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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년 가을 동학답사기행 (2)

우금티 상생해원굿이 끝나 뒤 대동풀이 흥겨운 장단이 울려퍼지고 있다




*10월 29일 저녁, 갑사 입구의 녹수장에는 광주, 전주, 목포, 해남 등 호남지역과 대구와 부산, 청주, 공주에서 동학을 공부하고 갑오년 혁명을 이해하려는 많은 분들, 서울에서 내려간 모심과 살림연구소 답사 일행까지 모두 100여 명이 계룡산 기슭에 모여들었습니다. 다음 날 우금티에서 진행할 추모제와 해원상생굿을 함께 치르기 위해, 동학을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다른 지역의 많은 분들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먼 길 마다 않고 모여든 것입니다.


숙소인 녹수장 지하에서 저녁 7시부터 박맹수 소장님의 ‘동학혁명과 생평평화사상’, 표영삼 선생의 ‘동학혁명의 전개과정’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다음은 박맹수 소장님께서 진행하신 강의의 일부분의 요지입니다.



박맹수 소장 표영삼 선생 두 분이 위령탑 앞에서 분향하고 묵상하고 있다




갑오년 혁명 당시 전국 340여개 현 중 170여 곳에서 동학혁명군이 궐기했으며, 박은식 선생의 ‘조선통사’에 의하면 갑오년에만 무려 30만에서 5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당시 인구를 800만에서 1200만 명으로 추산할 때 전국에서 250만에서 350만 명이 동학 혁명군으로 궐기했다는 것인데, 전 국민의 삼분의 일이 동학혁명에 참여했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이 엄청난 일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때 붉은악마를 보면서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05년에 천도교가 합법화 될 때까지 무수히 많은 민중들이 죽임을 당했다. 비가 오면 격발도 되지 않는, 사거리 40,50보에 불과한 화승총이나 농기구를 들고 사거리 400m의 근대식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을 향해 수많은 동학혁명군이 생명을 내던진 것이다.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려는 것이 생명의 본성인데, 그들은 왜 그랬을까. 김지하 시인은 우리 몸 안의 신명과 우주의 신명이 공명할 때 우리는 죽음도 뛰어넘는 엄청난 분출을 하게 된다고 했다. 동학의 궐기는 그런 것이었다. 도탄에 빠진, 외국 군대의 총칼에 짓밟힌 나라의 운명을 걱정한 민중들이 죽음을 뛰어넘어 폭발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본질을 구현하려는 절규요 외침이었다.


동학에 대해 몇 가지 오해가 있다. 우선, 동학이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 생겨났다는 주장이 있다. 동경대전에 ‘道則天道 學則東學’이라고 했다. 도(道)는 사상적 원리와 철학을 가리키고, 학(學)은 실천을 위한 학문적 방법론을 말한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동학(東學)은 동국(東國)의 학문이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서학(西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운즉일야 도즉동야 이즉비야(運則一也 道則同也 理則非也)”, 운(運)은 시대적 상황, 도(道)는 보편적 원칙, 이(理)는 특수한, 개별적 대응 논리라고 볼 때, 서학(西學) 즉, 기독교나 천주교와 동학은 모두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점은 같지만 이를 해석하고 대응하는 양식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다음은 동학은 유불선(儒彿仙)과 서학(西學), 민간신앙까지 모아서 만들어낸 종교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어떻게 이것저것을 합쳐서 비빕밥처럼 어떤 종교가 만들어 진다는 논리가 성립이 되겠는가. 동학은 일관된 사상체계로 세계를 독창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부산에서 온 임현미 님의 초혼




갑오년 혁명은 동학이 가지고 있던 원대한 후천개벽의 꿈, 계획의 일부분, 하나의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수운 최제우 선생에 대해서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선생의 부친 근암공은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학자였다. 선생이 태어난 경주지방은 안동 등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였고 근암공이 교류한 유학자들이 무려 40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여강 이씨 회재 이언적 선생이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이분이 퇴계 이황선생에 닿아 있었다. 또한 경주는 신라 천년의 꿈이 담겨 있는 지역이었고, 경주 남산은 불교적 이상향을 실현한 곳이었다. 수운 선생은 근암공에게 재가한 한씨(韓氏)의 소생이었다. 총명해 부친의 총애를 받았지만 신분적 제약 때문에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한 때 응시가 허락된 무과를 준비하기도 하고 10여년 동안 장사길을 방랑하기도 했다. “용담유사”에 ‘군불군(君不君) 신불신(臣不臣) 부불부(父不父) 자불자(子不子)’, 임금이 임금이 아니고 신하가 신하가 아니며 아비가 아비가 아니고 자식이 자식이 아니라는 말은 파괴된 질서와 시대적 혼란상을 묘사한 것이기도 하고 수운 선생이 겪은 고난을 반영한 문장이기도 할 것이다.


수운 선생은 유교적 학문전통과 경주라는 지역의 불교 문화적 배경이 토양이 되고 시대적 혼돈과 감당키 어려웠을 신분적 제약등에 영향을 받았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고난이 자극이 되어 수련에 정진 하게 했고 이를 통해 위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해월선생은 수운선생보다 세 살 어린 1827년생이다. 해월선생이 안계셨다면 수운선생 역시 역사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수운선생의 깨달음을 현실화 시킨 분, 존재할 수 있게 한 분이 해월선생이다. 동학에서는 포교(布敎)가 아니라 포덕(布德)이라고 한다. 덕(德)은 도(道)를 행하는 것이다. 해월선생은 수운선생이 1861년에 깨닫고 3년간 포덕하다 1864년에 처형된 뒤부터 1889년까지 무려 38년 동안 관군에게 쫓기며 경전을 간행하고 설법을 행하고 조직을 만들면서 동학의 기틀을 닦았다.


1864년 수운선생이 처형될 때 주요 핵심 지도자들이 함께 처형되었고, 겨우겨우 재건의 기틀을 다지다가 1871년, 요즘 분류로 치면 직업적인 혁명가랄 수 있는 이필제가 주동이 된 영해 신원운동 때문에 또다시 30여 명이 처형되는 어려움 속에서 ‘고비원주(高飛猿走)’의 도피 생활을 계속하며 전국 200여 곳에 동학의 비밀포교지를 만들었다.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훨씬 더 많은 곳에 조직의 씨앗을 퍼트렸을 것이다. 동학사상을 사회화 하고 조직을 전국적으로 재건한 것이 바로 해월선생의 힘이었다.




해월선생이 사람을 키우는 방식


해월 선생은 손천민 손병희 서장옥 같은 제자들의 성장을 위해 꼭 데리고 다니면서 함께 수련하는 방법을 택했다. 1890년에 서장옥이 구속되었을 때 선생은 온종일 비를 맞고 걸은 뒤에도 이불을 안 덮고 한뎃잠을 잤다고 한다. 옆에서 아무리 권해도 ‘서장옥이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따뜻한 잠을 잘 수 있겠는가’ 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제자들이라면 과연 스승을 위해 목숨이라도 걸고 싶지 않겠는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가능한데, 우리는 혹여 ‘進步萬能’, 당위성만을 앞세우는 우를 범해오지는 않았는지 다시 돌아보게 한다.





*이어서 표영삼 선생님의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짧은 시간에 동학에 대한 세간의 오해 몇가지에 대해 핵심을 간추려 간결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다음은 표영삼 선생님의 강의 중 일부분의 요지입니다.




동학혁명은 입헌군주제를 통해 민주정치를 추구했다


동학은 신분제를 타파하고 입헌군주제를 추구했다. 1861년 깨달은 이후 신분제를 타파할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 포덕 이후 처음 맞은 수운선생 생일날 행한 첫 설법에서 ‘사람이 곧 하늘이니 귀천을 타파하자고 하셨다.


1893년 원평과 장내리에 3만 명이 모여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외칠 때 ‘외국에는 민회를 구성해 나라의 주요 정책을 의논하는데 우리가 바로 민회(民會)다’ 라고 밝혔다. 이후 손병희 선생이 진행한 진보민회(進步民會)등 근대적 단체운동 등이 추구한 것도 동학이 추구한 정체(政體)가 왕을 형식적으로 유지한 근대적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후 일본공사관에서 취조를 받을 때도 혁명에 성공하면 무엇을 하려고 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나는 농사를 지으러 돌아가고 현명한 사람들을 뽑아 협의(協議)해서 합의(合議)하게 하려고 했다’는 진술을 한다. 이 점도 동학혁명이 의회주의를 추구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동학이 내 건 보국안민창대의(輔國安民倡大義)의 보국(輔國)은 그냥 나라를 지킨다는 보국(保國)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잡도록 돕는다는 보국(輔國) 뜻이다.

동학은 미래사회에 대한 꿈, 이상으로 ‘사인여천(事人如天)’사람 대하기를 하늘님 대하듯 하는 세상을 추구했다. 이 꿈을 위해 우선은 ‘보국안민’이 필요했다. 보국안민은 이상세계로 건너가기 위해 현실에서 추구하는 징검다리였던 것이다. 우선은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해서 이상사회로 가자는 것이다.


동학은 결정론을 부정한다. 역사는 예정된 결론에 운명론적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역사란 인간의 꿈을 실현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보국안민은 동학의 이러한 역사관을 반영한 말이었다.




남북접 갈등설은 잘못된 이해, 목숨을 걸고 하나가 되어 싸웠다


학자들은 흔히들 남북접의 갈등이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 전봉준장군의 진술에서도 ‘남북접은 편의상 붙인 말일뿐 따로 구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문서자료에도 보면 ‘대접주임장(大接主任帳)’ 이라는 표현이 있을 뿐이지 남북접을 구분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1894년 일본이 궁성을 점령하고 7월에 일본군이 청일전쟁에서 청군을 격파하는 등의 정세 등을 살피면서 처음에는 ‘신중하게’ 궐기해야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9월 18일 기포령을 내린 이후로는 해월 선생은 의암 선생에게 전봉준 장군과 협력해서 외적을 몰아내라고 명령하고 함께 일본군 관군에 맞서 싸운다.


관변기록에도 이인역 앞에 있는 취병산에 손화중(손병희선생을 오기한)부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에도 알 수 있듯이 손병희 선생이 이끄는 경기지역의 동학혁명군은 12월 17일 북실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전봉준 장군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다. 갈등과 대립이 있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겠는가.





*두 분 선생님의 강의가 끝난 후 각 지역에서 오신 분들 소개 시간이 있었습니다. 호남 지역에서 꼬박 일 년 동안 박맹수 소장님과 함께 매월 동학유적지 답사 공부를 진행해온 호남 생명과 평화의 길에서 오신 목포, 광주, 해남, 정읍 등에서 오신 많은 분들, 그리고 대구와 부산에서 오신 분들, 서울의 생명과 평화 길, 그리고 모심과 살림연구소 강좌에 함께 참여하신 분들과 한살림 조합원 실무자분들까지 100여 명에 달하는 많은 분들이 동이 터 올 때까지 이야기 꽃을 피우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음 날 새벽,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신 분들은 계룡산 자락에 깃들어 있는 갑사 경내를 산책하면서 고요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침 9시, 일행은 우금티로 향했습니다. 우금티는 혁명군의 비원이 서린 곳입니다. 어쩐지 하늘도 음울하게 낮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우금티 위령제는 목포의 극단 갯돌과 청주의 씨알누리가 함께 진행해주셨습니다.


열림굿으로 시작한 위령제는 몸 안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들 스스로를 향해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상차림을 거쳐 전국의 참석자들이 들고온 각지역 막걸리를 하나로 섞은 합환주를 동학혁명의 영령들과 위령제 참석자들이 함께 나누어 마시는 의식을 거쳐 서울 한살림 김민경 부이사장님이 추모사에 해당하는 심고(心告)를 거쳐 표영삼 선생과 박맹수 소장이 위령탑 앞에 분향하는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상생해원굿이 끝난 뒤 참석자들이 서로를 포옹하고 있다




모두를 마음으로 흐느끼게 만든 해원굿


뒤 이어 진행된 해원상생굿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흐느끼게 만들었습니다. 부산에서 온 임현미씨의 초혼(招魂) 춤은 격정을 분출하는 폭발적인 몸동작과 안으로 갈무리하는 절제된 동작이 이어지면서 붉게 물든 견준봉의 단풍을 배경으로 경탄스러운 장면들을 연출해 사람들의 탄식을 자아냈습니다. 목포의 극단 갯돌과 청주에서 온 씨알누리는 초혼의 춤에 화답하듯 갑오년에 희생된 선조들의 처연한 모습을 재현했습니다. 상처와 고통을 스스로 닦아내며 서로 부둥켜안고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염원을 표현한 한판 굿이 벌어지는 동안 사람들은 소리내 흐느끼기도 하고 슬픔을 지긋이 눌러 삭이느라 애를 쓰는 표정들이었습니다. 원과 한을 풀듯, 흰 무명을 가르는 의식으로 해원 굿이 끝났습니다.



이어서 힘찬 풍물소리와 함께 대동풀이 한 마당이 이어졌습니다. 원혼들을 상징하듯 종이로 오린 사람들을 촛불에 태워 하늘로 재를 날려 올리고 제상에 차려졌던 음식을 음복하고 팔도 막걸리가 뒤섞인 합환주를 나눠 마시면서 전국 각지에서 온 서로를 포옹했습니다. 사회를 맡았던 광주 녹색연합의 정호 사무국장님이 ‘이제 우리 서로 미워하지 맙시다’ 하던 이야기가 가슴이 와 닿았습니다.


위령제가 끝난 후 다함께. 공주 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우금티 우측으로 공주를 감싸듯 뻗어있는 견준봉~두리봉 능선을 등산했습니다. 우금티를 넘어 이인쪽으로 뻗은 국도는 한창 확장공사가 진행중이었습니다. 이 공사가 끝나면 우금고개에는 터널이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1973년에 위령비가 우금티를 넘어 공주 쪽에 세워진 것은 그토록 많은 희생자를 내고도 결국 우금고개를 넘지 못했던 수많은 동학혁명군의 넋이라도 위로하자는 뜻에서 그랬다고 합니다. 금방 때 이른 눈발이라도 흩날릴 것 같은 음울한 날씨에 아직 공사중인 터널을 통과해 견준봉 들머리에 섰습니다. 큰 느티나무 당목에 오색천이 휘감겨 있습니다. 숱한 원혼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자리라고 여겨졌습니다. 견준봉 오르는 길은 당목 곁으로 뻗어있는 오솔길을 들머리로 잡아 시작합니다.



1973년에 세워진 위령탑에는 박정희의 은혜로 위령탑을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민중들이 돌로 쪼아 박정희의 이름을 짓이겨 놓았다.




통한의 우금티 전투


혁명군이 공주성 2차 공격에 나선 것은 11월 8일이라고 합니다. 효포 쪽 곰티를 공략하다 실패한 뒤 경천으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고 공격에 나선 농민군은 2대로 나뉘어 이인과 판치의 관군을 공주 쪽으로 몰아 붙였습니다. 판치의 관군은 농민군의 대대적인 진격에 밀려 효포와 웅치로 후퇴했습니다.


판치의 관군은 곰티까지 밀려났고 이인의 관군도 우금티까지 달아났습니다. 가장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 것은 다음날인 11월 9일입니다. 날이 밝으면서 공주성을 에워싼 혁명군들은 일본군 모리오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과 관군 백낙완, 성하영 부대의 저지선 돌파를 무려 4,50여차례나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무라다 소총과 기관총과 훈련된 정규균의 방어선 앞에 무너져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입니다. 11일까지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졌고 전봉준 장군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노성으로 후퇴해 진용을 정비하고 관군을 향해 연합으로 항일투쟁에 나서자고 호소했다고 합니다. 이미 일본군의 주구가 되어버린 관군들이 여기에 호응할리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이 금산에 있던 김개남이 5,000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11일 회덕과 신탄진을 경유하여 1월 13일 청주를 공격하지만 역시 실패합니다.


전봉준이 이끄는 3,000여명의 농민군은 14일부터 일본군, 그리고 이규태와 이두황이 합류한 관군의 본격적인 추격을 노성에서 논산으로 밀려났고, 11월 15일 논산 황화대에서 마지막으로 접전을 벌이지만 또다시 막대한 희생자를 낸 채 강경으로 패주합니다. 전봉준 장군과 김개남 장군은 11월 19일 재봉기의 출발지인 전주까지 쫓겨갔다가 22일밤 전봉준, 손병희는 고부방향으로, 김개남은 남원방향으로 흩어집니다. 전주에서도 밀려난 혁명군은 25일 금구 원평에서 또다시 희생자를 내고 태인으로 쫓겨갑니다. 27일에는 태인전투가 벌어졌는데, 태인 일대의 농민들까지 가세해 혼신의 힘을 다해 대항하지만 끝내 패하고 맙니다. 11월 27일 혁명군은 해산하고 뿔뿔이 흩어져 도주합니다.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것은 12월 2일이라고 합니다. 다음 해 1월 24일 대둔산 꼭대기서 26명의 최후의 동학혁명군이 항복을 거부하고 사살된 마지막 전투를 끝으로 동학혁명군의 궐기는 끝나고 맙니다.



우금고개가 있는 견준봉 두리봉 위에서 내려다본 공주 시내




동학 혁명이 실패한 뒤, 조선이 어떤 운명의 길을 걸어야 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일행들은 마치 빗발치는 총탄에도 아랑곳 않고 저지선을 향해 돌진하던 동학군의 심정이 되어 음울한 산길을 걸어 올랐습니다. 숲길은 스산했고, 작은 언덕과 골짜기들마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박맹수 소장님, 우금티기념사업회 정선원 사무처장님의 설명처럼 견준봉(속칭 개좆빼기봉)은 정상부분에 가파른 경사로 벽이 둘러쳐진 것 같았습니다. 공주가 천혜의 요새라는 설명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견준봉 두리봉을 넘어 금강이 휘감아 돌고 있는 공주시내를 내려다보며 우금티 기념사업회 회원들께서 공주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철도가 대전으로 나기 전까지 공주는 충청감영이 있던 충청도의 중심지였습니다. 동학혁명군이 공주로 집결했던 것도 서울로 쳐 올라 갈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실패한 혁명에 대한 안타까움, 구국의 일념으로 외세에 대항해 목숨을 던져 싸우다 돌아가신 수많은 민초들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안고 산줄기를 내려서서 경주경찰서 옆 시내에 내려섰습니다. 바로 인근에 하고개에 이어진 송장배미가 있었습니다. 희생된 동학군들이 더러는 산채로 매장을 당하기도 한 논이 있던 자리에는 표지석이 서있는 연못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송장배미 앞에서 각 지역의 일행은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우금티의 함성을 이해하고 기억하며 생활 속에서 구현하려는 사람들의 만남이 앞으로도 이어져야 한다는 말씀들을 많은 분들이 하셨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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