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소금이 잘 되게 해주시고, 우리 마을 잘 살게 해주십시오.” 벌막고사 장면. |
ⓒ 김준 | ▲ 전통소금 ‘자염’ 기능을 가지고 있는 김만수씨. 사등마을에는 자염을 생산했던 노인들이 몇
명 생존해 있다. |
ⓒ 김준 |
김 노인의 얼굴이 오랜만에 활짝 피었다.
그 동안 무엇엔가 쫓기고 있는 얼굴이었다. 내가 김만수 노인을 만난 것은 4년 전이다.
전통소금(煮鹽)의 흔적을 찾아 다니다 문화역사마을만들기 프로젝트와 인연을 맺었다. 생존을 위해 소금을 구웠던 노인과 소금에 호기심이 많은 연구자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모임에 나와서도 늘 조용히 앉아 있다 가시곤 했던 김 노인은 “내 소원은 죽기 전에 소금을 굽는 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렇게 원하던 소금을 직접 구웠다. 소금을 굽기로 한 날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했어요”라며 나를 부른 것이다.
한 가마 구우려면 장작 10짐
샘에서 물(함수)을 떠다 가마에 붓고 정성스레 고사도 지냈다. 김 노인은 24살에 소금 굽는 일을 그만 두었다. 인근에 큰 염전(천일염전)들이 만들어져 자염의 경제가치가 떨어졌다. 소금을 구울 땔감을 구하기 어렵고, 일할 사람도 없었다. 아침 8시에 불을 지폈다. 온몸에서 경련이 일었다. 불을 지피는 손이 떨렸다. 가마에 불이 꺼진 지 60년 만의 일이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그렇게 기다렸단 말인가.
▲ 전통소금 ‘자염’ 기능을 가지고 있는 김만수씨. 사등마을에는 자염을 생산했던 노인들이
몇 명 생존해 있다. 김준 |
|
형님으로부터 소금 굽는 일을 배울 때가 10대 후반이었다. 이제 팔순을 앞두고 있다. 기다렸다는 듯이 불길이 긴 혀를 내밀며 가마 속 아궁이로 빨려 들어간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야 소금이 가라앉기 시작할 것이다. 무엇보다 많은 나무가 필요하다. 옛날에는 한 가마를 굽기 위해 장작 10짐이 필요했다. 가을철에는 물이 싱거워(염도가 낮아) 봄철보다 나무가 많이 필요하다. 1960년대 주변 산들은 온통 민둥산이었다. 소금을 굽기 위해 바다 건너 변산과 격포까지 가서 나무를 해오기도 했다.
모래 섞이 갯벌로는 ‘섯구덩이’ 방식
전통소금 자염은 지역에 따라 생산방식이 다르다. 정확하게 지역보다는 갯벌 형태에 따라 다르다. 펄갯벌인가, 모래갯벌인가, 혼합갯벌인가. 갯벌 형태가 전통소금 생산방식을 결정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염도가 높은 바닷물을 얻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천일염전이 만들어지기 전 이야기다. 유럽이나 중국처럼 암염이나 염정이나 염호가 없기 때문에 바닷물을 끓이는 방법이 유일한 제염법이었다.
전에 KBS에서 방영된 다큐 <차마고도>에서 보았던 소금생산방식은 염정에서 ‘함수’를 얻는다. 그러니 소금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연료가 필요했겠는가. 게다가 소나무가 가장 좋은 연료다 보니 좋은 목재들이 소금 굽는 데 이용되었다. 급기야 조선시대에는 금송(禁松)정책을 추진해 소나무를 베는 사람을 큰 죄로 다스리기도 했다.
 |
 |
▲ 당그레로 소금을 긁는 김 노인의 얼굴에 땀이 흐른다. |
ⓒ 김준 |
 |
 |
▲ 밤새 소금가마에 소금이 하얗게 내렸다. 노인은 뜬눈으로 가마를 지켰다. |
ⓒ 김준 |
서해안 갯벌에서 함수를 얻는 방법은 태안의 ‘통자락’, 신안의 ‘섯등’, 고창 ‘섯구덩이’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지역으로 소금 굽는 방법을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같은 해역 갯벌에서도 섯등과 섯구덩이 방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태안에서도 ‘통자락’과 ‘갈개조금’ 방식이 존재한다. 시화호 인근 경기만 갯벌에서도 섯등 방식으로 소금을 굽기도 했다.
김 노인이 사는 고창 사등면 심원리 검단마을 갯벌은 모래가 많이 섞인 갯벌로 섯등을 쌓아 올릴 수 없다. 그래서 구덩이를 파서 함수를 얻는다.
사흘 조금 동안 소금 구워 논 서마지기 마련
김 노인은 올해 78세다. 1940년대로 기억했다. 형님과 함께 사흘 조금 동안 소금을 구워 논 세 마지기를 샀다. 소금 값이 금값이었다. 조금이란 물이 염전에 들지 않는 때(물때)를 말한다. 음력으로 8일과 23일을 전후한 시기를 조금이라 한다.
사등리 사람들은 소금밭이 없어도 ‘한조금’ 일을 하면 일한 대가로 한 가마 물을 얻을 수 있었다. ‘한조금’이란 염전에 물이 들지 않는 일주일 정도를 말한다. 소를 빌려준 경우 나흘 일하면 한 가마 물을 준다. 이렇게 염전이 없어도 물을 얻어 소금을 구웠다.
사등 검단마을에 벌막이 7개 있었다. 가마 한 곳에 쌍가마가 있었기 때문에 가마는 8개였다. 서로 순번을 정해 가마에 물을 넣고 불을 지폈다. 염전 일이 다른 일보다 벌이가 좋았기 때문에 사등 사람들은 물론 인근 주민들도 염전 일을 많이 했다.
|
 |
▲ 소금을 굽는 벌막. |
ⓒ 김준 |
|
 |
▲ 소금가마에 불을 붙였다. 60년 만에 굽는 소금이다. |
ⓒ 김준 |
사등마을은 검당·사등·죽림 등 세 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소금은 검당마을을 중심으로 생산했다. 해방 전후 소금을 굽던 검당에만 300여 호가 거주할 정도로 번성했던 마을이다. 지금은 10여 집만 남아 있다. 심원면에서는 사등 외에 만돌, 수다 지역에서 소금을 구웠으며 부안 지역에서도 소금을 다수 생산했다.
당그레로 소금을 긁는 김 노인 얼굴에 땀이 흐른다. 벌막 옆에서 꼬박 날을 샜다. 아침 해가 밝아오면서 가마에서는 뽀글뽀글 소금이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불을 낮춰야 한다. 혀를 낼름거리는 불길을 죽였다. 그래야 소금이 산다. 밤새 마당에 눈이 쌓이듯 벌막 가마에 소금이 내렸다. 노인은 그렇게 원하던 소금을 구웠다.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꿈 속에서도 간직했던 소금굽는 기술을 누구에게 전해 줄 것인가. ‘어르신 아직도 할 일이 남았네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이 말을 할 수 없었다. 며칠 후 김 노인이 60년 만에 만든 소금은 선운사에 보은염으로 바쳐졌다.
9월26∼27일 고창 심원면 사등마을과 선운사에서는 사등마을에서 구운 전통소금을 선운사 검단선사에 바치는 1500년 전통의 의례가 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