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영화 '바벨'이 사악한 이유
                                    


1. 공간

영화는 네 개의 시퀀스(이야기의 기본 단위)들이 차례로 회전하면서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모로코 미국 멕시코 일본이 시퀀스의 배경이다. 특이한 것은 미국만이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점이다. 즉 미국 시퀀스는 미국땅이 아니라 ‘미국인’이다. 이 때 미국인은 연약하고 슬프고 잘 생겼다. 여행을 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들의 여행은 즐김을 위해서가 아니라 결핍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길 떠남의 형식을 띠고 있다. 브래드 피트-케이트 블라쳇 부부는 어린 아이를 잃은(죽음) 슬픔 때문에 모로코로 패키지여행을 떠났고, 남겨진 자매는 엄마가 총에 맞아 예정된 날짜에 올 수 없게 되자 보모를 따라 멕시코로 나섰다.

모로코 멕시코 일본의 인물들은 자국의 공간에 있음으로 해서 자국과 동일시된다. 미국인은 미국 바깥에 있다. 때문에 그들은 자국의 상징적 대리인이 아니라 개별자가 된다. 세계 최대 강대국 미국의 보편성에서 벗어날 수 있고, 전쟁국가라는 오명에서도 도망칠 수 있다. 그들은 개인일 뿐이다. 연약한 미국, 잘생긴 미국, 슬픔에 쌓인 미국, 총 맞은 미국에 대해 “미국이 갖고 있는 보편적 의미에 어긋난다”고 항변하면 “그들은 개인일 뿐이야”라는 답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그럼에도 항변하고 싶다. <바벨>의 미국은 왜 그렇게 약하고, 잘생겼고, 슬프고, 또 총에 맞았냐고.



2. 인물_아이들

소설이나 영화처럼 이야기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장르들은 극의 초반부에 압축적으로 인물의 성격을 제시한다. 여기서 제시된 인물의 성격은 이후 이야기 전개의 중요한 동력이 된다. <바벨>의 인물들은 어른과 아이(혹은 미성년) 두 층위로 구분된다.

모로코의 어린 형제들은 서로 총을 쏘아 보려고 형제간에 싸우고, 야무진 둘째 녀석은 누이의 알몸을 훔쳐보고 자위행위를 하며, 누이는 그런 동생에게 의도적으로 자신을 노출시킨다. 놀랍게도 이 모든 것들이 첫 시퀀스에서 한꺼번에 제시된다.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에서 관객이 이 녀석들에게 호감을 갖기란 매우 어렵다.

총 맞은 미국인이 모로코의 민간인 마을로 왔을 때 이 마을 어린이들을 잡아낸 카메라의 시선 또한 불편하다. 몸을 눕힌 미국인을 구경하면서 환청처럼 처리된 어린애들의 웃음소리가 역광을 받고 선 검은 얼굴에 덧씌워지는 순간 화면의 질감은 섬뜩해진다.

미국의 아이들은 보모와 귀엽게 장난치고, 전화통에 대고 학교에서 벌어진 사소한 이야기를 아빠에게 말하며, 불을 끄고 자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후 이 아이들은 늘 보호되어야 할 연약함의 상징처럼 묘사된다.

일본의 아이(여고생)는 연약하지 않다. 야물다. 다만 듣지 못하고 말할 수 없어서 슬프다. 그 슬픔을 치유하기 위해 남학생들에게 음부를 노출시키고, 약에 취해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며, 집을 찾아온 경찰에게 말 그대로 벗고 달려든다. 그 아이가 배회하는 도쿄는 한없이 혼란스럽다.

멕시코의 아이는 명시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구조로 볼 때 보모의 조카 청년이 ‘아이’에 해당된다. 그 아이는 닭 모가지를 따 미국 아이들을 놀래키고, 결혼축제의 절정기에 허공에 총질을 해 미국아이들을 거듭 놀래키며, 마침내 음주운전을 하다 도망쳐 미국 아이들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까지 몰고 간다.



3. 인물_어른들

어른들은 다채롭다. 일본의 어른으로 등장하는 여고생의 아버지와 형사는 신사적이고 중후하다. 멕시코의 어른인 보모는 지혜롭고 책임감이 있다. 멕시코의 또 다른 어른인 홀애비는 따뜻한 느낌을 준다.

모로코의 어른들은 ‘폭력’의 화신처럼 보인다. 주인공 형제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총을 쥐어 주고, 나중에 문제가 생기자 소리소리 지르며 아이들 뺨을 때린다. 또 다른 어른이랄 수 있는 모로코의 경찰들은 총을 쏜 범인을 잡는데 민간인을 스스럼없이 팬다. 마침내는 자수권유나 경고사격도 없이 곧바로 총을 쏘아 아이 하나를 죽이기까지 한다.

미국의 어른들, 패키지여행의 동반자들은 이기적이다. 사람이 죽어나갈 판에 에어컨 타령이나 하다가 끝내는 브래드 피트 부부를 남겨두고 떠나버린다. 이 과정에서 제시된 모로코의 어른들은 무능하다. 수의사는 라이터 불에 바늘을 지져 응급수술을 하고, 기괴하게 생긴 할머니는 대마초 비슷한 환각제를 총 맞은 환자에게 건넨다. ‘합리적인’ 어른은 딱 한명, 영어를 할 줄 아는 여행가이드이다.

이웃 멕시코의 어른들에게는 미국을 위해 후덕하게 일하는 ‘엉클 톰’의 이미지가 씌워져 있다. 아시아의 강대국 일본의 어른들은 미국의 파트너답게 제법 믿을만하게 보인다. 미국과 끊임없이 싸우는 이슬람 권역의 모로코 어른들은 불합리 폭력 무능 같은 의미들을 구현하고 있다. 영화는 미국의 욕망, 미국의 시선을 한 치도 벗어나고 있지 않다. 미국의 시선, 욕망은 정당한가? 그거야 알 수 없지만 영화는 분명히 그렇게 하고 있다.



4. 국가로서 미국

주목할 대목은 헬리콥터의 등장이다. 이기적인 미국인 관광객들이 떠난 뒤에, 조금 늦기는 했지만 헬리콥터가 날아와 브래드 피트 부부를 ‘구원’한다.

헬리콥터는 강대국 미국의 상징이다. 영화에서, 특히 베트남전을 비롯한 전쟁을 다룬 영화에서 헬리콥터는 구원의 상징으로 다뤄졌다. 늘 미국을 비판적으로 성찰해 온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퍼펙트 월드>(1993)에서 헬리콥터를 ‘무기력하게’ 묘사한 것도 예의 상징을 역으로 차용했다고 볼 수 있다. <바벨>의 헬리콥터는 보통의 할리우드판 전쟁영화의 프레임을 그대로 활용한다. 석양을 뒤로 하고 마침내 안전한 곳으로 안착하는….

헬리콥터는 미국이라는 국가와 등치되는 상징물인 셈이다. 그러므로 <바벨>의 헬리콥터 시퀀스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특정 개인을 구원하는 것은 그들의 이웃(함께 여행 온 관광객들)이 아니라 대사관, 곧 국가로서 미국이라는 의미망을 구축하게 된다. 사막에서 조난당한 미국의 아이들을 구해내는 것도 헬리콥터다. 연약한 미국人과 강한 미國의 조합, 참으로 멋진 상징조작이 아닐 수 없다.

국가로서 모로코(제복 입은 경찰)는 폭력적이고, 일본(사복 입은 경찰)은 중후하다. 국경톨게이트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국가로서 멕시코는 무능하다.

5. 순진한, 혹은 교활한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만든 <바벨>은, 이 감독의 전작 <아모레스 페로스>(2000)와 <21그램>(2003)의 연장선에 있다. 각기 다른 장소, 사건, 인물들이 마치 나비효과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식의 형식에서 세 영화는 동일하다.(이 같은 형식은 <숏컷>(로버트 알트만, 1993) <매그놀리아>(폴 토마스 앤더슨, 1999)에서 탁월하게 구현된 바 있다.)

내용은 많이 다르다. <아모레스 페로스>는 멕시코를 배경 삼아 폭력 섹스 돈 성공 가족 등 인간사의 기본적 욕망과 질서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다뤘다. 미국이 무대인 <21그램>은 죽음의 문제를 중심으로 인간관계의 절묘함, 개인의 구원, 사랑 등을 ‘관계론적’ 측면에서 다룬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바벨>은 <아모레스 페로스>와 <21그램>의 성과를 ‘글로벌’하게 확장시키려 한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의 발생 지점이 여기이기도 하다.

일국의 범위 안에서 진행된 사건은 멕시코든 미국이든 상관없이(전작 두 편은 실제로 국가가 상관없기도 하다) ‘사건 그 자체’로 들여다보면 그만이다. 하지만 다국이 설정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데올로기 덩어리인 국가를 넘나드는 영화를 만들면서 “나는 인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국-이슬람권’의 전쟁갈등이 첨예한 국면에서 이슬람권역에 해당하는 모로코가 아무런 맥락 없이 그저 특정 장소, 특정 인물로만 기능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감독은 굉장히 순진한 사람일텐데 영화를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새로운 상상력, 관점은 찾아보기 힘들고 이슬람에 대한 미국인들의 보편적 정서에 감독은 교활하게, 거침없이 편승하고 있는 것이다.

교활하다는 것은 그러지 않은 척 하면서 실은 그러고 있다는 이야기다. 균형있는 시선을 갖춘 휴머니스트인 척하면서 실상은 이슬람 문명에 대한 미국인들의 평균적인 이해, 오해, 공포, 증오를 고스란히 담아낸 영화가 <바벨>이다. 멕시코나 일본에 대해서는 조금 눈치를 보는 듯 하나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덧붙이자면 전작 두 편을 이끌어 가는 주요 사건이 교통사고인데 반해 <바벨>은 총이다. 그것도 모로코의 어린 아이들이 미국인이 탄 관광버스에 대고 쏘는. 교통사고는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 ‘우연’의 범주라 할 수 있지만, 사격, 그것도 조준사격은 그것이 아무리 어린애라 할지라도 ‘의지’에 해당한다. 더군다나 감독은 친절하게도 그 사격이 의지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총을 서로 쏘려고 싸우는 장면, 누이의 몸을 훔쳐보고 자위행위를 하는 행동 등은 그들이 충분히 ‘컸다’는 사실을 관객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6. 네 가지 방식의 섹스

모로코의 섹스는 누이의 몸을 훔쳐보는 남동생, 그 남동생의 자위행위로 묘사된다. 멕시코의 경우 아들의 결혼식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가족사진이 걸려있는 집에서 과부 어머니와 이웃집 홀애비 아저씨 간의 섹스가 제시된다. 일본에서는 농아 소녀가 ‘섹스를 찾아’ 불량청소년과 거리를 헤매고 치과의사와 형사를 유혹한다.

미국의 섹스는 아름답다. 총에 맞은 부인이 소변을 볼 수없게 되자 남편 브래드 피트가 팬티를 벗기고 대야를 받쳐준 다음 꼭 껴안고 누인다. 그 전까지 관계가 불편했던 둘은 그 과정에서 슬픔과 환희가 동반된 진한 키스를 나눈다.

인류사회의 보편규범을 지킨 섹스는 오직 미국뿐이다. 그나마 브래드 피트-케이트 블라쳇이라는 최고의 미남 미녀 배우들이 상징적으로 나누는 플라토닉 러브다. 나머지 나라들의 섹스는 근친상간이거나, 유사불륜이거나, 어리석은 충동이다.

7. 문화상대주의

다른 나라, 다른 인종, 다른 계층, 다른 나이 등에 따른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을 감독이 제시했을 수 있다는 반론이 가능할 법하다. 누이의 몸을 훔쳐보는 거나, 닭 모가지를 따는 행위, 청소년들의 약물복용, 과부-홀애비의 하룻밤 사랑을 ‘부정’한 것으로 볼게 아니라 그들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관점.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그들의 맥락에서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윤리주의를 강조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예컨대 누이의 몸을 훔쳐보고 자위행위를 하는 장면이나, 제 음부를 드러내는 행동, 닭 모가지를 따는 행위 같은 경우 <바벨>의 논리구조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같은 음심(淫心)이나 도살 행위는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인데도 유독 미국 아닌 다른 나라의 인물과 공간을 빌어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미국도 충분히 지탄받을만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브래드 피트의 이기적인 모습, 미국 관광객들의 실종된 휴머니즘과 편견, 국경을 지키는 미국 경찰들의 인권침해적인 절차들이 그렇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국이 지탄받을만한 이들 시퀀스에 감독은 ‘그럴만한’ 이유들을 적절히 배치해 놓고 있다.(이유들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보면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8. 두려움에 떨고 있는 미국

대홍수 이후 야훼는 다시는 물로써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노아의 후손들은 야훼를 믿지 못하겠다는 상징적 구조물로 ‘하늘에 닿게’ 바벨탑을 세우기 시작했다. 대홍수와 같은 재난을 피해보고자 하는 실질적인 의도도 있었다. 이에 분노한 야훼는 탑을 건축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말을 여러 갈래로 나눠버렸다. 신에 도전하는 문명의 근원을 문화와 언어의 일치로 본 것이다. 바벨탑 건축은 중단되었다.

소통이 잘되어야 항상 좋은 건 아니다. 획일화된 소통은 파시즘을 낳기도 한다. 획일화된 소통은 그 소통의 변방지역에 있는 자연과 문화, 인종을 불도저처럼 밀어버리기도 한다. 완전한 소통이 불가하듯 불가능한 소통이란 것도 없다. 불완전한 소통이 있을 뿐이다. 이 불완전성에서 예의가 등장하고, 타문화를 이해하려는 상대주의 관점이 나오며, 이질적이고 낯선 것을 접할 때의 즐거운 감정도 탄생한다. 조화를 이루되 똑같아지려 하지 말라는 <논어>의 ‘화이부동和而不同’ 사상은 불완전한 소통을 극복하는 지혜로운 가르침에 다름 아닐 터이다.

이민국가 미국은 인류의 바벨탑이기도 하다. 미국이라는 바벨탑의 동력은 자본주의(문화)와 영어(언어)다. 지금 미국은 미국이라는 바벨탑 건설에 전세계의 자원을 끌어 들이려 시도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과 같은 시스템에 더불어 영어 보급을 통한 ‘마음과 언어를 획일화’시키려는 시도가 그렇다. 화和가 아닌 동同의 논리를 강조하고 있는 모습이다.

소통에 관한 섬세한 성찰처럼 보이는 영화 <바벨>은 은연중에 ‘미국식’을 소통의 표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미국의 문화와 언어로 동하자는 은밀한 제안이다. 홈(Home=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해 불안해하는, 브래드 피트 부부와 그 아이들의 울고 짜는 모습을 보라. 초조해하는 관광객들의 눈빛을 보라. 자신들의 바벨탑, 오직 미국만이 안전하다는 그들의 행동과 심리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영화 <바벨>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의미 있는 징표가 있다면, 그것은 ‘집 바깥’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미국이다. 대관절 무슨 큰 죄를 지어서 그들은 ‘집 바깥’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일까.

글=이정우(자유기고가)


"전라도의 힘 전라도닷컴을 지켜주세요" >> 전라도닷컴 후원 신청하기 <<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TAG
more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