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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행석
‘프로그램을’ 매개로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고운정 미운정 들고,
헤어지는 광주MBC PD입니다.
현재 광주MBC <신얼씨구학당>을 만들고 있습니다.

“놈의나 낭군은 다 오는데 우리나 내 낭군은 왜 안온가”
김수례 할머니의 기다림의 노래 <해방가>

▲ <新얼씨구학당> 제작현장에서 <…놈의나 낭군은 다 오는데 우리나 내 낭군은 왜 안온가…>
. 실망과 낙담이 굽이굽이 쌓인 한의 노래 <해방가>를 풀어놓는 영광의 김수례 할머니.
ⓒ 윤행석

기다림이라고 해서 다 애틋함과 설레임의 감정을 동반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우리집이 서방님은 명태잡이를 갔는데/ 바람아 불어라 석달 열흘만 불어라” <아리랑타령>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가사다. “서방님이 오신다고 꾀를 벗고 잤더니/ 문풍지 바람에 감기만 들었네” 누군가가 우스갯소리로 만들어냈을 법한 노랫말. 이 역시 기다림의 노래이긴 하다.

“제주도 한라산 상산봉에 칠성포를 걸어놓고/ 본가장(본남편)만 죽으라고 삼시야 불공을 드렸더니/ 본가장은 아니나 죽고/ 눈에 맞은 샛서방이 병이 들어서 죽게 됐네/ 비녀 폴아 반지를 폴아 음산에 보약을 지어다가/ 앉어 종신 서서 종신 석달 열흘을 종신하다/ 무정하난 새복잠(새벽잠)에 샛서방 간 줄을 내 몰랐네…”(벌교읍 연산마을 장서운심 唱)

부부유별(夫婦有別)의 봉건적 이데올로기로부터 한참 멀어져 있는 현대사회에도 사실 이처럼 과감한 일탈욕구를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은 노랫말이다. 웬수 같은 서방이 죽기를 기다리는 부인의 저주심이 섬뜩하다. 만든 노랫말이라고 하지만, 이런 류의 기다림을 갖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또 얼마나 황량한가.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낭군 가슴에 묻는 노래
이런 기다림도 있다.
4번째 방송 출연. 이 정도면 ‘닳아질’만도 하련만 김수례 할머니(86)의 모습은 한결같다. 왕년의 소리꾼들을 초청한 <新얼씨구학당 200회 특집방송>에도 갈색 한복을 입고 오셨다. 한복 두 벌 가운데 마을 행사용은 옥색이고 ‘방송 출연용’은 갈색인 모양이다.

일제가 식민지 한반도의 양분을 한창 빨아먹을 때인 1923년 영암 신북면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전쟁물자와 종군 위안부를 조선땅에서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있을 때, 17세 큰애기 김수례는 영암 군서면 모정리로 시집을 왔다. 20여 년 세월을 악독한 일제의 지배 속에서 견뎌야 했던 식민지 백성의 곤핍한 삶은 저 대하소설 《아리랑》 같은 작품에서 촘촘하게 묘사한 대로다.

감당해야 할 식구들의 호구를 위해 해외로 팔려가고, 철도공사 인부로 나서고, 한푼 벌어먹고 살기 위해 부산 항구에서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던 시절. 작별과 재회의 땅이었던 부산 항구, 남편을 만나지 못한 애절한 아내의 마음이 노래가 되었다.

“아니 아니 놀지를 못하리라/ 해방이 아니 올지 알었더니/ 일천구백 사십오년 팔월 십오일에 해방왔네/ 놈의나 낭군은 다 오는데 우리나 내 낭군은 왜 안온가/ 영 틀렸네 영 틀렸네 내 낭군 만나기는 영 틀렸네…”
김수례 할머니의 <해방가>는 시원한 기쁨의 노래가 아니라 실망과 낙담이 굽이굽이 쌓인 한의 노래다.

▲ 구불구불 펼쳐진 기나긴 남도길같이 길고 유장한 <육자배기> <흥타령>은 노랫말의 태반이
기다림이요 한풀이다. 기다림의 결과가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은 사연. 속에서 끓이고 삭이다가
끝내 덩어리로 뭉쳐진 정한(情恨)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기다림이 담겨 있다. 사진 속 풍경은
완도 청산도.
ⓒ 김태성 기자

“...영 틀렸네 영 틀렸네/ 내 낭군 만나기는 영 틀렸네/ 가마솥에다 삶아논 개가 어겅컹 짖으면 오실랑가/ 뒷동산 썩은 밤 심어논 밤이 새싹이 나면은 오실랑가/ 병풍에다가 그려논 장닭 두 날개나 치면은 오실랑가/ 영 틀렸네 영 틀렸네/ 내 낭군 만나기는 영 틀렸네/ 부산배에다 이 몸을 싣고 부산 항구를 도착하니/ 거리거리 만세 소리 문전문전 태극기라/ 영 틀렸네 영 틀렸네 내 낭군 만나기는 영 틀렸네…”

그 곡절, 그 사연이 얼마나 깊었기에 노랫말이 그토록 절절한 것일까. 한량을 기다리는 예기(藝妓)의 멋이 담긴 기다림과는 차원이 다른, 하루하루를 끼니 걱정하며 살았던 가난한 아낙네의 기다림.

그 낙담이 얼마나 컸으면 ‘가마솥에다 삶아논 개가 어겅컹 짖으면 올까’ ‘뒷동산에서 싹도 안날 밤에서 새싹이 나면 올까’  ‘병풍에 그려놓은 장닭이 두 날개를 치면 올까’ 하는 마음이 들었을까 말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지는 것, 그렇게 험난한 시대 속에서 홀로 늙으며 살아온 여인의 마음, 민족사가 식민지 백성을 기다리게 한 노래 <해방가>는 그렇게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낭군을 가슴에 묻는 노래가 되었다.

 <육자배기> <흥타령>은 노랫말 태반이 기다림
우리 소리에 녹아든 기다림의 정서는 특히 전라도 민요에서 절절하게 펼쳐진다. 거기에 깃든 느낌은 느리고, 깊고, 진하다. 필경 삶의 굽이굽이마다 사연과 곡절이 많아서일 것이다.
구불구불 펼쳐진 기나긴 남도길같이 길고 유장한 <육자배기> <흥타령>은 노랫말의 태반이 기다림이요 한풀이다. 창자(唱者) 자신의 심경인 것도 같고, 고단하게 살다간 그이네 선조들의 이야기 같기도 한 그 옛노래. 마음속에 아픔이 깃든 사람들이 들을라치면 분명 심리치료 효과가 있을 법한 그 노래.

 “아이고 데고 허허∼ 성화가 났네 헤∼/ 날 버리고 가시었네∼/ 영영 버리고 가시었네∼/ 세상살이 무엇인고/ 나만 홀로 남겨놓고/ 어찌 그리 가셨는고∼/ 몸은 가고 정만 남어/ 애닯고 애달파라/ 나의 심중을 쥐어뜯네 헤∼”(진도 고군면 내동리 한순엽 唱).

“고나∼∼헤/ 추야∼∼장∼(秋夜長)/ 밤도 길더라/ 남도∼ 이리/ 밤이∼ 긴가/ 밤이∼ 허어∼이허∼ 허어/ 길드라∼∼마는/ 임이∼ 없∼는/ 탓이로∼구나/ 나도∼ 언제∼∼/ 알뜰∼한∼/ 임을 만나서/ 긴∼ 밤 짜룹게 샐∼/ 고나∼∼ 헤∼”(진도 임회면 남동리 김송자 唱). 

기다림의 결과가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은 사연. 속에서 끓이고 삭이다가 끝내 덩어리로 뭉쳐진 정한(情恨)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기다림, 그것이 남도민요의 정수라고 하는 <육자배기> <흥타령>인 것이다.

“고나∼∼헤∼/ 공산 명월아∼/ 말 물어∼∼ 보자/ 임 그리다가/ 죽은 사람/ 몇몇이나 되드냐∼∼/ 유정∼ 님∼∼/ 이별∼ 후로∼/ 수심 장탄으로∼∼/ 살 수가∼ 없네∼∼”(진도 고군면 오산리 박정례 唱).

“아이고 데고 허허∼∼ 성화가 났네 헤∼/ 꿈 속에서 보이던 임은/ 신의가 없다고 일렀건만/ 오매불망 그리울 적엔/ 꿈이 아니면 어이 보리/ 저 멀리∼ 멀∼∼리 그린 임아/ 꿈이라고 생각을 말고∼/ 자주자주 보여주면∼/ 너와 일생을 보내련다/ 아이고 데고 허허∼ 성화가 났네 헤∼”(진도 고군면 오산리 김관우 唱).

기다림과 그리움이 뒤섞인 심사, 사람의 속을 후벼파는 이 정한의 노래가 왜 전라도를 대표하는지 짐작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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