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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8일 '여수·순천 사건'(여순사건)으로 순천 일대에서만
민간인 439명이 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으로 사살됐다고...


【서울=뉴시스】2009년 1월 8일 목요일 / 배민욱 기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8일 '여수·순천 사건'(여순사건)으로 순천 일대에서만
민간인 439명이 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으로 사살됐다고 밝혔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에 반발해
여수 제14연대 소속 좌익계열 군인 2000여명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정부는 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인근 지역 민간인들을 대거 사살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1948년 10월말부터 1950년 2월까지
순천시내와 그 일대에서
국군 5개 연대와 순천경찰서 경찰관들은 주민을 불법적으로 집단 사살했다.
민간인 희생자만 439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지만 전체 희생자는 2000여명 정도로 추정된다.



또 당시 군경은 반군에 숙식을 제공했거나 작전 지역에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민간인을 집단 사살했으며,
관련자를 체포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연행과 불법 고문을 자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민간인 희생은 현지 토벌작전 지휘관의 명령으로 이뤄졌지만 최종적인 감독 책임은
국방부와 이승만 대통령, 그리고 국가에 귀속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에 민간인 희생 사실을 공식 간행물에 반영하고
위령사업을 지원할 것을 권고했다.



여순항쟁, 제주 4.3의 이음줄

역사 속으로 2006/10/19 04:48 굴렁쇠


▲ 여순항쟁은 군인들만이 일으킨 싸움이 아니었다.


58년 전의 역사, 제주 4.3과 여순항쟁

일제하 민족운동은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살아갈 통일조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찾아온 것은 두 동강난 분단국가였다. 해방의 감격은 잠시일 뿐, 커다란 절망과 좌절의 불씨를 삼킨 서러운 민족이 되고 말았다. 괴물처럼 아가리를 벌린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대한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1948년 제1공화국의 수립은 민족의 불행을 재촉하는 불씨에 불과했다. 이승만 체재는 불안하기만 했고 위기가 심화될수록 민중저항은 거세졌다.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은 이런 시대상황을 반영한 처절한 민중적 몸부림이었다.

58년 전 오늘(10월 19일)은 제주 4·3민중행쟁의 진압출동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저지하기 위해 전라남도 여수 주둔 14연대 군인들을 중심으로 봉기한 '여순항쟁'이 일어난 날이다. 역사는 이 사건을 '여순반란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직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어 우리 민족의 가슴에 슬픈 역사로 남아 있지만, 이 사건은 제주 4.3의 항쟁정신과 그 뿌리가 닿아있다.

여순항쟁은 지창수·김지회·홍순석 등 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제주도 4.3 진압출동 거부·악질경찰 타도·남북통일 등을 주장하며 봉기한 저항투쟁이다. 2,700여 명의 일반 병사들이 이 투쟁에 동참했다. 군인들이 고립무원의 제주 4.3민중항쟁을 지지하고, 조국을 위해 일으킨 역사적 사건으로서 상징하는 바가 크다.

근본적으로는 이승만 정권이 출범 당시 사회·경제적 조건 및 정치적 상황과 해방 이후 건국에 이르기까지의 전남 지방 정치의 과정에서 발생된 제 조건이 결합하여 폭발한 민중항쟁이다.

주목할 것은 출동을 거부하는 일부 군인들만이 일으킨 싸움이 아니었다. 지역민중들이 함께 깃발을 들었다. 불의에 저항한 이 투쟁은 순식간에 순천·광양·구례·보성·고흥·곡성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확산됐다. 민중의 뿌리는 제주에서처럼 고립되지 않았다.

여순항쟁은 제주 4.3에서 중요한 이음줄이 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제주도의 초강경 진압작전인 초토화 작전을 더욱 강화하는데 디딤돌이 됐기 때문이다. 미군정으로부터 한국정부로 계승된 '빨갱이 소탕정책'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제주 4.3항쟁을 무차별적인 공세로 진압할 수 있는 명분이 됐던 것이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로서는 윤리적 비난을 해소하고 자신들의 전략을 지속하고 강화할 수 있는 호재로 삼게 됐다는 것은 참으로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9일간의 반란, 그 항쟁의 시작

여순항쟁은 어떻게 시작됐는가. 해방 초기, 여수 순천지방은 전남 도내 다른 지방에 비해 진보세력이 많이 있었다. 그렇지만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남로당의 영향력은 미약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1948년 5월 초에 광주의 4연대 1개 대대를 근간으로 하여 여수에 14연대가 창설됐다.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는 반공을 이념으로 분단국가의 출범을 알리는 오욕의 산물이다.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바라는 민중들의 저항과 투쟁은 험난하기만 했다.

14연대에는 진보적인 하사관과 장교들이 많았다. 미군정이 숙군작업을 시작했던 계기는 제주 4.3 민중항쟁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11연대장 박진경 중령이 암살되면서부터였다. 그들의 숙군작업은 정부수립 이후에도 계속 진행됐다. 여수 주둔 14연대에도 파급되어 소위 '혁명의용군사건에 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연루되어 구속되기도 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던 김지회·지창수·홍순석 등의 군인들은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1948년 10월 15일, 14연대장 박승훈 중령에게 육군 총사령부로부터 "제주도에 파견할 1개 대대를 조속히 편성하여 대기하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제주도로 파견할 1개 대대를 편성하는 과정에서 숙군 대상인 병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작업은 극비리에 진행됐다. 연대 본부의 인사 담당 선임 하사관이었던 지창수는 곧바로 좌익 성향의 하사관과 병사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그는 자신이 제주도 파견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창수는 10월 16일 밤, 긴급히 남로당과 연결되어 있거나 이승만 정권에 불만을 품고있던 하사관 그룹을 소집하여 대책을 의논했다. 첫째, 제주도까지 간 다음 제주도의 저항군과 합류하는 것, 둘째, 출동을 거부하고 연대 내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 셋째, 제주도로의 운송 도중 선상 반란을 일으켜 북으로 향하는 것 등이 주요 골자다.

제주도 출항시간이 결정됐다. 1948년 10월 19일 저녁 10시. 10분전쯤에 비상나팔 소리가 울리고 연병장에는 출동 부대와 잔류 부대의 장병 2,700여명이 집결했다. 출동 부대가 총기의 지급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 지창수 선임하사관이 연단으로 급히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외쳤다.

"지금 경찰이 우리한테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 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 통일을 원한다. 지금 조선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

여순항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대부분의 군인들이 동조했고, 이를 반대한 3명의 하사관은 즉석에서 사살됐다. 제주도 출동 부대에 나머지 2개 대대도 합류하여 투쟁병력은 3,000명으로 불어났다. 민주학생동맹 소속 수산학교 학생 23명이 합세하여 이른바 인민군으로서의 편성을 끝마치고 자정 무렵 여수 시내로 진격해 들어갔다. 극우세력들은 처단됐고, 경찰서와 군청에는 오전 10시경부터 보안서 및 인민위원회가 구성됐다.

항쟁의 확산을 위하여 순천으로 출발한 주력부대는 오후 3시경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순천을 점령한 저항군은 3개 부대로 재편성하여 주력 1천여 명은 구례·곡성·남원 방면으로 가기 위해 학구 쪽으로 진격해 나갔다. 일부는 광주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벌교·보성·화순 방면으로, 나머지 일부는 경상도 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광양·하동 방면으로 진격해 나갔다.

제주도 파견거부 병사위원회는 여수읍내 곳곳에 성명서를 부착했다. 성명서에서 병사위원회는 "외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조국을 수호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정부를 팔아먹으려는 이범석· 이승만 등을 처단하기 위하여 봉기를 일으켰다"고 밝혔다.

또한 병사위원회는 "제주도 인민들은 제국주의 정책에 대항하여 지난 4월에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며 조국을 수호하는데 목숨을 바치고 있다"고 밝히고, "여수에 있는 모든 장병들은 제주도 인민들을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며, 앞으로도 제주도 파병에 응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10월 20일, 여수 시내는 약 3만 명의 군중들이 모여 인민대회를 개최하고 '여수인민위원회에 의한 정권 장악'을 선언했다.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즉시 실시한다"를 주장하며 이승만 정권에 대해 투쟁의 깃발을 올렸다.

항쟁은 급속히 확산돼 나갔다. 경찰관 및 우익 인사들이 화를 모면하려고 줄행랑을 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른 지방 토착 진보세력들은 군중을 이끌고 경찰서를 공격하는 등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길이 타올랐다.

▲ 우리의 근현대사는 피의 역사였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여수·순천민중학살

이승만 정권에게는 적지 않은 정치적 위기였다. 이승만은 38선 경계병력을 제외한 남한의 모든 군대를 진압군으로 편성했다. 육군총사령부는 10월 21일 반군 토벌 총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고 (그러나 실질적 임명권은 미군이 쥐고 있었다) 총 10개 대대의 병력을 동원했다. 그리고 여수·순천 일원에 초헌법적인 계엄령을 선포했다.

진압작전은 2단계로 실시됐다. 1단계는 순천을 탈환하는 것이었고, 2단계는 광양 방면의 반군 주력을 섬멸하는 것과 여수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이 진압작전에도 미군이 개입했다. 이날(10월 20일) 국방부장관과 군 수뇌부와 함께 긴급회의를 가진 미군은 광주에 토벌사령부(Task Force)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봉기 진압을 위해 최신 군사 장비를 지원하는 한편 군사고문단으로 하여금 작전과 정보 분야에서 국군의 '지휘'를 맡겼다.

여순사건 진압작전을 주도한 인물은 제임스 H.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이다. 그는 국방경비대 고문관·미 군사고문단장 고문을 지냈고, 1950년에는 채병덕과 이승만의 군사고문을 지내면서 한국군 형성과정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군장교였다. '학살의 방조자이자 수행자'로 역사에 기억되어야 할 인물이다.

실제 진압작전에는 만주에서 빨치산 토벌 경력을 갖고 있었던 김백일·백선엽 등이 주도했다.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봉기에 미군이 전면으로 맞섬으로써 여순탈환작전은 오래 끌지 않았다. 격렬한 전투 끝에 순천은 이날 오전 11시경에, 여수는 27일 오후에 진압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짧지만 9일간의 무장항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여수·순천이 진압군에 의해 탈환되었다고 해서 이 항쟁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1949년 전반까지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순항쟁은 남한에서 무장유격투쟁이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순사건의 진압과정에서 김지회 등 반군이 패퇴하여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들어가 장기항전을 기도한 것이 남한에서 무장유격투쟁의 직접적인 시발점이 됐던 것이다. 이들에 의해서 지리산유격전구가 형성될 무렵, 제주민중항쟁의 무장대 세력도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도유격전구가 형성됐다.

▲ 여수와 순천을 점령한 군경토벌대는 민간인
부역자를 처단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무자비한
보복테러와 학살을 자행했다.

진압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되고, 인권은 극도로 유린당했다. 여순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아무런 재판도 없이 단지 14연대 봉기에 협력했다는 혐의만으로 국민학교 운동장이나 해안 절벽, 산기슭에서 죽어갔다.

누가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왜 죽어야만 하는지도 분명히 밝히지 못한 채 58년 동안이나 이 사실이 침묵 속에 묻혀 왔다는 사실은 민간인 학살이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국사회와 현대사 속에 깊이 각인된 구조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아무리 죽은 사람들이 죄없이 죽어갔다고 해도 '빨갱이'라는 죄로 죽어갔다면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여수·순천지역 출신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여수와 순천을 점령한 진압군과 경찰은 우익청년단원들과 지방 우익세력의 도움을 받아 반군 부역자 색출에 나섰다. 누가 부역자인지 판단의 객관적 근거가 부재한 상태에서 경찰·우익 인사·청년단원 등 반군 치하에서 가장 피해를 본 세력들에 의해 민간인 참여자의 색출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그것은 보복 테러와 무차별적인 학살로 귀결됐다.

혐의자들에게는 아무런 변호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우익세력의 '손가락 총'에 지목되어 즉석에서 참수·사형되거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법도 제정되기 전에 실시된 계엄령은 항쟁지역의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여 처형할 수 있게 만든 살인 면허장이었다. 그 결과 반군이 들어왔을 때보다 진압군이 점령했을 때 민간인 희생자가 몇 배나 더 발생했다. 무장항쟁에 참여한 1,714명이 군사 재판에 회부됐으며, 이중 866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1948년 11월 말, 봉기로 인한 사상자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진압군 측 군인 141명이 사망하고 263명이 실종되었으며, 391명이 반군에 합류했다. 한편 반군 측에서는 821명이 사망하고 2,860명이 포로로 잡혔다. 전라남도 보건후생부는 사망 2,634명, 행방불명 4,325명으로 발표했고,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실태 조사에서는 1만여 명이 사망·실종됐다고 발표했다.

여순항쟁으로 닥친 위기를 초강경 진압작전으로 돌파한 이승만 정부는 반공사회 구축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 과정에서 여순사건은 반공이데올로기 형성을 위한 주요한 경험과 근거로 작용했다. 좌익세력들에게는 폭력과 비인간성이 강조되고 타도대상으로만 존재했다. 이와는 달리 진압작전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군경, 우익 청년단체원들은 공산주의 위협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애국자로 칭송됐고, 작전이 끝난 다음에는 훈장이 수여됐다. 반공이 애국이며 반공 이외의 것은 자유주의를 전복시키는 불순한 매국집단으로 간주되어 왔다.

여순항쟁은 지역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반군이 들어왔을 때에는 우익 인사와 경찰들에 대한 처형이 이루어졌고, 진압작전 때에는 협력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원한으로 협력자를 지목하여 처형하는 바람에 지역사회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나서면 다친다(=생명을 잃는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진보적 사회운동의 싹은 잘려져 버리고 이데올로기에 일부러 냉담한 태도가 번졌다.

"불행한 역사, 다시 되풀이 할 수 없다"

여순항쟁이 발생한 지 58년이 지났다. 그러나 이 역사적 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요원하기만 하다. 여순항쟁에 대한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체계적인 실체 규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직도 역사의 그늘에 파묻혀 망각을 강요당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우선돼야 하며, 정부는 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 슬픈 우리 역사

그런 다음 희생자 가족에 대한 명예를 회복하고 유족보상을 해야 한다. 제주에서와 마찬가지로 희생자 가족은 반세기가 넘는 동안 억울한 죽음을 공개적으로 토로할 수 없었다. 연좌제의 멍에를 짊어진 것도 똑같다. 제주 4.3의 후손들이 연좌제 족쇄에 묶여 숨을 쉴 수 없었던 시대에 여수·순천주민들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학살사건은 단순히 일회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건이 일단락이 되었더라도 이로 인하여 가해자나 피해자 당사자 및 가족, 지역공동체는 엄청난 심리적·정신적·문화적 충격과 이로 인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놓여 있다.

일방적으로 집단살해를 당하는 지난 58년 동안 원한이 맺혀 있는 경우나 지난 세월동안 살육현장의 광기와 야만을 잊지 못하여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해자의 경우 모두 인간성의 파괴나 해체와 같은 심리적 상처를 안고 살아 왔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탈냉전 시기에도 불구하고 냉전시대의 반공 논리와 멸공의 잣대로 국가보안법 등을 내세워 사회발전에 역행하는 이념논쟁을 부추겨 국론분열을 야기하는 보수우익반공 파벌의 존재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가진 사회적 기반과 정치적 발호를 목도하면서 이들의 존재 근거 그 자체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사건 전모의 제시를 통해 이들의 고백과 회개와 근신을 위해서 지금 국가는 남은 과제를 충실히 해결해야 한다.

그러려면 정부의 시각도 바뀌어야 한다. 지금까지 공식적인 입장은 "반란이 제주도 유격대에 대한 정부의 압력을 덜어 주기 위해서 그 이전부터 신중하게 계획된 것"이라는 시대착오적 역사인식에 머물러 있다. 여전히 토벌과 진압의 정당성과 함께 민간인 학살 자행이라는 국가범죄와 국가폭력,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아무런 사과 표명이나 과거청산 의지가 부족하다. '계획된 반란의 수습과정에서 부당한 법 집행으로 다수 민간인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도대체 그 어디에 존재하는가.

다행스러운 것은 민주화의 진전과 과거청산 작업이 일정하게 진행되면서 지역 출신의 민주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구술 증언과 현장 발굴 등 귀중한 연구조사가 진척되어 반세기동안 어둠에 갇혀 있던 진실의 일단이 밝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다음달 초부터 진상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광주 5.18이나 제주 4.3처럼 특별법이 제정되지는 않았다. 다만 여순사건이 '과거사정리기본법'에 포함되어 초보적인 진상조사가 가능한 상태이다.

그런데 문제가 없지 않다. 턱없이 부족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인력과 열악한 조사권한, 긴밀하지 못한 지방정부와의 관계 및 부족한 예산이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여순사건의 경우 무려 400여건의 신청건수가 접수돼 있는데, 호남지역 모든 사건을 조사하는 담당은 고작 8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여순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철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58년 전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서 저질러진 과거의 서글프고 부끄러운 자화상을 드러내 진실을 말하고 반민족적 죄악에 대해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내려 굴절된 역사를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한다. 민족의 양심을 회복하고, 정통성을 지키고, 잃어버린 민족의 큰 물줄기를 잇는 이 일에 정부와 국회가 발을 벗고 나서야 한다.

역사에는 시효만료가 있을 수 없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80년 광주의 민간인 학살이 어떻게 발생했는가. 일제의 잔재와 친일파를 척결해 내지 못하고 한국전쟁기 전후의 민간인 학살을 방치하거나 눈감아 온 결과에 다름 아니다.

58년 동안 잠들지 못하고 지금도 구천에 떠돌고 있을 여수 순천 영혼들의 넋을 달래며,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남긴 말을 되새기고자 한다.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의 교훈을 아는 민족은 수난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 굴렁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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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실린 사진들은 정부기록물과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자료를 활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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