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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뜨겁지 않게 사는 삶’을 위해
첫 희곡집 《상봉》 펴낸 최기우
남신희 기자  
                                                            

▲ 채만식의 <태평천하>를 잇는 <신(辛), 태평천하>(2005)는 해학과 풍자가 두드러지는 작품.

“참말로 세상에는 한 대 탁, 때려 주고 싶은 추접스런 놈들이 참 많아요” “정말. 그런 놈들 찾아서 귀싸대기 한 대 때렸으면 속이 다 후련할 텐데”….
지난 2001년 무대에 올려진 <귀싸대기를 쳐라>에 나오는 대사다. 어느 시대고 추접스런 놈들은 있게 마련이지만, ‘추접스런 높으신 놈들’ 유난스레 활개치는 요즘 세상 형편에 딱 들어맞아 공명을 일으키는 이 말들이 극의 실마리를 이룬다.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못된 짓 하는 사람들을 찾아 귀싸대기를 때리자며 의기투합해 이 상징적 응징을 벌여나가는 과정을 담은 풍자극. 제목처럼 소리가 극을 끌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이니, 귀싸대기 치는 소리를 연상하며 읽어야 제맛이리라.

무대를 떠올리며 작품을 읽는다. 희곡집 《상봉》(연극과 인간).
표제작인 <상봉>을 비롯 <가인(佳人) 박동화> <정으래비> <신(辛), 태평천하> <귀싸대기를 쳐라> <여자, 서른> 등 6편이 담겼다.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최기우(36)씨가 펴낸 첫 희곡집이다.

▲ <귀싸대기를 쳐라>

첫 작품은 풍자성 짙은 <귀싸대기를 쳐라>

먼저 <귀싸대기를 쳐라>는 2001년 작이니, 증보판 삼아 귀싸대기 치고 싶은 사람을 추가해 달라고 넌지시 청해 보았다.
“시답잖은 행사에 이런저런 압력 넣어서 1억씩 관의 재정 보조받는 놈들, 문근영이 빨갱이라고 말하는 놈들, 촛불집회 왜곡하는 놈들, 뻔히 사기꾼에 모리배인 줄 알면서도 고 녀석 찍은 놈들, 그리고 고 녀석….”

귀싸대개를 치는 통쾌함은 유보하더라도, 상식을 새삼 공유하는 통쾌함이 밀려온다.
앞서 줄선 놈들 많으니 ‘문학관에서 책이나 볼펜 등등 훔쳐가는 놈들’은 귀싸대기 치고 싶은 순위에서 한참 밀려나는, 애교스런 축에 들 것. 난데없이 웬 문학관이냐고? 그는 지금 최명희문학관에서 기획연구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재 너머에는 무신 소가 남어있다간디? 거그도 다 진작에 씨가 말러부린 지 오래여….   이러다가는 조선팔도에 송아치새끼 씨종자가 멜종을 허고 말 거이네.”(혼불 1권 290쪽)>

▲ “낯뜨겁지 않게 사는 삶, 건강한 글
쓰기 노동자의 삶을 잊지 않는 것이,
다만 나의 ‘사랑’에게 줄 수 있는 마음
의 무장일 것이다”고 말하는 극작가
최기우.
지난 6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이 한창 타오르고 있을 때 최명희문학관 앞에도 동참의 현수막이 내걸렸다. ‘죽은’ 작가가 오늘의 현실을 두고 발언하는 현수막. 그것은 문학이 시간을 뛰어넘어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증명이기도 했다.
《혼불》에서 발췌한 구절 밑에는 <최명희문학관은 이명박 정부의 ‘당치도 않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합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단지 문학 작품만을 과거형으로 박제하듯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을 살고 오늘의 독자들과 더불어 호흡하려는 최명희문학관의 지향이 그 현수막에 여실히 담겨 있었다.
《혼불》에서 끌어온 그 구절은 눈 부릅뜨고 부러 찾아낸 것인지 물어보았다. 답은 “당근! ” 《혼불》은 그가 늘 곁에 끼고 들여다보고 사는 존재다.

“《혼불》에는 사회의 모든 부조리를 향한 분노와 그에 항거할 수 있는 혜안이 담겨 있다. 그래서 혼불은 나를 질리게도 한다. 최명희의 삶과 문장을 바라보면, 작가로서의 한계를 느끼게도 되고. 그 플래카드는 우리 관장님이 흔쾌히 허락을 해 주셨고, 문학관 모든 직원들이 열정을 다했다. 문학관 직원들이 촛불집회 반 이상은 참가한 것 같고, 나는 개인적으로 창작판소리 사설을 써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미전향장기수 송환을 보며 구상한 작품 <상봉>
무대극 첫 작품인 <귀싸대기를 쳐라>는 형제처럼 지내면서 일주일에 서너 번 술집에서 만났던 배우 최지훈의 권유 혹은 조름으로 쓰여졌다. 못 이긴 척 쓰게 됐지만 사실 무대에의 끌림은 오랜 내력을 갖고 있었다.

“원래부터 연극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도 빼지 않고 연극무대를 쫓아다녔고, 대학시절 미팅을 해도 연극을 먼저 보고 나서 커피숍에 들었다.”

작품을 쓰기 시작한 이래 ‘독식’이란 말을 들을 만큼 그는 전북 지역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들을 거의 도맡아왔다. 2001년 <귀싸대기를 쳐라>와 2002년 음악극 <혼불> 이후, 2003년부터 매년 5∼9편을 올려 왔다. 무대극은 종류가 다양한데, 오페라 빼놓고는 거의 다 써본 것 같다고. 특히 창극이나 국악뮤지컬, 창작판소리 등에 관심이 많다.

▲ <가인 박동화>

극작가가 드문, 극작이든 연극이든 살아남고 버텨내기 어려운 지역 현실이 독식의 진정한 배후랄 수도 있다. “쓰는 사람이, 쓸려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나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 나름대로 글 쓰는 사람의 책임감이랄까….”

표제작 <상봉>은 지난 2003년 전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희곡상·연출상·연기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작품. 북송된 비전향장기수 아들을 둔 노인 필순과 남편을 전쟁으로 잃고 두 아들마저 북에 빼앗겼다고 믿어온 노인 분여의 반목과 갈등을 통해 개인의 삶을 지배한 역사의 질곡을 그려 보인다.

지난 2000년 비전향장기수 63명이 판문점을 통과해 북녘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구상했다.
“작품을 쓰면서 고 신인영 선생을 자주 떠올렸다. 선생은 감옥생활 32년을 ‘민족의 슬픔 가운데 내 몫을 짊어진 세월’일뿐이라 말했다. ‘내가 자유로워지는 날은 남쪽 사람 북쪽 사람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그날이야’라고도 말했다.”

서예가 이승철씨가 쓴 책표지의 제목을 들여다본다. ‘상봉’. 이별이 너무 길었다는 듯 어화얼싸 서로 손을 뻗어 맞잡는 모습의 글자. 극중 장면, 두 할머니가 화해하며 손 내밀어 잡는 모습과 어찌 그리 닮았을까. 만나야 할 것들은 많다. 굴절된 역사와 체제가 낳은 수많은 찢김, 이산, 불신, 반목, 몰이해, 상처를 딛고 그는 이음과 치유를 꿈꾼다.

“내 주변에 사는 남한 사람들이 나를 뭐, 뭐, 보드키 쳐다보니까 도대체 살 수가 없었지.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에도 참고 견뎠는디…”라는 극중 대사는, 먼저 치유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도사린 편견과 폭력적인 시선이라고 일러준다.

▲ <정으래비>

▲ <정으래비>

전북 지역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들을 거의 도맡아
<정으래비>(2004)는 지금도 치열하게 역사적 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정여립과 기축옥사를 소재로 한 작품. 전주 출신 정여립(1546∼1589)은 반상의 귀천과 남녀의 차별이 없는 대동계를 조직하고 왕위의 세습을 부인했던 혁명적 사상가였다.

<정으래비>가 독특한 건 정여립의 삶을 다루면서도 그 중심에는 민중을 세워두고 있다는 점이다. 민중을 대변하는 걸인들이 정면에 나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천하는 백성의 것이다”고 외쳤던 정여립의 목소리에 걸맞는 선택과 설정일 터.

<가인 박동화>(2006)는 전북연극의 개척자로 매김된 희곡작가이자 연출가 박동화의 연극생애와 정신을 담아낸 작품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역사의 격동기를 살아낸 예술가의 초상이 돋을새김된다. 시대와 타협하며 자존심을 팔기보다는 스스로 외로워지는 길을 택했던 ‘어느 글쓰기노동자의 도도한 투쟁’을 만나게 된다.

채만식의 <태평천하>를 잇는  <신(辛), 태평천하>(2005)는 해학과 풍자가 두드러지는 작품.  앞에 붙인 건 ‘新’이 아니라 ‘辛’. 맵짠 현실을 강조한다. 구도심 재개발 바람을 타고 다시 태평천하를 맞는 건물주 최영감이 주인공.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라는 명언 혹은 망언을 남긴 <태평천하>의 주인공 윤직원의 계급적 이기주의를 그대로 이어받은 인물이다. 시대의 안위나 이웃들의 삶에는 아무 관심없이 그저 내 품에 돈과 권력만 굴러들어 올 수 있다면 ‘태평천하’인 이들의 야만을 떠올려봄직 하다.

▲ <여자, 서른>

▲ <상봉>

건강한 글쓰기 노동자의 삶을 잊지 않고

관심영역도 소재도 다양한 그의 작품들. 그것을 꿰뚫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는 “지역사!”라고 답한다. 궁극적인 목표는 “통일이 된 대한민국의 감성을 잘 담아낼 수 있는 작가가 되는 것.” 그래서 지역사나 언어에 관심이 많다. 작품을 쓰기 전에 꼭 하는 일은 자료조사.  <정으래비> <서동요> <가인 박동화> 등등을 쓸 때도 관련 논문을 30∼50편 정도 분석했다. 상상이 넘치지 않도록 학술적인 근거를 찾는 밑작업이다. 두 번째는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뒤에는 현장취재를 하고,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인물탐구는 일상생활의 기본. “문학은 관심에서 시작하는 것”이니까.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개인기가 많다”고 스스로 주장한다. “주변 사람들 흉내를 잘 낸다. 작가나 시인 선배들 흉내를 특히 잘 낸다.” 아껴서,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가끔 보여주곤 한다.

소설가, 극작가 이전에 그는 ‘기자’로서 먼저 필명을 날렸다. 전북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겸했는데 “이렇게 하다가는 어느 것도 잘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두었다.

ⓒ 전라도닷컴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온다. 이 얼마나 행복한 반복인가. 그러나 최명희와 박동화의 삶을 돌아보면, 살기 위해 꼼지락거리는 나는 무척 난감하고 때론 우스꽝스럽다. 작고 나지막한 나…낯뜨겁지 않게 사는 삶, 건강한 글쓰기 노동자의 삶을 잊지 않는 것이, 다만 나의 ‘사랑’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의 무장일 것이다”고 그는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최기우에게 연극이란? “봉화(烽火). 작가의 삶을 고민하던 나를 다시 일으키게 했고, 비록 나를 태워야 하지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멀리까지 알릴 수 있기 때문.^^” 무대에 올려진 자신의 작품을 볼 때마다 불안, 초조, 안달, 분노, 한숨, 감격, 눈물, 회한, 뻘쭘을 널뛰듯 반복한다. 그 생생한 감정이야말로 그에겐 ‘살아있음의 또다른 증명이고 누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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