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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철]방과후학교와 아토피가 정치다. |

 

 


2004.04.30 22:58

“알러지가 정치다”(The allergy is the politics)라는 유럽 녹색당의 슬로건이 있다.
영국 녹색당은 캠페인 ‘알러지와의 전투’(Combat Allergy campaign)를 치르고 있기도 하다.
알러지 아젠다는 미래정치의 특징을 잘 설명해 준다.
 
전쟁 등 국가간 대립의 문제이거나 사회적 세력집단간의 파워게임만이
정치의 아젠다가 되는 시대가 지났다는 뜻이고, 정치가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동해야 한다는
‘정치의 새삼스러운 자기확인’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대표적인 알러지의 하나인 아토피는 한국사회에서도 커다란 사회문제로 확산되고 있다.
연세대 의대 피부과학교실의 이광훈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국내 아토피 환자는 많게는 전체 인구의 20퍼센트 수준’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 병의 ‘유병률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는 것이다.
아토피의 원인은 패스트푸드 등 악식을 먹는 식습관, 오염된 공기와 물 등 환경요인,
인체를 자극하는 각종 화학물질에 둘러싸인 현대인의 생활공간 등으로 지적되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이 건설한 생활체계 전반이 아토피를 불러오거나 증폭시키는 기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에 따르자면 아토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활의 방식을 바꾸고 산업
(음식과 건축, 의류, 화학 등 생활 관련 산업 전반)을 바꾸고 환경을 복원해야 한다.

아토피 문제의 뿌리가 이토록 거대한 것이라면 그 해결을 모색하는 활동이 정치라 불리지 않을 수 없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한 서구 유럽사회의 정치 아젠다가 지역주의와 권위주의,
이념의 장벽을 완전히 걷어내지 못한 한국사회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지기에는 시기상조가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방과후학교가 정치다”라는 한국적 변용을 거친 아젠다는 어떤가?


학교평화가 꿈꾸는 방과후학교


과천시에는 <학교평화>라고 불리는 학부모들의 모임이 있다.
정식 명칭은 ‘학교폭력근절을 위한 시민모임’이지만 ‘학교평화’라고 부르고 불리는 걸 즐겨하는
엄마와 아빠들의 모임이다.

이들이 모임을 만들게 된 건 3년 전 한 초등학생의 비극적인 죽음 때문이었다.
선정현 군은 친구들의 학교폭력에 노출된 아이였다.

이 어린 영혼은 폭력 앞에 굴절되는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말았다.
그가 투신했을 때 정현이가 다니던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고 있던 뜻 있는 학부모들과
그들의 뜻에 공감한 이들이 <학교평화>를 만들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이 부닥친 현실은 절망스러운 것이었다.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었지만 학교에는 물론이고 사회 어디에도 ‘학원폭력’의 심각성을 전하는
변변한 책자 한 권, 폭력을 당한 아이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대처법을 정리한 매뉴얼 한 권 없었다.

<학교평화>가 학원폭력 매뉴얼 북 『평화로운 학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듭니다』를 펴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펴면서 지역사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현재 이들은 지역의 <청소년상딤실>과 공동으로 지역 3개 중고등학교에 학생들의 학내복지를 담당하는
전문교사를 1명씩 파견하고 이들의 활동과 학생들의 복지를 모니터링하는 사업을 시와 교육청의
협조를 얻어 실시하고 있다.


<학교평화>가 ‘방과후학교’의 필요성에 주목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학교폭력에 관련된 아이들 중 다수가 열악한 가정환경을 가진 아이들이었고
이 아이들은 학교가 파하는 그 순간부터 생계를 위해 밤 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부모들이 귀가하는 시간까지 그야말로 철저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상당수 아이들은 부모들이 주고간 적은 돈으로는 허기진 배를 채우지도 못했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에게서 돈과 신발, 학용품 등 제가 필요한 것들을 폭력을 휘둘러 얻고 있었다.

<학교평화>는 지역의 저소득층 자녀들의 ‘방과후학교’를 운영해 학교가 파한 이후를
지역사회가 책임져야 학원폭력의 고리가 끊어진다고 생각했다.


‘방과후학교’를 세우기 위한 활동이 시작됐다.
기존 ‘방과후학교’들을 조사하는 사업부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30여명 규모의 ‘방과후학교’를 유지하려면
교사 1인의 인건비와 아이들 급식비를 포함해 최소 300백만원이 필요하지만
그 대부분을 후원금이나 회비에 의지할 뿐
구나 시의 지원은 겨우 40~70여만원 선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방과후학교’를 제도적으로 지원할 법도 변변찮았다.
관청과 제도의 지원은 최소한이었고 나머지를 자원봉사자들과 교사들의 희생으로 꾸려가는 실태였다.

특히 시로부터 위탁을 받았거나,
조합형태로 꾸려지거나 간에 대부분의 ‘방과후학교’들은 기존의 유아용 ‘어린이집’에 병설된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유아들과 함께 초등학생들을 수용하자니 이들 모두를 만족시킬 프로그램을 만들고 진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교사인력이 부족한 탓에 교사 1인이 유아부터 초등학생까지 전부를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더군다나 저소득층 자녀들만을 위한 시설은 희귀할 지경이었다.


<학교평화>가 기존 ‘방과후학교’ 조사를 통해 내린 결론은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방과후학교’
△건강한 놀이(학습이 아닌)를 제공하는 ‘방과후학교’
△어린이집 등과 분리된 단독의 ‘방과후학교’ 건설이었다.

재정과 공간 마련이 큰 문제였지만,
이들의 활동이 소문나면서 뜻있는 자원봉사자들이 결합하기 시작했다.

인근 마을회관에 공간을 마련할 수 있을 듯하고 복지사로 시에서 활동중인 분,
공무원노조에 있는 분 등자원봉사자들의 참여가 잇따르고 있다.


녹색과 만난 생활정치가 필요하다


과천 <학교평화>의 성공적인 활동상은, 그러나 섣불리 일반화될 수 없다.
다른 자치체에 비해 다양하고 풍부한 자원봉사인력들이 밀집한 과천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문제의식, 활동은 전국적인 대표성을 가질 수 있겠지만,
이들의 성공까지 그대로 전국적인 것은 아니다.
이들의 성공을 한국사회의 성공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법과 제도의 지원이 절실하다.
 

법제도의 지원을 얻기 위해 ‘정치하는 분들과 만나보았느냐’의 질문에
<학교평화>의 조수영, 김미경 두 공동대표는 씁쓸한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선정현 군의 사고 이후 학원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던 초기의 일이다.
지역 국회의원을 만나 학원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법제도의 정비와 뒷받침을 호소하자
“정말 뭔가 해줄 듯이 진지하게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이들은 그 의원이 학원폭력과 관련된 그 어떤 의정활동도 벌였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 일을 해당 의원 한 사람의 선의와 열정 부재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조차 거대담론 위주의 정책활동,
정당과 보스의 권위체계에 따른 파워게임에 내몰리는 한낱 말단이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의 자문이 ‘그렇다’는 답을 얻게 된다면 이제 우리가 ‘아토피와 방과후학교’를
정치의 영역에서 풀어내기 위해서 나아갈 길은 이런 생활의 영역에서 나오는 문제들을
정치의제로 받아들이는 지역의 정치, 생활의 정치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현시기는 정치적 기회구조가 시민사회에 크게 확대되는 시기라고 보입니다.
지역 시민사회의 풀뿌리운동의 이슈들은 민주노동당같은 진보정당일지라도
다 수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토피를 사회변혁의제로 이해한다면 새로운 정치의 색깔은 녹색일 것입니다.
또한 자치체 단위에서 고민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지역 시민단체의 활동이
생활정치의 베이스에서 움직여져야 한다면 새로운 정치는 생활정치여야 할 것입니다.”

녹색정치준비모임의 서형원 간사는 생활의 정치, 녹색의 정치가 미래정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래정치의 아젠다는 다름아닌 ‘방과후학교와 아토피’로 대표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새로운 생활정치, 풀뿌리 녹색정치를 준비하는 조직들은
2006년 지방선거 참여를 목표로 공동의 참여조직을 준비중이다.

시민자치정책센터, 에너지대안센터, 녹색정치준비모임, 생태경제연구회, 모심과살림연구소,
함께사는시민행동, 바람과 물 연구소 등 단체들과 조현옥, 하승수, 이필렬 등 인사들이
<풀뿌리 지방자치참여 지원네트워크> 구성을 시민사회에 제안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기성 정당에 기대지 않은 풀뿌리운동가들을 대상으로 지방자치 참여 준비자들의 활동을
정책개발에서부터 홍보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후원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환경과 여성 등 시민사회 각 부문에서 기존에 배출한 지방자치단체 의원들과
새로이 지방선거에 뛰어들 지역의 풀뿌리 일꾼들을 네트워킹하고
이들을 통해 생활의제, 녹색의제를 정책화하자는 것이다.


진화하는 탈권력의 새 정치


전북 정읍을 중심으로 활동중인 생명민회의 주요섭 사무국장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세력 대 세력으로 맞붙는 방식은 성공하기 힘들다.
탈권력적인 감수성을 가진 세대들이 자라나고 있다.
이들의 가치지향과 풀뿌리 생명운동의 가치지향이 상생적으로 만나 탈근대적 가치지향으로 통합돼야 한다.
 
중앙을 복사하여 권위적으로 서열화, 패거리화된 지역주의를
문화를 통해 해체하는 운동이 먼저 이루어지고 그 가운데서 이러한 지역들이 연대해서
만들 사회 전체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새로운 정치의 정체성이 백일하에 드러나 반짝인다.
지역공동체, 녹색과 생명평화, 여성과 어린이, 복지와 인권 등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지역에서 정치의제화시키고 정책화하는 정치가 진화하기 시작했다.

415 총선 이후 구정치의 역풍이 어떤 속도로 불어오더라도 진화의 속도가 그것을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실 진화는 이미 ‘한 어린이가 목숨을 던졌던 그 때 시작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잠자다 울며 일어나 온 몸을 긁어대는
수 많은 아토피 아이들의 불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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