑바닥에서 나오는 울림이며 개체를 전체로 몰아가는 열정”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사랑은 생명처럼 인간의 언어로 잡을 수 없습니다. 아가페고 에로스고 대자대비이기도하고 또 에너지이기도해서 사랑이라는 意識은 그대로 우주의식, 사람들이 생각하는 神인지 모릅니다. 50 여 년 전의 떼야르 신부는 아무튼 인류가 어떻게 사랑을 안아낼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데 고심(苦心)하고 있었습니다. 후술하지만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 사회의 구성원리가 되는 “사랑의 패러다임” 세상, “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 가는 의지”가 스스로 열어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떼야르 신부는 “사람의 세계화, 지구 전체의 조직화”라는 명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세계화, 지구 전체의 조직화”가 끝내는 흩어진 여럿을 하나로 모아 “큰 하나, 한 생명”이라는 마지막 임계점, 오메가 포인트를 돌파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세상, 글자 그대로 “사람이 세계화 (많아져서 세계를 덮어서)”하고, 지구 전체가 강제로 유기적인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오늘의 세계를 본다면 그는 그의 확신을 더욱 굳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불과 50년 동안에 세상의 변화는 무서운 가속도가 붙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람의 세계화”야말로 요즘 말하는 세계화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지구 전체의 조직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2. 세계화
“세계화”를 바로 알면 세상이 보입니다. 세계화를 파고 들어가면 이 좁은 땅덩이, 반쪽 울안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세계화가 빗는 현상을 그대로 세계화라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것저것 현상만 나열하다보니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감추는 꼴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벌써 20여 년을 두고 세상이 근본에서부터 바뀌고 있지만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무엇이 왜 어떻게 “세계화”되고 있는 것일까요? 세계화를 바로 볼 수 있는 곳은 세상에서 여기뿐입니다. 세계화가 여기서 시작되고 다시 여기서 더 세계화, 지구 전체의 조직화가 진행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엘빈 토플러는 미래가 현재로 쳐들어 왔다고 합니다. 정보혁명이나 생명공학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어서 '농업혁명 이래 최대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농업혁명 이래 최대의 변화’는 분명하지만 그러나 또 무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 현상만 나열하는 서양식 접근방법으로는 대 변화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농업혁명은 3천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껏 인류사의 신기원(新紀元)이라고 합니다. 정착해서 문화를 갖게 되면서 아예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산업혁명이 아니라 ‘사람을 바꾸는’ 대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신기원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대변화, 세계화를 제대로 알려면 우선 농업혁명부터 올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쌀은 주(周)나라 때 남쪽의 제후가 처음 보는 곡식이라고 해서 왕에게 진상했다는 기록으로 나타납니다. 한 포기에 백 알이나 달리고 다른 곡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도 좋았습니다. 주공(周公)이 이를 하늘에 기리는 가화(嘉禾)라는 글을 썼습니다. 서경(書經)의 가화 편은 실전(失傳)되고 없습니다. 그러나 주공의 메시지는 서양 쪽 밀의 역사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3천여 년 전, 구약성서의 예리고(Jericho) 대평원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 따뜻한 햇살이 가득한 대지(大地)에 생명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에머 종이라는 야생 밀이 목초와 돌연변이를, 그것도 두 차례나 일으켜 오늘의 빵 밀(Wheat Bread)이 태어납니다. 초원을 갑자기 뒤덮은 밀이 사람을 떠돌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해서, 사람을 붙잡아 앉힌 것이 농업혁명입니다. 사람들이 돌아다니기에 지쳐서 농사를 짓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해서 정착하기로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농업혁명은 “자연이 관여한 인간혁명”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저들의 이성(理性)이나 의지(意志)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믿지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우리 논의의 출발점입니다. 아무튼 새로운 신기원, “자연이 관여하는” 대변화가 분명히 바로 지금, 더구나 여기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신기원은 농업혁명처럼 하늘의 축복은 아닙니다.
할리우드 영화는 늘 적(敵)이 있습니다. 인디언에서부터 나치, 소련을 거쳐 베트콩이 단골이었을 때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70년대 후반부터는 악역(惡役)을 구할 수가 없어서 아주 고민입니다. 그래도 70년대 석유파동 때나 일본이 세계의 돈을 마구잡이로 긁어 가던 80년대는 아랍이나 일본이 궁색한 대로 “국가의 적(Enemy of State)”이 돼줬습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는 그나마 시들해져서 외계인이나 테러집단을 되풀이 동원하고 있습니다. 미국 헌법은 적을 정의해서 ‘긴박하고 분명한 위협(Imminent and clear danger)’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그런 적이 없는 것이 지난 20여년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미국의 큰 고민입니다.
적이 없으면 평화로운 세상이 오는 것 아니냐,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이냐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인간사회입니다. ‘적대적인 것은 상보적(相補的)이다’라는 말은 노벨상을 수상한 유명한 물리학자인 닐스 보어가 찾아낸 자연의 역학입니다. 사회의 원형도 마찬가지입니다. 애초에 다른 종족이나 맹수에 대항하기 위해 무리를 지은 것이지만 다른 한편 ‘만인(萬人)은 만인에 대한 적’이어서 밖에서 위협이 없으면 안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인간 사회이기도 합니다. 정치적으로 통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전쟁이 없으면 경제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었습니다. 더 크게 보면 문명 그 자체가 전쟁을 통해 발전한 것이 오늘의 세계입니다. 전쟁이 문명을 가져온 것입니다. 제도로서의 전쟁이 대부분의 사회에서 사회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동기(動機)인 것입니다.
이런 사회 구성의 본질을 생각하면 적이 없어진다는 것은 체제(體制)를 흔드는 근본적이고도 심각한 위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미국과 같은 패권(覇權) 국가는 거기 아주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리우드가 적을 찾아서 머리를 쥐어짜도, 적이 없는데서 빚어지는 미국사회의 정체성 위기를 드러내 보여도, 현실에서 있지도 않은 적을 상대로 미사일방어망(MD)을 구축하겠다고 부시가 동분서주하고, 여기저기서 적을 만들려고 애써도 소용없습니다. 냉전시대 소련처럼 그럴듯한 적은 더 이상 구할 수가 없습니다. 테러가 무섭다, 새로운 형태의 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닙니다. 아랍문제를 정당하게 해결해 준다면 그대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아무래도 억지, 소련처럼 그럴듯한 적이 못되기 때문에 부시가 여러모로 애를 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비디오들 가운데는 공해나 환경파괴를 새로운 적으로 설정한 것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 이들의 상상력 그대로 앞으로 사회를 통합시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적은 공해나 환경재앙임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공해가 지구 규모에서 조직화되어, 살아 있는 것처럼 건곤일척,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매년 8천억 달러가 넘는 세계 전체의 군사비를 계속 쏟아 부어도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적이 증오의 대상이었던 데 반해 환경재앙은 우리가 자연을 사랑해야만 극복할 수 있는 전혀 성격이 다른 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무슨 교회에서가 아니라 생활에서 이 적을 사랑하다 보면 인류 자신도 변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 구성 원리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 그래서 마침내는 인류의 심성 자체를 변하게 만드는 사회는 인류사에 또 다른 신기원(Epoch Making)이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패러다임, 영화에서는 그런 사회를 손쉽게 그려내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사회 구성의 근본 원리가 달라진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생각조차하기 어렵습니다. 수천 년을 내리 형성된 개인과 사회의 정체성, 가치관에서부터 제도, 관행뿐만 아니라 먹고사는 방법까지 모조리 바꾸라고 들이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가 환경재앙이라는 “적과의 동침”에 이르기까지는 엄청난 정신적, 물질적 혼돈의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이미 이 터널 속으로 진입했습니다. 더구나 “세상을 다른 곳으로 옮길” 이 터널이 한반도 어딘가 아공간(亞空間)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세계에서 유독 우리가 세계화와 정면에서 맞부딪치면서 걸어가야 할 숙명을 안고 있으며 그것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리학의 도(道)]로 유명한 프리초프 카프라는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The turning point)]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우리 시대의 주요한 사회문제들은 근본적으로는 “인식(認識)의 위기라는 하나의 위기”라고 말합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세계관에 가치를 둔 낡은 패러다임”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뉴턴의 물리학과, 정신과 육체로 사람을 반으로 가르는 데카르트의 철학은 잘못된 것임이 여기저기서 밝혀져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기초해서 꾸민 틀, 근대 합리주의 패러다임이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잘못 이해하고 대응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동양철학이 제시하고 현대 물리학이 확인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패러다임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틀림없는 말이지만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달라져야 한다”가 아니라 달라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나 이성과는 관계없는 운동법칙이 있어서 달라지고 있는데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면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는 이 운동법칙, 만들어 가는 의지의 존재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근대합리주의가 없는 것으로 치부했던 이 의지가 지금 전면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혼돈이 아니면 새로운 질서를 잉태할 수가 없는 법이어서 지금 대 혼돈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조작해서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체제내의 위기가 아니라 宇宙의 運行입니다.
3. 대 혼돈
대변화, 언필칭 세계화를 읽는 키워드는 과잉과 적의 부재(不在)입니다. 이 둘이 이미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세계 규모에서 보면 농산품이든 공산품이든 뭐든 남아돕니다. 또 적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과잉과 적의 부재가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어제의 경험으로 내일을 재단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기껏 그로 해서 빚어지는 현상만을 나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과잉. 1970년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전체의 생산능력이 의식주 유틸리티 모든 부분에서 수요를 넘어서는 데 이르렀습니다(68년 뉴 레프트 운동가들의 분석). 그런데 <세계화의 덫>이라는 책에 따르면 90년대 후반에는 벌써 그 과잉이 다섯 배로 불어났습니다. 옛날부터 남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원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생산이 소비를 앞질러서 과잉이 주기적으로 나타나, 크고 작은 디플레를 일으켜 왔습니다. 그러나 기업이 쓰러지고 실업사태가 빚어지는 고통을 겪어내면 재고가 소진되면서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너무 많이 먹으면 설사하는 생리현상처럼 자본주의가 건강을 되찾는 방식이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의 이 “절대 과잉”은 다릅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자체의 근거를 무너뜨리고 있는 전혀 성격이 다른 과잉입니다. 모자라니까 더 생산해야 한다든가, 모자랄수록 나누는 것이 먼저라고 하던 이들 ‘주의’의 전제를 휩쓸어 버리고 있습니다. 패러다임, 전제가 무너진다는 것은 이를테면 땅이 꺼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지반이 꺼져서 빌딩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형국입니다. 보수 진보는 이제 노론 소론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거기 매달려 있습니다.
모자람이라는 전제 대신에 “생산과잉-유통과잉-소비과잉-환경파괴-자원고갈”이라는 악순환 고리가 이미 인간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기 전개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과소시대”의 심성, 이념, 체제를 무너뜨리면서, 다른 한편 환경재앙으로 나타나 종내는 인간과 그 삶 자체의 적합성을 묻고 있습니다. 묻고 있다기보다는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자기전개의 길을 내닫고 있습니다.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인간 사회를 결정해 가는 이 의지를 근대 합리주의는 보통 때는 무시하다가 정작 닥치면 신의 뜻으로 치부하고 말지만, 우리는 거기서 우리 사회와 개인의 실존을 천착해야 합니다. 거기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경제에서는 남아돌면 그냥 널려있지 않고 한 쪽으로 집중합니다. 자동차 생산 능력의 과잉이 세계의 자동차회사들을 너 댓개 정도만 살아남을 수밖에 없게 하는 것도 집중이지만 무엇보다 돈으로의 집중입니다. 이른 바 과잉유동성. 이 집중의 지금까지 가장 큰 흐름은 90년대 말 세계를 휩쓴 머니게임이었습니다. 70년대 오일 머니가 유럽 금융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유로 달러가 되고 이것이 다시 80년대 일본의 무역흑자, 이른바 재팬 머니와 합쳐지면서 ‘무국적 금융자본’이 탄생했습니다. 이 미국과 관계없는 달러는 벌써 80년대 중반부터 세계의 무역실물거래가 연간 5조 달러인 데 반해 하루 1조 달러의 국제증권, 환투기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규모에서의 부의 집중입니다. 이 ‘집중’은 97년 그 정점에서 우리에게 IMF를 남기고 헤지 펀드 소로스의 말처럼 썰물처럼 빠져나갔지만 썰물은 언제고 다시 밀물처럼 밀려올 수 있습니다.
원론적으로 한 나라에서 상위 소득 1%에 GNP의 30% 이상이 집중되면 디플레, 경제공황을 걱정하게 됩니다. 복잡한 논리지만, 노름판에서 한 사람이 판돈을 다 따면 판이 계속될 수 없는 것과 이치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60억 세계인구 중에서 겨우 230만이 세계 부의 6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극에 달한 부의 편재, 거기 둥지를 튼 머니게임은 언제고 세상을 공황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NASA에서 미사일의 탄도를 계산하는 수학자들을 모셔다가 이론으로 무장한, IMF가 ‘새로운 세계 자본시장’이라고 애매하게 명명한 이들 세력은 전 세계를 무대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하루 1조 달러를 맹렬히 허순환(虛循環)시키고 있습니다. 허순환이란 재화의 생산이나 무역 같은 실물경제와는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과잉이 집중을 부르고 다시 30년대 대공황처럼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다가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이른바 버블이 꺼지면서 촉발되는 공황은 30년대 대공황처럼 전통 자본주의가 여러 번 겪어냈습니다. 그러나 국가라는 단위경제의 틀 안에서 공급과잉으로 일어나는 종래의 공황과는 달리, 절대과잉이 경제에 국경이 없어진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마치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모여들고는 있지만 정작 비는 내리지 않는 것처럼, 국경이라는 틀이 없어져서 과잉이 세계를 덮는 공황으로 폭발할 집중력을 아직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지금 빚어지고 있는 “대 혼돈의 경제부분”이 그대로 변형된 형태의 공황인 것 같습니다. 국민소득론의 대가인 어빙 피셔가 1930년대 대공황이 시작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공황을 감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나중에 가서야 그 때부터 공황이 시작되었구나 하는 것이 공황입니다. 그만큼 공황은 그 자체가 경제학에서 수수께끼입니다. 아무튼 29년 뉴욕증시 대폭락에서 시작해서 2차대전으로 이어지는 30년대 대공황의 전개는 과거이기 때문에 과잉-집중-버블-공황,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그 정치적 결과까지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지금 전개되고 있는 “대 혼돈의 경제 부분”은 거기 단순 비교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본은 90년대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원래 남미에서 이른바 “남미화”의 80년대 10년을 지칭하던 말이었습니다만, 이를 변형된 형태의 공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잉이 집중하고, 머니게임, 투기 판이 벌어져 미국과 일본의 주식시장에서 GNP의 30~40%가 깨져나가도, 다시 집중하고 다시 머니게임이 벌어집니다. 경제대국 일본은 10여년을 두고 디플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는데 바로 옆 중국은 삼황 오제 이래의 호황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국경이라는 경제의 틀이 없어져서, 경제가, 비유하자면 질서가 정연한 천문학의 영역에서 변화가 무쌍한 기상학으로 옮겨간 것인지도 모릅니다. “과잉 경제론”이라는 새로운 학설이 나오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크게 보면 국경이 없어지고 있는 것처럼 근대 합리주의 패러다임이 깨지면서 그것이 수백 년 동안 애써 만들어 놨던 체계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뭐든 남아돌기 때문에 세계 전체로 보면 어느 나라도 더 이상 경제발전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 그리고 또 경제에 관한 종래의 경험ㆍ법칙들이 모두 통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로 성장시대, 선진국 경제는 벌써 20여 년 전부터 거기 익숙합니다. 경제학이 거시경제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학자들이 말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30여년이 지났습니다. 뭐로 보나 여건이 좋은 선진국들이 수십 년 정체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는 이유를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유럽이나 일본뿐만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빚을 내서 흥청거리지만, 미국 경제도 속은 일본이나 유럽보다 더 허약합니다. 또 선진국이 하나만 더 늘어도 지구 규모의 환경재앙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숫자로 나오고 있습니다. 끝없는 확대 재생산이 아니면 유지될 수 없는 자본주의 경제가 갈 데까지 간 것은 확실합니다.
여기 더해서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가 돈을 내던져 버린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끝없는 확대재생산을 통한 자기 증식이라는 자본의 논리가 깨진 것입니다. 두 달도 못가서 동양의 리카싱이 이들에 가세했습니다. 뭔가를 예비하는 징조입니다. 아마도 미래에서 보면 고르바쵸프가 핵 강대국 소련을 조용히 무너트린 것과 빌 게이츠들이 자본의 논리를 부셔버린 것을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두개의 이정표로 기억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답답한 현실에서 더 답답한 것은 우리 위정자들이 애써 부정하지만, ‘대변화의 경제부분’이 지금 이 땅에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보다 결과에서 더 심각한 ‘장기불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합니다. 세계적인 추세지만 우리나라가 제일 심각해서,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가히 공황 수준입니다. “장기불황이 아니라 경제의 양극화가 문제다”라고 정부는 강변하지만 이 양극화가 바로 부의 집중이고 집중은 언제고 붕괴되고 마는 것이 불황, 공황입니다. 무슨 분배문제가 절대로 아닙니다. 한 마디로 반도체ㆍ철강 등 몇몇 대기업에만 돈이 집중하면서 다른 대기업이나 중소기업들이 모두 허덕이고 있어서 그것이 이리 저리 파급되면서 일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부의 편재로 공황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경제는 학자들이나 전문가들보다 ‘시장’이 먼저 알고 반응합니다. 요즘 보면 3천 원짜리 식당에 손님이 북적대고 할인점에서는 10년 전 가격으로 물건을 판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변형된 형태의 공황’, 일본과 같은 디플레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적의 부재는 부의 편재보다 더 심각합니다. 부의 편재는 설사하는 것처럼 공황이라는 카타르시스를 통해 깨지면서 다시 균형을 회복할 수도 있을는지 모르지만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든 적의 존재가 반드시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ㆍ소 냉전을 끝으로 적이 없어져서 미국이 곤혹해 하고 있습니다.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라는 명제가 성립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 적이 없으면 국가도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적의 부재 때문에 고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2차 대전이 끝나서 전승국만 남게 되고 적이 없어지자, 좀 구차하지만 패망한 독일과 일본을 “前敵國”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상대로 유엔과 나토 시토 등 집단안보를 펼쳤습니다. 서양의 전통적인 국제정치는 세력균형이었습니다. A국과 B국이 동맹을 맺어 C국과 D국 연합에 대항한다는 식입니다. 예컨대 국제정치학의 비조격인 미국의 한스 모겐소 교수는 이런 세력균형을 여러 나라들의 외교정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작고한 서울대 이용희 교수는 “아니다, 세력균형은 국제정치의 원리”라고 정의했습니다. 적이 없으면 안 된다는 국가의 속성을 꿰뚫은 것입니다. 2차 대전으로 전승국만 남아서 더 이상 이런 세력균형 패턴이 불가능해지자 루즈벨트의 이 집단안보 구상이 나온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를 ‘세계제국주의’라고 불렀습니다. 지난해 화제가 된 ‘균형자’라는 것은 원래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대영제국이나 이 루즈벨트의 세계제국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 나라의 세력균형을 밖에서 다시 균형을 잡는다는 초월적 지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노 대통령의 “균형자”는 잘못된 것입니다. 아무튼 당시의 에치슨 국무장관은 루즈벨트의 세계제국주의는 그러나 현실 정치를 모르는 이상주의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럴듯한 적이 없으면 전쟁이나 전쟁 준비가 없으면, 도대체 나라를 유지할 수 없는데 무슨 전적국이나 집단 안보가 그런 적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쟁이나 전쟁준비가 사회구성의 핵이라는 이론을 실제로 내놓고 전개한 것은 나치즘입니다. 칼 슈미트라는 나치 이론가의 이 나치즘은 지난 시대 박정희 유신헌법에서 철학적 기초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군국주의가 아니더라도, 북한의 先軍정치가 아니더라도, 전쟁은 권력의 속성 한가운데 숨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내놓고 전개하는가, 암묵적인 전제인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사회가 무슨 계약으로 성립되었다는 장 자끄 루소의 허구가 사회과학의 전제가 되고 적을 필요악으로 규정하는 위선, 그것이 근대합리주의의 역사이자 “먹물”들의 위선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그것을 무슨 진리처럼 떠받들고 공부하는 사회과학도들은 불쌍합니다. 사회과학은 80%가 아지푸로, 선전 선동이라고 이용희 교수는 신입생들에게 말하곤 했지만 그도 왜 그런가는 파고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루즈벨트가 갑자기 사망하자 에치슨들은 매카시 선풍을 일으키면서 공산주의를 새로운 적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이때 때마침 “한국전쟁이 나타나서 우리(미국과 일본)를 구했다”(미 국가안보회의 문서)는 것이 미ㆍ소 냉전체제입니다. 6ㆍ25동란이 일어나, 소련을 적으로 만들 수가 있게 되어서, 결국은 미ㆍ소가 세계를 나누어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냉전이란 미ㆍ소가 “서로 적대함으로써 자기 영향권을 지배하는 체제”였다는 이 간단한 사실을 냉전이 끝난 지금까지도 우리들은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증오를 앞세워 역학을 숨긴 냉전논리에 사람들은 현혹되게 마련입니다. 원래 역학은 아주 자연스러워서, 지금도 예컨대 대북강경책을 주도하는 대부분의 미 행정부 관리들까지도 북한이 나쁘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그렇게 대응하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권력의 한가운데 도사린 소수의 이데올로그들만이 감각적으로 그 같은 국가의 본질을 구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미국의 세계지배를 합리화할 수밖에 없는 미국의 ‘국제정치학’이 그런 진실을 알려 줄 리도 없습니다. 한반도는 벌써 50여 년 전부터 이렇게 ‘세계사의 중심’으로, 세계가 처음으로 미ㆍ소 체제라는 하나의 체제가 된 이후 내리, 맨 앞에서 갖은 고통을 겪어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도대체 왜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가, 그 이유를 똑바로 모른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미ㆍ소 냉전을 마지막으로 어디서도 적을 구할 수 없어서 다시 여기서 적 만들기 게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 따라 다시 춤추고 있습니다. 지금도 백악관 깊숙한 곳, 럼스펠드, 체니와 같은 ‘네오콘’들은 국가라는 ‘따거’가 요구하는 ‘국가의 적’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영화에서처럼 동분서주, ‘적 만들기’에 골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의 핵 개발이 부시의 ‘적 만들기’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김정일이 대포동에서 처음 미사일을 발사하자 럼스펠드는 "God bless Kim"이라고 했습니다. “김정일에 신의 가호를!” 한 마디로 북한을 “적으로 키우겠다”는 것입니다. 시대착오적인 북한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미국이 적대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북한의 폭정을 새삼 문제 삼고 나섰습니다. 순진한 사람들은 “북한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냐,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안 되는데”, 이렇게 생각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쉬운 대로 적으로 삼는 다른 한편, 계속 적대관계를 유지해 나가노라면 북한의 후견인격인 중국이 언제고 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이 경제의 어려움 때문에 국민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미국의 파워게임에 응하게 되어 마침내 미국은 중국이라는 ‘그럴 듯한 적’을 갖게 된다는 시나리오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기서 적을 구하는 데 실패하게끔 예정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세상이 달라져서 그렇습니다. 근본부터 뒤흔들려서 그런 것이지만, 전쟁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싸지고 있는 것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1981년 어느 학자가 ‘전쟁비용증가의 법칙’이라는 것을 내놨습니다. 전략폭격기 B1의 대당 가격이 20억 달러, 토마호크 1발이 5백만 달러, 94년 패리 전 미 국방장관은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나면 당시 일본 GNP에 육박하는 4조 달러가 들 것이라고 추산했습니다. 전쟁은 이제 비싸져서, 항간에서는 미국이 석유를 노리고 이라크를 침략했다는 억지가 통하지만, 정말 전쟁은 더 이상 클라우제비츠가 말하는 ‘정치의 연장’도 될 수 없으며, 경제의 확대균형을 보장해주는 수단도 아닙니다. 체니나 럼스펠드가 아무리 중국을 적으로 만들려고 애써도 소용없습니다.
더구나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인데, 지난번 이라크전쟁에서 보면 양쪽 다 병사들이 조금도 용감하지가 않았습니다. 국민들의 전쟁용의가 사라진 것입니다. 참호 속에서 두려움에 울부짖는 이라크 정예부대 소대장의 교신내용이나, 전쟁공포 때문에 정신착란을 일으켜 줄줄이 후방으로 실려 가는 미군 직업 하사관들의 모습이 <타임>과 <뉴스위크>의 커버스토리가 되는 일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사람을 전쟁에 동원하기가 예전처럼 쉽지 않습니다. 전쟁이 나면 싸우겠다는 젊은이가 한국에서 10%, 중국에서 14%뿐이라는 여론조사가 나왔습니다. 대변화가 이미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입니다. 요즈음 이라크 전후문제의 전개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전쟁이 불가능해지고 있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흐름에 부시가 밀리면서 저항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하나도 빗나가지 않습니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우리 위정자들이나 언론, 전문가들의 대응이나 생각도 모두 잘못되어 있습니다. 적의 부재라는 대변화의 자기전개가 북한 핵 문제의 본질입니다. 무슨 핵확산 방지나 대량 파괴 무기의 수출 문제, 또는 동북아 비핵화문제거나 한반도의 전쟁위기 같은 것이 전혀 아닙니다. 부시의 의도를 분명히 알고,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의도가 왜 시대착오에 불과한가를 알아야 이 대 혼돈의 시대에 나라를 경영할 자격이 있는데 현실의 “정치 패거리”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국제 환투기 문제는 과잉의 자기 전개이며 북한 핵은 미국의 적 만들기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다시 모두 대변화가 국가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 간단한, 무슨 다른 이론이 필요 없는, 새로운 국제정치 기본 틀에 익숙해지면 세상이 보입니다.
근대국가의 특징은 영토국가, 경제국가, 군사국가입니다. 그러나 동구권의 대분열이나 서구의 대통합(EC)에서뿐만 아니라 세계화에서 분명하듯 한 나라의 경제권이나 영토들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여기 다시 적이 없어지고 있어서 근대국가의 존립근거는 모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복잡하게 설명할 것도 없이 요즘 누구나 말하는 세계화가 바로 보면 이 근대국가의 와해입니다. 세계화라는 현상, 세계화와 지역화는, 바로 국가가 안팎으로 갈라지고 있다는 뜻인데, 국가가 와해된다는 것이, 국가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이 감정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컨대 유럽은 이제 국민국가가 아니고 “네트워크 국가다” 라고 하면 그것이 바로 근대국가의 와해입니다. 고대 왕국, 봉건국가, 근세 절대군주시대를 지나온 것처럼 근대국가도 지금 “지나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자명한데도 불구하고 세계화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국가의 와해는 납득하지 못합니다. 국가의 와해나 그것이 불러오고 있는 대혼돈은 낡은 패러다임의 논리나 가치관 안에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대통합은 벌써 50년대 유럽철강동맹에서부터 시작되어, 비유컨대 익은 감이 떨어지듯 자연스럽게 이뤄져서 그것이 근대국가의 와해인 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동구의 대분열은 공산주의의 붕괴로만 비쳐지고 있는 것이고, 국가의 와해와 악전고투하는 부시를 사람들은 미국 헤게모니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뒤에 소상합니다.
무엇보다 근대국가의 와해는, 후술하겠지만 근대국가라는 제도가 근대 합리주의가 구축한 최고의 형태라는 점에서 보면, 근대합리주의의 파탄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에서 분수령입니다. 자연과학에서 뉴턴의 물리학이 수정되기 시작한 것에서부터 인간 사회에서의 근대국가 와해는 실제로 하나의 패러다임 시프트인 것 같습니다.
세계화는 그러나 근대합리주의의 붕괴보다 더 깊습니다. 세계화를 맨 처음 말한 사람은 50여 년 전의 떼이야르 샤르댕 신부였습니다. 그의 세계화, ‘인간의 세계화’를 알아야 세상이 어떻게 유기적인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 동양철학과 현대물리학이 주장하는 세계관이 분수령 너머의 새로운 가치관으로 자리 잡게 될 수밖에 없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근대국가와 그 세계체제의 와해가 갖는 의미, 나아가 언제, 어떻게 라는 그 전개를 나라 안팎에서 치열하게 파헤쳐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 대신하는 새로운 질서의 모습을 먼저 봐야 우리의 살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변화에 순응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크건 작건 환경에 적응할 수 없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4. 한반도 정치경제학
한반도는 근대국가 세계체제가 대변화와 마지막 대회전을 벌이는 곳이라고 했지만, 대변화, 과잉과 적의 부재는 이미 우리 현실에서 국면을 일차적으로 장악해 가고 있습니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벌써 60 년 전부터 여기가 “세계화의 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와 관련된 나라 안팎의 큰일들은 다시 말하지만 모두 과잉과 적의 부재가 자기전개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비록 지난 시대와 외양은 같아 보여도 속은 모두 변해 버렸습니다. 우리 운명은 늘 밖에서 결정되어 왔다고 했지만, IMF사태가 한국경제를 살렸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변화는 낡은 패러다임의 모든 논리를 삼키고도 남습니다.
이른바 미ㆍ일(美日)역전(逆轉)이라는 일본경제의 세계지배는 90년대 초반 허망하게 무너지고 다시 미ㆍ일 재역전으로 반전했습니다. 미국의 국가경제가 다시 강해진 것이 아니라 89년 도쿄 증시 대폭락에 이어 92년 북한 핵이 조성한 전쟁 분위기가 예의 국제 과잉유동성을 월스트리트로 몰아갔기 때문입니다. IMF 때 광고처럼 “돈은 안전이 제일”이어서 달러로, 그리고 미국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머니게임이라는 대변화의 한 국면이 미국을 살린 것입니다. 결국 전쟁 위기를 조성한 북한 핵이 미국을 살린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미ㆍ일 재역전(再逆轉)에 비하면 규모에서는 사소하지만 한국경제의 숨통도 열어 놨습니다. 대변화의 한 국면만 보고 미국 헤게모니 시대라고 한다든가 더 나아가 ‘미국 주도의 세계화’ 운운하고 있는 것은 한심한 일입니다. 우리가 IMF를 “극복했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90년대 중반 한국은 이른바 ‘네 마리 용’에서 추락했다고 했습니다. 최근에 보면 중국의 복건성과 광동성에 파고 든 대만이나 홍콩이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어 순항하고 있는 데 반해 ‘IMF 이래 최악’이라는 우리 경제의 모습은 그 ‘추락’이 기정사실임이 다시 드러나고 있습니다. 90년대 초반부터 동남아산 일본제품이 세계를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일본의 대미 수출을 억제하자 일본 기업들이 동남아나 남미에서 제품을 생산해서 미국은 물론 세계로 수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경쟁자 하나가 더 나타난 것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심각한 우리 경제의 근본을 흔드는 ‘사변(事變)’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는 언제나 산업구조의 재편성에 따른 정치적ㆍ사회적 고통을 수반하면서 발전해 왔습니다. 영국의 초기 산업혁명에서 이 같은 고통은 어린이들을 갱도(坑道)로 몰아넣는 그림으로 묘사되었고, 또 예컨대 탄광 산업에서 방직으로 주력 산업이 옮겨가면서 폐광(廢鑛)촌의 고통이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산업구조가 한 단계 발전할 때마다 어김없이 대가를 요구해 왔던 것입니다.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끝없이 낡은 것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그 진통이 안으로 사회에 긴장을 조성하고 밖으로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곧 자본주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본주의의 발전 공식이 우리나라에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구조조정의 고통이 없었기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선진 경제가 200년이 걸린 성과를 지난 40년 동안에 쫓아간 것입니다. 무슨 ‘후발성 이익’이나 ‘한강의 기적’이 아니어서 IMF로 그 대가를 한꺼번에 치르고 있는 셈입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지금 우리가 뒤늦게 치르고 있는 구조조정이, 경제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지난 시대 자본주의의 생산적인 진통이 못 된다는 점입니다.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는 “동북아 정치경제의 기원과 전개 : 산업부문, 제품 사이클 그리고 그 정치적 결과(1984)”라는 논문에서 한국경제가 어떻게 그처럼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으며, 그러나 그 한계가 어떻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가를 명확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이 지역에만 독특한, 일본ㆍ한국ㆍ대만의 ‘산업순환’에 주목했습니다. 이 산업순환은 일본의 독특한 식민지 경영과, 미국을 중심에 두고 일본이 이른바 반주변이 되고 한국과 대만이 주변부가 되는 정치ㆍ경제적 교환관계입니다. 일본제국주의가 한반도와 대만을 합병한 1910년대 이후 30년 동안이나 세계에서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은 곳이 바로 한반도와 대만이었습니다. 일본이 한반도와 대만을 동원해서 대미 수출과 전쟁준비로 경제를 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50년대 어른들은 그래서 “일제시대가 살기 좋았다”라는 곤혹스러운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70년대 우리 경제성장을 무슨 한강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단순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동북아에서 일본을 다시 키워서 소련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의도대로 65년 한일국교가 정상화되어 경제적으로는 전전(戰前)의 한일관계 패턴이 재현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근본을 모르면 아무리 바로 보려 해도 빗나가게 마련입니다. 아무튼 산업순환이란 일본이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기술을, 격차를 두면서 한국과 대만에 이전시키는 방법으로 일본 산업구조의 지속적인 고도화를 도모해 온 전략입니다. 전전(戰前)이나 전후(戰後)가 그 전개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래 섬유ㆍ제철ㆍ조선ㆍ가전ㆍ자동차 등 일본의 주요 전략산업 부문에서 일본은 한국에 기술을 이전해 왔습니다. 10의 기술에서 8만 주는 이 ‘격차를 두는 이전’을 통해 일본은 좀 더 부가가치가 높은 쪽으로 치달아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존 시설의 개폐(改廢)에 따른 비용이든 노동자들의 저항이든, 앞에서 본 자본주의 일반의 고통이 불가피한데, 낡은 것을 한국이 제 때 제 때 인수해 줘서, 마치 기러기가 질서정연하게 하늘을 날 듯, 한국과 대만을 거느리고 안형 성장(雁形 成長), 단기간에 가공무역으로 세계를 제패한 것입니다. 예컨대 80년대 초 미국이 일본 자동차의 대미 수출을 200만대로 제한하는 쿼터로 묶었습니다. 여기 대응해서 미쓰비시는 좀 더 부가가치가 큰 중형차 생산라인을 확대하기 위해 현대자동차에 미라지라는 소형차 생산라인을 몽땅 옮겨 줬습니다. 이 미라지, 현대의 엑셀은 미국에 진출하자마자 소형차 시장을 석권했습니다만, 도시바가 VTR 생산라인을 담당과장까지 삼성으로 보낸 것도 그 고전적인 예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같은 일본의 산업순환에 동원된 한국의 재벌들은 제일모직이든 현대건설이든 대우실업이든 업종과 관계없이 이른바 원 세트(one set)주의로 이들 일본이 물려주는 산업부문 전부에 뛰어들어 ‘그룹’을 이루게 됩니다. 기업내부에서 인력을 재배치하고 은행에서 막대한 자금을 끌어다가, 그것이 IMF 때 재벌들의 엄청난 누적적자로 나타났지만, 건설회사가 선박과 자동차를 생산하는 식이어서 달리 사회가 산업구조의 개편에 따른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의 동남아산 일본제품의 등장은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이 산업순환이 끝난 것을 의미했습니다. 커밍스는 84년에 벌써 “노동의 비교 우위가 아니라 원천기술과 마케팅, 조직역량의 비교 우위는 산업순환이 제공하는 것이 아니어서 다른 나라들이 비집고 들어 올 것”이라고 했고 그것이 ‘동남아산 일본제품’으로 또 이어서 중국의 부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공부를 제대로 못한 고려대학의 무슨 명예교수가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서 사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잔혹한 식민 통치 시절의 민족적 아픔을 건드린, 지나간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시바다 료타로라는 일본에서 유명한 작가가 있습니다. 65년 한일수교 어름해서 이 사람이 박정희의 특별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합니다. 그는 일본이 패망한 지 20년이 지나도록 그 막강했던 일본 관동군(關東軍) 70만이 싸움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괴멸(壞滅)하고 만 것을 감정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는데, 청와대에서 그 “관동군을 보았다”고 자못 영탄조(詠嘆調)의 글을 썼습니다. 박정희 유신독재는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적으로 일제시대의 재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은 그 “살아 있는 과거”가 지금껏 자기 전개를 거듭하면서 우리를 어떻게 다시 미증유의 고통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가를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사 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 있는 과거, 지난 100년 우리를 지배해온 낡은 틀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치열한 오늘의 문제입니다. 권력은 물론 사회 전체가 이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커밍스가 말한 산업순환의 정치적 결과, 그 전개를 제대로 봐야 하는 것이 과거사 청산의 기초입니다. 해방 전이나 해방 후의 과거사 모두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또 안 됩니다. 엘빈 토플러의 말대로 미래가 쳐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복잡하지만 여기가 세계 역동성의 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숙명입니다.
아무튼 90년대 초반 “세계시장의 단일화, 생산기지의 세계화”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 세계화라면 “미국 주도!” 지만, 이때의 세계경제 통합의 주역은 일본이었습니다. 바로 이 생산기지의 세계화, 세계시장의 단일화라는 일본 산업자본주의의 세계제패는, 곧 바로 세계화라는 미국이 아니라 무국적 금융자본주의에게 먹히지만, 우리에게는 앞에서 본 한ㆍ일간의 경제적 특수관계의 와해를 의미했던 것입니다. 일본으로부터의 기술이전이 막히자, 삼성이 자동차, 현대가 제철 식으로 이른바 중복투자 판이 벌어졌습니다. 영업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업종이나 시설투자를 벌여 기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투자경기로 명맥을 유지하던 막다른 골목에서 갑자기 IMF가 나타났습니다. 대혼돈이 쳐들어 온 것입니다.
공황감이 팽배했지만 그러나 환율이 두 배, 세 배 뛰어서 일거에 수출경쟁력을 개선했습니다. 어쨌거나 핫머니가 쇄도해서 바닥난 외환보유고를 “적정수준”으로 채워주었습니다. 환율인상, 수입원자재 가격상승이 인플레를 일으키지도 않았으며! 더러 기업주는 죽었으나 대부분 대기업은 건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외국자본이 주식시장의 40%를, 그만큼 남의 것이 되어 버렸지만, 채워줘서 경제의 외양은 그대로입니다.
한마디로 IMF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위기구조로 전화(轉化)한 것입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2004년 연초 우리 경제의 장래를 생각하면 등에 식은땀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의 고민은 ‘장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경제는 더 이상 조립 수출 주도형 경제가 아니라 삼성과 포철이 주도하는 반도체와 제철들, 중간생산재 모노컬처로 변했습니다. 삼성은 반도체며 휴대폰 등 많은 부분에서 ‘전화(轉化)’에 성공했고 우리 경제사상 유례없는 세계제패(世界制覇)를 이룩했지만, 일등만 살아남는 과잉시대 기업 환경이 두려운 것입니다. 더 이상 일본이 장래가 아니어서, 일본에서 배울 것이 없어서, 삼성은 전략회의에서 천재 찾기를 선언했습니다. 아무리 “인재 제일”의 삼성이지만 천재가 나타나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삼성이, 우리 경제가 홀로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심각한 것은 삼성의 이런 고민이 우리 기업 일반에게는 장래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업이 돈을 빌려가지 않아서, 은행이 부동산을 담보로 하는 공격적 가계 대출을 벌이고 그것이 다시 부동산투기로 나타나 정부를 괴롭히고 있지만 정작 등에 식은땀이 나는 것은 그 다음 국면입니다. ‘장기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주저앉든, 주식이나 환투기가 촉발하든, 부동산가격이 폭락하면서 다시 가계와 기업이 파산(破産)에 내몰리는 일이 우려된다는 것입니다. IMF로 드러났지만 지난 40여년 우리나라의 30대 기업, 5대 기업은 더, 엄청난 누적적자를 안고 있었습니다. IMF를 극복했다, 구조조정에 성공했다지만 사실은 이 부채는 실질적으로는 지난 40여년 천문학적으로 상승한 지가(地價)와 상쇄(相殺)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과는 또 달리 고무줄처럼 자산 재평가가 허용되기 때문에 부채비율을 장부상으로만 줄여놓은 것입니다. 이래서 부동산가격 폭락은 재앙입니다.
남 다른 “부동산 불패”의 신화가 정말 큰 문제입니다. 세계 전체에서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한해 국민총생산(GNP)보다 땅값이 비싼 곳은 일본과 한국뿐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대만이나 영국처럼 땅이 비좁은 경우 GNP와 비슷하지만, 일본은 도쿄 땅값이 3분의1로 주저앉기 전에는 GNP의 여섯 배였으며 한국은 아직도 세계 최고, 무려 10 배 수준입니다. 한ㆍ일 두 나라를 부동산 자본주의라고 합니다. 부동산 담보 대출 관행이 기업과 가계에 가장 기본적인 재산증식과 유지의 수단이 되고 있는 곳은 두 나라뿐입니다. 이래서 땅값은 끝없이 오르게끔 되어 있었는데, 경제 초강대국 일본에서 이 땅값 버블이 꺼졌습니다. 지금껏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핵무장 어쩌고 하는 오늘의 일본정치입니다.
우리 경제의 운명도 부동산에 달려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토지의 45%를 토지 부자 1%가 갖고 있다고 합니다. 또 상위 10%가 72%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집중’입니다. 자체의 수요 공급 논리가 아니라 무국적 악성 금융자본주의까지 가세한 이 투기 판은 아무래도 갈 데까지 간 것 같습니다. 세계가 처음 경험하는 무국적 금융자본주의의 자기전개에 우리 운명이 맡겨졌습니다. 질서정연하고 예측 가능하던 천문학에서 혼돈의 기상학으로 옮겨 간 경제논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잣대로 거침없이 현실을 재단(裁斷)하는 무모함, 이런 것들이 오늘 우리 사회의, 언젠가는 드러날 감춰진 모습, 위기구조입니다. 새로운 형태의 장기불황에 깊숙이 진입했는데도, 당장 5% 성장을 유지하느라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앞으로 3, 4년 뒤에는 본격적인 불황 한 가운데서 허덕이게 될 터인데도, 그때쯤이면 소득 2만 달러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나마 경제를 지탱할 길이 막막한데 “불황이 아니고 양극화”라면서 “동반성장”하고 “균형발전”하자고 합니다. 무슨 획기적인 경제 전략이 있어서 소득 2만 달러가 곧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 전략이 아니라 진보라는 분배의 입장에서 동반 성장하고 균형 발전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극화는 불황이 빚는 세계적 현상이고, 무슨 균형발전은 자본주의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로 이런 지적 혼돈이 언젠가 일이 크게 터지고 말겠구나하는 우려를 더욱 깊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회에 만연한 이런 지적 혼돈은 결국은 다시 정치 쪽으로 수렴되고 또 거기서 확대 재생산되면서, 나름대로 체계를 갖춘 “가상현실(假想現實)”을 조작해냅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 사회는, 거꾸로 이 허구의 체계화, 가상현실 때문에 유지되고 있는 측면이 아주 큽니다. 부동산 투기를 막는 갖가지 장치가 오히려 아파트나 땅값의 폭락을 막고 있습니다. 디플레 시대에 인플레 처방이 본격적인 디플레를 오히려 억제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실물이 아니라 집단심리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밖에서 환율 등 충격이 가해지면 그 집단 심리는 그대로 사라집니다. 카프라는 “인식의 위기”가 여러 다른 모습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뒤에 자세하지만 체계적인 가상현실로까지 발전해서 국면을 장악하고 있는 예는 알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대변화가 전화시킨 것은 경제만이 아닙니다. 북핵은 90년 전후 한ㆍ중, 한ㆍ소 수교에 대응한 북한의 카드였고 미국에게는 냉전 후 테러 조직 등 상정 가능한,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일곱 가지 잔챙이 적” 가운데 하나에 불과해서 클린턴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수순(手順)을 밟았지만 부시는 다릅니다.
황화론(黃禍論ㆍ중국)에서든 문명충돌(아랍) 쪽에서든 적을 만들어 내야 되기 때문에, 북핵 문제가 분쟁의 평화적 해결패턴에서 적의 부재에 대응한 “적 만들기”로 전화(轉化)한 것입니다. “키우겠다”는 것이 정책목표이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부시의 적 만들기는 이미 실패단계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중국을 적으로 만드는 일이 여의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까지는 중국이 되도록 분란을 피한다는 입장이어서 부시의 파워게임에 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도 걱정이 많습니다. 중국이 이른바 동북공정 어쩌고 하면서 고구려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은 지난 20여 년 동안의 불균형 발전이 야기할지도 모를 국가 분열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올림픽 이후에는 나라 안의 긴장을 밖으로 수출하는 호전적인 정책들이 줄을 이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국가주의도 시대착오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래도 부시나 다른 정치 지도자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다음 국면”으로 넘어 가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저들은 냉엄한 현실정치의 빈틈없는 논리에 자만하고 있지만 시대착오는 어쩔 수 없습니다. 공룡,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도태되고만 공룡이 저들의 체제입니다.
이 다음 국면이 크게 보면 냉전의 와해 이후 미국이 92년 이래 북한 핵이라는 빗장을 질러 막아 놨던 동북아의 대변화가 한꺼번에 들고일어나는 국면입니다. 89년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일들, 그동안 반작용 때문에 주춤했던 대변화가 다시 가속(加速)하는 국면입니다. 중국의 급격한 경제성장에 제동이 걸리고, 고질적인, 7천억 달러가 넘는 미국의 무역적자와 4천억 달러가 넘는 재정적자가 다시 전면에 등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IMF 때처럼 다시 “세계 자본시장”이 이들 국가들과 벌이는 한판 승부가 혼란의 큰 흐름이 되면서 저들의 파워 플레이는 어떤 형태든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마치 거대한 건물을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고 조용히 무너뜨리는 것처럼 소련제국을 붕괴시켰고, 일본 기업과 가계(家計)의 강력한 경제력이 90년대 후반 일어날 수도 있었던 세계대공황을 일본 안에 묶어 두었습니다. 유럽이 대통합으로 탈(脫)국가 과정을 앞서 나가 버리면서 뭔가 폭발 에너지가 줄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낡은 틀의 와해는 이미 큰 고비는 넘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핵전쟁의 위협이 사라지고 세계공황의 두려움이 비켜갔는가 하면 이미 미국 일본 중국 세 나라를 제외하고는 복고적인 근대국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들 세 나라의 패권 게임이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것 그것이 문젭니다. 그러나 재앙이 나눠지고 있어서 저들이 무너지는 충격이 아무래도 생각보다 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읽어내야 할 더 큰 징조는 저들 게임밖에 달리 남은 스케줄이 없어서 근대국가 낡은 틀의 붕괴가 본격적인 국면에 진입했다는 것입니다.
5. 정치대란
아무튼 부시의 “적 만들기”가 이 땅에 새삼 분단(分斷)체제의 논리를 다시금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상현실”은 바로 이 분단체제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습니다. 백낙청 교수는 한반도에는 분단체제라는 “하나의 체제 아래 남과 북이라는 두 개의 국가”가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개의 국가라기보다는 “반쪽국가이면서 온전한 국가라는 허위의식이 가상현실을 빗고 있는 체제”라고 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남과 북이 서로 상대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데서 정통성을 구하는, “적대 의존 체제”가 분단체제, 분단역학입니다. 남북이 서로 적이 돼줘서, 호상(互相)간에! 체제를 유지해 올 수 있었고 경제도 제가끔 미·일이나 중ㆍ소와 연결되어서 밑을 받치고 있었습니다. 미ㆍ소간의 냉전이 바로 이 적대의존의 연원입니다. 미국과 소련이 서로 적대하는 것은, 이념이라는 껍데기를 벗기면, 실제로는 자기영향권을 확보, 유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미ㆍ소에 의한 세계지배, 이른바 팍스 루소 아메리카나(PAX RUSSO-AMERICANA)의 참 뜻이 적대의존(敵對依存) 그것입니다. 미ㆍ소가 다른 나라들을 나누어 지배하는 국제정치가 한 나라를 두 동강 낸 저들의 전진기지(前進基地)에서 백성을 둘로 나눠 지배하는 것이 우리 분단체제이고, 그 안에 있는 “두 개의 반쪽국가”입니다.
어떤 국가든 국가라는 개념 자체는 반드시 적의 존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적이 있어야 국가가 성립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적은 이렇게 국가의 본질 속에 깊숙이 은폐되어 있는 다른 나라들의 “적”과는 다릅니다. 금강산 댐, “북풍” 등으로 수시로 출몰하면서 늘 현실의 정치경제를 간섭, 우리 생활을 지배해온 적입니다. 북쪽에서 주한미군의 존재가 대를 이은 독재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남쪽에서 베트남 전 패배 이후 미국이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하겠다는 단 한 마디가 잔혹한 유신독재로 나타난 것이 모두 분단역학입니다. 마치 자석과 같아서, 지난 반세기, 그 자장(磁場)에 남과 북의 우리 백성을 꼼짝 못하게 묶어 놓고 있는 것이 분단체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원리를 해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냉전의 와해로 밖에서 강요한 그 역학이 이미 수명을 다해 가는데도 오히려 갖은 수단을 다해 북은 핵 개발로, 남은 “보혁구도”로 기를 쓰고 연장시키려고 애쓰는 형국입니다. 실로 참담한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북은 여전히 김정일 권력이 이 분단체제라는 시스템의 운영주체지만 남쪽은 이제는 권력대신 이른바 보수언론이 그 주체입니다. 조선ㆍ동아들이 이 시스템을 주도하고 한겨레, 참여연대들이 이들 반대편에 서 있는 체제입니다. 그러나 비유컨대 마치 달이 지구를 따라 돌 듯, 한겨레 등의 잡아당김이 오히려 구도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것도 적대의존의 논리입니다. 분단체제, 말을 바꾸면, 하나의 체제인 남과 북을 동시에 부정하는 입장에 서지 못하고, 적대의존의 역학요소로 혼돈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론은 태생적으로 권력입니다. 일제가 3ㆍ1운동 후 무단통치에서 영국식 식민지 간접통치방식으로 일부 전환하면서 동아ㆍ조선 등이 태어난, 식민지 간접통치 체제였던 것입니다. 해방 후 동아와 한 뿌리인 한민당이 정권 수립을 주도했고, 유신에 한때 저항했지만 이내 그 홍보기능을 담당, 독재체제의 없는 정통성을 있는 것으로 부단히 상징조작을 하면서 정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6ㆍ29선언, 독재에서 보수대연합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이들 언론은 언론이라기보다는 “정치실세”로 변했습니다. 언론이 가상현실을 운영하는 틀, 초정당구조(超政黨構造)가 되면서 YS든 DJ든 그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노무현 체제는, JP를 끌어들인 DJ와는 달리, YS 이래의 보수대연합(언론을 포함한)을 승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체제언론은 “보혁구도”를 만들어 싸움을 계속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권력게임을 벌이고 있습니다. 노 체제도 언론이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정권이 모두 집권 후반기에만 들어가면 줄줄이 “식물대통령”이 되고 마는 것은 정치를 하는 언론 탓만은 아닙니다. 분단체제의 와해 논리와 대 혼돈을 이해하지 못한 탓입니다.
아무튼 북한체제는 지금부터 핵과 대미적대정책을 포기하고도 존속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쳐 가고 있습니다. 미국 경제가 요즘 심상치 않기 때문입니다. 2007년부터는 팽대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 문제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경제문제 때문에 북한 적 만들기 게임은 시들해질 것입니다. 호전적인 레이건도 집권후반기에는 같은 이유로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었습니다. 이로 인한 분단역학의 와해는 남쪽에서도 정치대란(政治大亂)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벌써 그 징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신독재에서 보수대연합, 그리고 이른바 ‘보혁구도’ 그 다음은 무엇이 나타날까요? 아마도 다음 대선(大選)에서는 ‘망국(亡國)적인’ 지역주의가 나라를 다시 동서로 가르면서 권력 자체의 약화와 맞물리면서 체제가 무너지는 정치대란(政治大亂)이 본격화할 것입니다. 남북대립이 여전하던 YS나 DJ시대에는 이른바 지역정서를 정치에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북 대립이 없는 지역 간 대립의 정치는, 온갖 고초를 다 겪은 우리 민족으로서도 상상하기 힘든 정치대란을 부를 것입니다. 본격적인 정통성 위기가 현재화되는 것입니다. 중앙권력의 무력화가 동서대립을 축으로 전개되면서 나라가 “지방화”할 것입니다. 여의도정치도 대통령처럼 “식물화”할 것입니다. 사회를 지탱하는 중산층, 정치를 혐오하는 사회각계의 프로들이 6.29때 넥타이부대처럼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는 사태이외에 다른 전개는 예상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남과 북에서 이렇게 대변화에 끌려가면서 예의 분단체제, 한반도의 반국적(半國的) 설정, 가상현실이 붕괴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 건너 불이 아니어서 그 혼돈 비용은 우리 백성들이 지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경제만 유별난 것이 아니라 이처럼 정치도 참으로 남과 다른 나라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과는 더 크게, 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소설가 장용학 선생은 우리 한반도를 독특한 문명사적 시각으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ㆍ로마에서 출발한 서구문명이 한 갈래는 프랑스ㆍ영국ㆍ미국을 거쳐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들어오고, 다른 한 갈래는 독일ㆍ소련을 거치면서 평등이라는 아름으로 이 땅에 들어와 서로 맞부딪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합리주의 자체의 모순,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價値는 애당초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반대편으로 지구를 돌아 하필 이 땅에서 맞부딪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떼이야르 신부가 “사람의 세계화”를 말했지만 6 25로 세계가 처음으로 미소체제라는 하나가 되고 다시 세계화가 이제는 마지막이 될 미일 중국의 강대국 게임이 이 땅에서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계가 하나가 되는 진통, 그것이 지난 백년 우리가 겪어온 고통의 의미이지만, 다시 여기서 끝나는 근대합리주의의 종언은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만해 한용운 선사는 우리 민족이 음36년 양36년의 간난을 치른 뒤에 세계에 우뚝 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음양을 가른 것은 변화를 예비한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변해서 세상의 변화를 이끌게 될 것이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의 두 價値가 부딪치면서 그 가운데 하나가 다른 것을 압도한다든가 타협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로 전화하고 있다는 것, 세계화의 하나 됨 , 그것의 실현이라는 가치입니다.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다시 고통이 강제하기 전에 맞불, 우리가 먼저 새로운 가치를 실현해 가는 것일 것입니다. 낡은 가치의 꼭두각시이기를 거부하고 대변화의 지향을 알아내서 스스로 변하는 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며 역사를 만드는 일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의 ‘다음 국면’입니다. 적을 잃은 미국이 연간 7천억 달러가 넘는 팽대(膨大)한 무역적자를 안은 채 중국과 파워게임에 골몰하고, 이른바 ‘세계자본시장’이 이들의 파워게임을 먹이로 다시 머니게임을 벌이는 다음 국면, 거기 연동해서 북한체제가 무너지고 남쪽의 정치ㆍ경제가 표류하는, 남과 북에서 분단체제라는 ‘하나의 정치ㆍ경제 틀’이 깨지면서 통일이 사변(事變)으로 오는 대 혼돈을 대비하는 길은 없을까요?
연전에 미국 국방성에서 나왔다는 <펜타곤 리포트>는 이 문제와 관련, 아주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에너지 위기는 세계가 앞으로 당면할 가장 큰 문제입니다. “앞으로 20년 내에 급격한 기후 변화로 식량, 물, 에너지 등의 자원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지구가 지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인구가 줄어 들 때까지 전쟁과 기아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천 할아버지에 한 손자만 남는다’는 우리 전래(傳來)의 후천개벽(後天開闢)에 방불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대목이 엉뚱합니다. 이런 문명 파괴적인 재앙을 예견하면서도, “특히 엄청난 인구의 중국이 식량 물 에너지 부족으로 대재앙에 함몰할 것”이며, 여기 연유한 전쟁이나 전쟁 준비가 “테러보다 훨씬 제어하기 힘들 것이 분명해서” 앞으로 미국의 그럴듯한 적이 될 것이라는 설정입니다. 일테면 새로운 버전의 황화론(黃禍論)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지구가 지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인구가 줄어 들 때까지”라는 말입니다. 마치 핵전쟁이라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보자(think about unthinkable)’던 지난 시대 핵전략처럼 무자비합니다.
재앙에서조차 적을 찾는 것이 저들의 국가주의입니다. 그것을 도덕의 잣대로 재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바로 이들 현대 공룡들의 이런 속성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필자가 근대국가의 와해를 역설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굳이 부연한다면 근대합리주의체제는 환경재앙을 군사적으로 활용한다는 식으로, 과잉이든 적의 부재든 환경재앙이든 모두 자기 틀 안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어서 패러다임 시프트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근대주의적 가치관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치면 그 문제를 왜곡해서 키울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공룡(恐龍)과 다름없게 될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지향을 잃고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게 되어 가는 공룡에 대항해서 살아남는 길은 분명히 있습니다. 예의 다음 국면, 아마도 베이징올림픽이 끝나면서 중국의 급격한 경제성장이 정치ㆍ경제적으로 나라 안팎에서 제동이 걸리게 되면서 ‘식량과 물 에너지 부족으로 재앙에 함몰’하고 그 불똥이 세계를 태우게 될 2008년에서부터 환경재앙이 본격적으로 엄습하는 2020년까지가 문제입니다. 분명한 것은 펜타곤의 원망과는 달리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요즘도 간혹 본질에서 기아의 문제인 후진국 사태에 미국이 군사개입을 일삼는 왜곡을 하고 있지만 그것도 문제 자체를 키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20년, 이런 왜곡이 중첩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공황”과 환경재앙이 동반, 심화할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IMF같은 사태와 국가의 와해라는 정치ㆍ경제적 위기구조에서 환경재앙 쪽으로 위기가 전화해 가는 구도입니다. 이 전개를 마디마디 정확히 예측하고 거기 대응해야 합니다. 그것도 앞으로 2, 3년 후 정치ㆍ경제적 대혼란이 덮치기 전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키를 돌려놓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근대국가의 와해는 바로 근대합리주의의 파탄이라고 했습니다. 근대국가란 말을 달리하면 “근대합리주의체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뉴턴의 고전물리학, 정신과 육체를 둘로 나누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근거한 근대합리주의는 지난 300년 근대국가로 “물화(物化)?”되었습니다. 말을 바꾸면 근대합리주의의 최고의 형태가 바로 근대국가입니다.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인문과학이든 모든 이른바 학문은 모두 직접 간접으로 국가에 “봉사”해온 것입니다. 세상을 이리저리 설명해내서 그것을 제도로 엮어내고, 나머지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은 종교 쪽으로 미루어 줘서 국가와 종교가 세상을 나누어 지배해 온 것입니다. 이런 체제, “가능한 한 합리적으로 세상을 해석해서 꾸민 틀”, 현대물리학이 그게 아니라고 항변해도 동양철학이 거기 대신하는 세계관을 설명해도 막무가내로 버티던 근대합리주의가 지금 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6. 만들어 가는 의지
근대합리주의를 감연히 벗어던져야합니다. 우리는 근대합리주의의 약한 고리이기 때문에 근대합리주의는 여기서 극복될 수 있습니다. “만들어 가는 의지”는 지금 전일(全一)적인 세계관, 주관과 객관을 하나로 하는 입장을 요구하고 우리에게 사랑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인류의 정체성을 물으면서 “사랑의 패러다임”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들어 가는 의지는 달리 밖에 무슨 지적 설계자나 “의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길거리에서도 우리는 우주의 자기 전개, 만들어 가는 의지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인도의 요기 가운데 샤카르는 모든 인류의 역사를 4단계의 순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무인(武人)이 권력을 잡으면 지식인(승려 포함)이 그 뒤를 잇고 다시 재물의 시대가 되면서 부패해져서 노동계급의 폭력이 혼란을 몰아오고 그러면 다시 무인이 등장해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세계사든 어느 나라든, 이런 법칙이 순환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런 순환으로 앞일을 예언해서 그 ‘합리성’을 증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이란의 팔레비 국왕 시대는 무인시대 말기여서 지식인이 등장하게 되어 있는데 거기 마침 호메이니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박정희의 등장과 종교인ㆍ지식인ㆍ학생의 저항, IMF와 벤처, 부동산투기 열풍을 거쳐 노무현 노동시대의 혼란을 거치고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뭔가 무인(武人)적인 강력한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역사는 이성(理性)이 아니라 인성(人性)이 만들어 왔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통틀어 물리적인 힘이나 지적인 능력, 돈 버는 재주, 노동 이런 4가지 인성(人性)의 순환, 되풀이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만약 동양사상에서 주장하듯, 예컨대 화성의 기운을 받은 사람이 무인(武人)이 된다는 식으로 ‘더 큰 질서’가 그 위에 있는 것이라면 어찌하겠습니까? “실체적 진실”은 우리가 전혀 돌아보지 않던 다른 곳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샤카르는 그러나 인류가 오랜 4단계 순환의 되풀이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내밀리고 있다고 합니다. 끝없는 되풀이가 어떤 임계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요즈음 이른바 웰빙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 웰빙은 지난 시대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던 가치와는 좀 다른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연전에 TV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법”이라는 프로가 선풍을 일으켰는데 이것을 누가 웰빙으로 정리한 것 같습니다. 소득 2만 달러가 아니라 스스로 자족하는 삶,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다운 삶이라는 바람이 이 생경한 외래어에 의탁하고 있는 부분에서 또 다른 만들어 가는 의지를 봅니다. 사실 이런 흐름을 올바로 이끌어 낸다면 우리가 직면한 혼돈을 크게 줄여 갈 수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바로 이것을 체제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저들의 삶의 방식(way of life)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깁니다. “영국군은 영국과 영국인의 생활방식을 지킨다”는 식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견줄 한국적 생활철학이 없습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자본주의는 고통 속에서 발전하고 그 고통이 문화로 침전되는 것인데 그 과정이 없어서 이데올로기만 난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화의 부재, 이데올로기의 난무가 “역경(逆境)의 공능(功能)”으로 나타난 것이 웰빙 신드롬입니다. 이 웰빙이 다듬어져서 한국적 삶의 방식이 된다면 그야말로 세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세계에서 인구대비 음식점이 가장 많은 나라는 틀림없이 한국일 것입니다. 요식업중앙회에 등록된 식당만 45만 개소, 인구 백 명에 1개꼴입니다. 간이식당을 더하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농수산물 1년 생산액과 맞먹는 연간 15조가 넘는 음식물이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습니다. 수출주도형 경제여서 주된 교환관계가 국내에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먹고사는 방법이 음식점뿐입니다. 무역대국이라지만 일본은 대외 의존도가 20% 남짓이어서 나름대로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경제의 대외의존도는 70%가 넘습니다. 나라 살림이 밖에 매여 있어서 남 뒤쫓기에 바쁘고 또 이것저것 뭐가 좀 잘된다 싶으면 너도나도 거기 달려든다고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난해 청와대 앞에서 냄비들이 벌인 데모는 의미심장합니다. 장기불황으로 식당에 손님이 줄어서 못살겠다는 것이지만 그들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아무튼 웰빙이 삶의 방식, 생활철학으로 자리 잡으면 이런 밑바탕부터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껍데기뿐인 물질적 풍요의 허상을 밑바닥부터 쓸어 낼 수 있어서 웰빙 신드롬은 아주 소중한 조짐입니다. 조짐, 그것을 읽고 거기 순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만들어 가는 의지와 합일하는 것입니다. 여기가 비어 있기 때문에, 강고한 전통이나 문화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근대합리주의를 넘어서는 사상 문화가 정착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여기가 뿜어내고 있는 남 다른 에너지에서 더 분명합니다.
뭔가 새로운 정체성을 갈구하는 ‘사회심성(社會心性)’은 폭발직전입니다. 사회심성이라는 말은 흔히 쓰이지는 않는 말입니다. 시대정신과는 다른, 인터넷이 만들어 낸 집단 심리의 표출, 이 집단 심리를 이해하지 못해서는 앞으로는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회심성이랄 수 있는 집단심리가 사이버 세계에서 현실로 건너와 국면을 장악해 가는, 영화에서나 있음직한 거기가 여깁니다.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같은 영화에 천만이 넘는 관객이 몰려 든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백만이 관람했다면 영화가 잘 된 것이지만 천만이 동원됐다면 단순한 영화가 아닙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감독도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모두 ‘국가’를 주제로 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어딘가 새로운 것에 귀속하고 싶은, ‘정체성’을 갈망하는 집단심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근대주의에서 벗어날 궁리만을 하는 필자에게는 월드컵의 ‘대~한민국!’은 나라가 제 할 일을 못하기 때문에 시청 앞 광장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외침인 것 같았습니다. 예의 사회심성은 그러나 감정(感情)이어서 뭔가 요구하지만 스스로 해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엄청난 에너지이지만 공명(共鳴)할 줄 알뿐입니다. 대~한민국의 아이디어, 그것을 지금 우리가 만들어 내지 못하면 “만들어 가는 의지”가 나서서 혼돈을 통해, 우리 백성들의 희생을 통해, 거기 이르려할 것입니다. 스스로 자족하는 삶 웰 빙, 새로운 정체성을 요구하는 사회심성, 우리 국민들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대혼돈은 희망을 잉태하고 있어서 여기저기서 희망이라는 낱말이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세계를 통틀어 가장 한심한 반쪽짜리 나라면서 경제적으로나 의식수준에서는 “일류”인 이 괴리, 세계사가 만든 이 모순의 역동성이 지금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7. 한국의 세계화
팬 코리아 이니셔티브
어둠을 밝히는 등불 하나가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팬 코리아 이니셔티브라는 등불입니다. 한국의 세계화. 팬 코리아 이니셔티브, 거기서 우리의 비전과 전략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정체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미래에 세상이 가는 방향에 깃발을 세우면, 사람들은 그리로 밀려오다가 그 깃발을 보고 거기 모여서 힘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낡은 패러다임의 업보(業報)를 도맡아 치르고 있는 우리가 먼저 팬 코리아 이니셔티브에서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면, 근대 합리주의체제를 벗어 던지면, 동북아 일대에 엄청난 파장이 일 것입니다. 미국과 중국, 일본들의 강대국 내셔널리즘이 목표를 잃고 허둥댈 것이 아주 분명합니다. 저들의 게임의 룰을 버리면 김정일의 북한 핵보다 상대하기 더 어려울 것입니다. 앞에서 청와대가 ‘균형자’ 이론을 들고 나온 것을 언급했습니다만 그것은 설익은 것입니다. 세력균형이라는 근대국가 게임 자체를 거부할 때가 되었습니다.
남북은 물론 미국이나 일본 중국 그리고 세계에 흩어진 “우리”를 하나로 하는 팬 코리아 이니셔티브는 우선 에코 이니셔티브입니다. 세계화는 사람의 세계화여서 사랑의 패러다임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적’은 증오의 역학이 아니라 사랑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실천해나가는 에코 이니셔티브를 추켜들면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반전주의들, 아나키스트들, 에코그룹들, 페미니스트들이 공명해올 것입니다. 이들과 서로 연대해서 “게임의 룰”을 새로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팬 코리아 이니셔티브는 당연히 세계를 유기적인 하나로 만들어 가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한국의 세계화’, 팬 코리안들을 모두 모아 거기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길이 있습니다. ‘한국의 세계화’는, 북쪽의 우리들, 일본의 우리들, 중국의 우리들, 하인즈 워드의 우리들이 하나의 단위가 되는 대~한민국은 남북대립, 동서분열의 낡은 틀을 일거에 휩쓸어 버릴 수 있습니다. 통일은 이제 우리의 국가목표이기에는 너무 작습니다. 더구나 나라 안팎 낡은 세력의 파워 게임에 볼모로 잡혀 있어서 거기 매달려 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팬 코리아 이니셔티브는 또 지역화입니다. 유럽공동체가 물론 대표적인 지역화지만, 구소련권 나라들도 사실상 지역화되어 버렸습니다. 중국이 바다를 낀 연안 지역의 경제가 고속 성장하면서 내륙과 경계를 긋고 있는 것도 크게 보면 지역화입니다. 그러나 이런 ‘국가단위’만 지역화가 아닙니다. 세계 도처의 민간공동체 운동도 지역화입니다. 다른 한편 요즘 우리 사회처럼 ‘지방화시대’라든가 ‘행정수도 이전’ ‘지역 균형 발전’같은 것들은 이런 흐름을 잘못 읽은 설익은 것입니다. 지역화란 근대국가권력이 힘을 잃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새로운 모듬살이 틀이라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지역화’에서 나라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워 나갈 녹색 비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어떤 외국인이 벌써 20년 전에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하이테크 풍수지리’ 국가를 만들 수 있는 자연적 인문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패러다임만 바꾸면 이 작은 땅 덩어리를 그런 ‘하나’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조건은 성숙되었습니다. 우리는 또 그것을 이뤄 낼 역량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생태주의 이니셔티브는 구체적인 형태를 갖춰야 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산줄기 분수령을 따라 남한강 북한강으로 모여서 바다로 갑니다. 신수불이(身水不二), 물은 자연에서 대순환하고 우리 몸에서 소순환하면서 생명의 고리를 이어갑니다. 여기 자연과 사회를 자연스럽게 엮을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경기도니 경상도니 하는 구분이 아니라 한강이나 낙동강이 중심이 돼서 물이 순환하는 틀을 만들면 한강 동네, 낙동강 동네의 나무하나 풀 한 포기가 한강 사람, 낙동강 사람과 생명으로 이어져 있다는, 자연과 사회를 잇는 '설정'이 가능합니다. 금강ㆍ영산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백두대간을 트래킹 코스로 만들자는 제안을 했는데 아주 좋은 착상입니다. 나라 전체를 자연과 사회가 유기적인 하나인 틀로 만드는 것이 생태주의적 정체성에서 중요합니다.
다른 한편, 나라 전체의 규모에서 보면 우리나라에는 나름대로 자생력(自生力), 이른바 시너지 효과를 갖췄거나 갖출 수 있는 어반 클러스터(urban cluster, 인구밀집지역)가 네 군데 있습니다. 명지대학의 김석철 교수는 경인지역과 부산대구지역 그리고 포항울산지역 등의 기존 어반 클러스터와 더불어 광양만에서 새만금에 이르는 지역에 황해경제권의 중심축이 되는 어반 클러스터를 당장 만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다시 한강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 등 ‘자연’을 모두 역어 내자는 것입니다.
팬 코리아 이니셔티브는 또 사업입니다. 공자는 “성인이 하늘의 뜻을 돕는 것”을 사업이라고 했습니다. 자원 분배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함으로써 엄청난, 세계규모에서 사상 최대의 프로젝트를 펼쳐 일거에 경제를 세계 최고의 '선진경제'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풍수지리 하이테크”와 더불어 도시와 농촌의 완전 통합과 전국토의 “공원(公園)화”는 대대적 투자경기를 일으켜 농촌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전개될 부동산 폭락을 완충할 수 있습니다. 또 이를 통한 내수(內需)의 활성화로 고용을 늘리는 한편 우리경제의 대외의존도를 줄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경제를 하나 더” 만들지 않으면 살 길이 막힙니다. 일본의 오마에 겐이치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인구 500만에서 1000만명 단위로 개편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라를 쪼갤 수야 없지만 그의 이 같은 주장의 근거도 그가 근대국가의 와해를 주장하고 있는 만큼 비슷한 맥락일 것 같습니다.
산에서 사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을까요? 무조건 ‘출입금지’로 일관할 것이 아니라 국토의 70%에 달하는 산지, 자연을 내놓아야 합니다. 산지의 활용은 어려운 것 같지만 간벌(間伐) 하나면 끝납니다. 경치가 좋다는 것은 나무와 물입니다. 나무를 잘 자라도록 간벌을 해서 하늘을 찌를 듯 울창한 거목들이 자라고 그 밑에 냇물도 도도히 흐르게 되면 우리 산야는 어디나 공원입니다. 여기 다시 새로운 산지농업(forest farming)을 펼쳐 산나물과 약용식물 등 갖은 야생초들이 다투어 비집고 자리 잡게 하면 거기가 “제2의 경제” 현장일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의 산은 칡넝쿨이 아주 점령을 했습니다. 고속도로 연변이든 깊은 산 속이든 나무나 숲이 도처에서 칡넝쿨을 뒤집어 쓴 채 죽어 가고 있습니다. 50, 60년대 우리 산야는 헐벗고 메말랐습니다. 산성 토양으로 하얗게 바랜 민둥산에 비루먹은 짐승처럼 비틀어진 소나무들, 이들은 차라리 우리의 표상(表象)이어서 슬펐습니다. 서울농대의 유달영 교수는 그 비루먹은 소나무들을 사람에 비유했습니다. 누대(累代)에 걸쳐 척박한 환경에서 낙락장송은 사라지고 점점 더 열성인자만 남는 것이 우리 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70, 80년 대 산을 그대로 놓아두어서 조금은 숨을 쉴 만해지니까 이번에는 공해와 이상 기온으로 칡넝쿨이 쳐들어 왔습니다. 비유가 아니라 오늘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과 유령처럼 칡넝쿨을 뒤집어 쓴 산야는 하납니다.
김지하 시인은 주말마다 전국의 도로를 가득 메우는 나들이 행렬을 가리켜 유목민이라고 했습니다. 주말 고속도로의 자동차는 늘 30만대를 웃돕니다. 라틴어의 oicos는 economy면서 또 ecology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한편 집입니다. 주말마다 전국을 뒤덮는 이 행렬은 ecology, 자연에서 집, 마음의 고향이라 해도 좋은, 집을 찾는 행렬입니다. 이 에너지가 국토 공원화의 경제(economy)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경제 전문가들에게 이런 주장을 하면 무슨 성장 잠재력을 마모시킨다든가 인플레를 일으킬 것이라든가 하는 낡은 법칙을 들고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종래의 갖가지 경제학의 경험법칙은 이제는 폐기하고 당장 ‘과잉시대의 경제학’을 연구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패러다임 시프트, ‘세계화’를 주의 깊게 살피면 거기서 살 길이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중국이 벌써 20여 년 동안 지속적인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이나, 요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형편이 크게 나아지는 것들은 세계화 이전의 국제 정치 경제 질서 아래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한국과 시베리아를 “생태 축”으로 연결하는 것도 지역화입니다. 다음 국면에서 무너져갈 분단체제를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경제 틀, 동북아의 여러 지역과 더불어 사는 틀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동북아 생태주의 전략에서 핵심은 2가지입니다. 첫째는 국제적 조건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며 둘째는 동북아경영의 정치 경제 생태적 의미를 올바로 정립하는 일입니다. 고르바초프의 경제브레인이었던 샤탈린은 90년대 초 세계자본의 3분의1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을 겨냥하고 4천5백억 달러 규모의 시베리아 개발계획을 세웠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산된 이유를 그 무렵 <비즈니스 위크>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냉전이 끝나자 누구나 미국과 일본이 소련과 중국을 자본주의 시장으로 조직해 나가는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측했지만 전혀 그 같은 움직임이 없다, 아마도 한 10년쯤 뒤 세계의 금융자본이 깨져나간 후 시장 확대에 나서는 산업자본이 나타나게 될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이 예측은 대체로 맞아서, 아직도 미국이나 일본이 구소련 권이나 중국으로 진출하려는 본격적인 움직임은 없습니다만 아마도 그런 움직임은 앞으로도 없으면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종언을 고할 가능성이 더 큰 것 같습니다. 금융자본의 세계지배가 다시 산업자본 쪽으로 간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는 ‘전제’가 깨져서 그의 이론을 ‘수정(修正)’하느라 바쁠 것입니다만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로서의 금융자본주의라든가, 국가의 소멸(消滅)들은 수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미국과 일본이 러시아와 중국을 잠재적인 적이 아니라 마샬 플랜식의 시장 확대로 간다는 것은 국가주의의 자기부정과 연결되지 않는 한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동북아 경영에 대해 미ㆍ일이 견제할지는 모르지만 경쟁에는 소극적이며, 또 러시아가 아니라 시베리아라는 ‘지역’이 당사자능력을 갖고 있어서 지역 협력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또 세계의 금융시장에서 자본을 구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에 성사 가능성이 큽니다. 시베리아 그 드넓은 대지 위에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더불어 사는 방법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서양의 그린피스나 녹색당들이 좀처럼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근대합리주의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환경이 잘 정비된, 더구나 합리주의의 본산인 유럽은 일원론적 생태주의가 자랄 토양이 아닙니다. 동양사상의 전통 위에 서양합리주의가 고통으로 단련시켜 에너지를 응축시킨 이 땅이 아니면 어디서 진정한 생태주의 국가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인가? 정체성(正體性), 만들어 가는 의지가 어렵사리 만들어 가고 있는 아이덴티티(Identity), 거기 일치하지 하려는 노력 없이는 이 대 혼돈을 거두어 낼 수가 없습니다.
8. 직접민주주의.COM
세계 최초의 직접민주주의 “사이버 코리아 닷컴”은 새로운 정체성을 요구하는 사회심성에 뿌리박고 정치대란을 먹고 자랄 것입니다. 네트워크 코리아와 녹색 비전이 두 기둥입니다. 두개의 기둥이지만 “한국의 세계화”의 서로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탁월한 정치적 상상력들이 모여서 이들을 실현하는 아젠다를 설정해 나가는 사이버 코리아를 “건국”하자는 것입니다. 그 첫 작업은 팬 코리아 페스티벌이 될 것입니다. 사이버 코리아의 건국과 페스티벌은 참여 네티즌들이 직접 조직해 나가는 것입니다. 무슨 명망가들을 동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불꽃으로 요원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철저한 대중노선 정치, 구체적으로는 광범한 중산층이 직접 나서는 정치가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한편 직접민주주의의 구체적인 일상의 모습은 언론과 운동을 통합한 이니셔티브입니다. 새로운 형태의 언론활동입니다.
1. 언론환경
한국의 신문이 붕괴과정에 들어갔습니다. 조선 중앙을 제외하고는 모두 회복이 불가능한 경영위기에 함몰한지 오랩니다. 조선 중앙도 지금은 네이버, 다음 등 포털에게 압도당한 채 헤어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종이 신문은 끝났다”고 합니다. 누구나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그것이 유통되면서 기자라는 직업이 사라졌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인터넷이 쳐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이미 한국 신문의 붕괴과정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유독 한국 신문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이 위기는 우리 언론의 독특한 성격에서 온 것입니다. 언론이 아니라 권력이어서 경영논리가 아니라 정치논리, 우리 사회의 권력이 해체되고 있는 데 따른 현상인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정치논리를 꿰뚫는데서 새로운 언론은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의 신문은 다른 나라의 신문과는 태생적으로 다릅니다. 우체국에 다니는 소년이 동네에서 벌어지는 대소사를 등사판으로 긁어서 편지와 함께 배달한 것이 효시가 되었다는 식의 서양 신문과는 달리 우리 신문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 수단으로 출발했습니다. 3.1운동이후 이른바 문화통치, 영국식 간접통치방법을 도입해서 토착세력을 권력구조에 편입한 것입니다. 우리 신문은 처음부터 권력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권력으로 기능한 것은 해방공간에서 동아일보-한민당이 정권을 세우는 데서 그대로 들어납니다. 다시 군과 재벌 외세가 결합한 박정희 체제아래서 권력의 홍보기능을 담당했던 이들, 특히 조선일보는 80년대 후반 이른바 보수대연합에서 권력의 핵으로 진입합니다. 이 시기는 조선일보가 독주한 시대였습니다. 정치권력과 파워게임을 벌이면서 그 영향력으로 광고 수입이 폭증, 중소기업이지만 이익규모에서는 5대재벌 규모의 경제력을 구가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신문들이 국면을 주도하는 조선일보의 영향력은 간과한 채 사세확장만을 뒤쫓다가 차례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한편 조선일보도 예기치 못한 벽에 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권력의 한 가운데 서서 파워 게임을 주도, 김영삼 김대중을 차례로 궁지로 몰았지만 막판에 와서는 그것이 권력의 사회 장악력을 약화시켜 부메랑처럼 조선일보라는 “권력산업”도 영향력이 줄기 시작했습니다. 노 정권에 들어서서 보수대연합이 보혁구도로 나뉘면서 이들은 보다 노골적인 형태로 권력게임을 펼치고 있지만 권력의 사회장악력이 극도로 약화되어 저들도 몫을 챙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권력의 내부분열로 영향력도 돈도 말라버린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개혁이 성과를 내서 깨끗해진 것이라면 사회가 이토록 분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도언론은 고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2.인터넷 환경
네이버 등 인터넷 포탈에는 하루 천만 명이 접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문의 주요한 뉴스나 독자에 영합하는 이야기를 간추린 것에 불과해서 거기서 우리 사회의 움직임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정치판 변두리에서 대통령 감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탈에 몰린 것이 사회심성이여서 이들이 대답을 내놓지 못하면 포탈의 장악력도 쇠퇴해 갈 것입니다. 뭔가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 분명해서 바로 그 뭔가를 자임하고 나서야 합니다. 언론의 정치적 기능, 부정적이긴 하지만 정상적인 나라와는 다른 사회구성체여서 불가피한,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기능을 어디선가 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람직한 이니셔티브는 정치 대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요구될 것입니다. 또 인터넷 신문을 표방하는 사이트들은 많지만 낡은 종이 신문 패턴을 답습하거나, 미디어가 아니라 미디어 게임을 벌이고 있는 데 불과합니다. “뉴 미디어”는 아직 없습니다. 사회심성, “사회의 자기조직화”에 지향을 더해 주는 이니셔티브로서의 언론이 나와야합니다. 사이버 코리아.COM이 나와야합니다.
3.새로운 언론의 전략
a. 뉴스 공동체
가장 역점을 둬야 할 것이 뉴스 공동체라는 컨셉입니다. 사이버 코리아.COM은 뉴스공동체입니다. “독자가 기자”라는 발상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이 뉴스 공동체입니다. 우선은 “독자가 만드는 신문”이지만 거기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아 내가 쓴 글이 어디에 실렸다” 같은 수준이 아닙니다. 다중의 마음을 모으고 읽어내서 거기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나가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뉴스를 통한 공동체”는 무엇보다 힘과 비전을 갖춘 공동체를 사이버 세계에 구축하여 변화를 주도할 역량을 축적하자는 것입니다.
b.국민의 알 권리의 회복
우리 사회의 지적혼돈은 이중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도 낡은 논리로 변화에 대응함으로서 혼돈만 키우고 있습니다. 또 제도 언론을 포함한 체제논리가 진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 진정한 국민의 알 권리의 회복입니다. 뉴스를 보도하는 것 이 아니라 그 의미를 캐 가는 신문이 될 것입니다. 언론보도는 누가 옳았나가 다음 날이면 판가름 납니다. 언론계 내부에서 승부가 납니다. 이중구조의 왜곡을 구체적인 사안에서 확인해감으로서 독자들의 지지를 받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지적혼돈을 걷어내는 일은 새 언론의 일차적인 책무입니다.
c. 직접민주주의신문
여의도나 대통령, 제도 언론들이 모두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실제로는 검찰과 경제 관료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사회 활동 전반을 “규제”라는 틀 속에서만 파악하는 이들에 대중을 동원해서 직접 대항하는 신문은 크게 어필할 수 있습니다. 민주 사회라지만 인권이 아닌 민권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존민비”가 사회저변에 그대로 깔려 있습니다. 대로를 막고 음주측정을 하는 나라, 원유의 국제가격이 오르면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나라는 여기밖에 없습니다. 민권을 전면에 내걸고 이런 “생활 속의 민권”을 제기하면 엄청난 힘이 모일 것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또한 중앙 권력의 약화로 행동반경이 늘어난 지방자치와의 정치적 연대도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다양한 아이디어로 이들과 합작해야합니다. 사회 이니셔티브로서의 뉴스공동체가 “한강연대” “낙동 연대”등 생태주의와 결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생태주의적 국토개조를 통한 경제활성화를 이들 지방권력과 도모할 수도 있습니다.
4. 생명사업단 네트워크
사이버 코리아의 한쪽이 뉴스공동체라면 다른 한쪽은 생명사업단입니다. 사업이란 무슨 비즈니스가 아니라 성인이 하늘의 뜻을 돕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생명시대의 징표가 나타났습니다. 장병두 선생님의 “登場”이 그것입니다. 장병두 생명의학은 비유컨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나 양자역학과 같은 것입니다. 진단이나 처방에서 근대합리주의 서양의학은 물론 고루한 한의학을 일거에 휩쓸어 버리고 있습니다. 생명은 homeostasis, 정상으로 돌아가려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염병이나 외과 수술 등 더러 불가피한 부분이 있지만 , 사람을 기계처럼 다루는 근대합리주의 서양의학은 만약 생명의 이런 내재적 힘이 아니었으면 벌써 파탄에 직면했을 것입니다. 근대합리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는 사람을 고치는 병원입니다. 암이나 페 질환, 고혈압과 당뇨로 고생하는 많은 이들이 이제 몸으로 근대합리주의의 파탄을 목도하고 “生命陣營”으로 몰려 올 것입니다. 생명사업단은 중심에 장병두선생님을 옹호하고 생명을 살리는 많은 “사업”들을 네트워킹, 생명사상을 활짝 꽃피우는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내야합니다.
5. 하늘 길 프로젝트
인류의 미래의 모습이 분명한 생명 사상이 우리 주변의 강대국을 극복할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사이버 코리아의 철학적 기반을 한 생명사상에 두지 않으면 사람을 모울 수 없습니다. 사이버 코리아운동은 바로 생명 사상의 대중화, 세계화운동입니다. 다음에 소상하게 소개할 예정이지만, 설악산과 오대산사이에는 100km에 달하는 임도가 장쾌하게 뻗어 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樹海와 東海가 그림 같은 곳입니다. 네티즌들이 모여 상상력을 펼쳐 갈 터로서 우리나라에서 여기만한 스케일이 없습니다. 온 라인 조직을 오프라인으로 뭉쳐 갈 母胎로 손색이 없습니다. 사이버 코리아의 “도읍지”가 될 것입니다.
6. 사이버 코리아.COM의 조직원리
“나라를 살리는 대박”은 새로운 정체성을 요구하면서 생겨난 사회심성이 “그래 바로 저거야” 라면서 共鳴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사이버 코리아 닷컴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논증했습니다. 한 두 해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實事求是.
一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