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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시인의 예전편지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8> 자카리아 모함마드씨에게
당신을 알기 전에는





나희덕시인 
 


자카리아 모함마드 씨



당신을 알기 전에는
팔레스타인, 레바논, 이라크라는 지역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아주 먼 곳이라 여겨 왔습니다.


그곳을 오래도록 괴롭혀 온 분쟁과 폭력 또한
내가 잠들거나 수저를 드는 일에 대해 머뭇거리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한국에 와서,
그리고 제가 근무하는 대학에 강연을 와서
만나게 된 이후로
팔레스타인은 더 이상 저와 무관할 수 없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신문을 보다가 그곳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
마치 제 피붙이의 일처럼 안타깝고 마음이 아파 옵니다.


두어 번 만난 작가와의 인연이
그 공간적 거리를 한순간에 무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저도 놀랐습니다.







당신이 들려준 강연은 지금도 생생하게 제 기억에 남아서
폐허로 변해버린 그곳과 당신의 삶을 자주 그려보게 합니다.
당신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설명했지요.


인생의 3분의 1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데모하는 일에 바치고,
인생의 3분의 1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지키는 수많은 초소를 통과하기 위해

기약 없이 길 위에서 기다리는 데 바치고,
나머지 인생의 3분의 1만이 작가로서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라고 말이지요.


그 말을 들으면서
한국의 시인으로서 제가 얼마나 큰 자유와 여유를 누리고 있었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당신의 글만큼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하는 글을 쓰지 못했다는 자책이 일었습니다.


신호등 앞에 서서 불과 몇 분을 기다리지 못하는
제 자신을 보며 인생의 3분의 2를 길 위에서 보내고 있을 당신을 떠올립니다.









자카리아 모함마드 씨!




당신을 알기 전에는 제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말과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깊은 종교성이
저의 종교와 종교성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고,
이슬람교에 대해 제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버리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당신과 함께 우리 일행은
전라도에 있는 작은 산사를 향했지요.


대도시의 쾌적한 숙소를 마다하고
당신이 한국의 사원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지요.


섬진강을 따라 달리며
당신은 한국에서의 며칠이
 마치 꿈과 같은 시간이라고 말했던 걸 기억합니다.

남도의 소박하고 고즈넉한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어쩌면 당신은 당신이 돌아갈,
피로 얼룩진 산천을 떠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날 우리는
섬진강변의 어느 식당에서
서로의 종교에 대해 잘 통하지 않는 언어로나마 대화를 나누었고,
저는 기독교인으로서 이슬람교도인 당신께 진심어린 사과를 했었지요.







그리고
미국과 이스라엘이
기독교를 내세워 벌이는 살육이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해명도 했습니다.


그런 저를 당신이 팔을 활짝 벌려 안아주며 등을 토닥여줄 때,
그런 관용이야말로 당신의 종교성에서 나온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당신 안의 신이 제 안의 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습니다.









자카리아 모함마드 씨!




당신을 알기 전에는 '평화'라는 말이 막연한 추상명사처럼 들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작가로서 평화를 위해 발언하고 실천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 저에게 당신의 시와 산문은 평화를 말하는 문학적 방식과 그 가능성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선인장'의 꽃이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인내와 기다림의 상징이라는 것도,
'라마'가 전쟁터에서 끝까지 자신의 평화적 본성을 지키는 동물이라는 것도,


앞을 향해 달리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타조'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지혜를 상징한다는 것도
당신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언어로 글을 쓰면서도
그 상징들을 문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언젠가 당신이 저의 글에서도 그러한 평화의 상징을 발견하고 공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카리아 모함마드 씨!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직후 접하게 된 당신의 글에서
자신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한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살육의 현장에서 느끼는 분노와 참담함의 표현이었겠지만,
부디 저 무자비한 폭력이 당신의 온화한 미소와 인간에 대한 신뢰까지 빼앗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신이야말로 그 척박한 고난의 땅에 피어난 선인장의 꽃이요,
순한 눈빛을 지닌 라마요,
앞과 뒤를 함께 돌아보며 달리는 타조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프레시안 2006-09-

오바마에게 보내는 긴급한 편지

 

이스라엘을 '중동의 여우’라 불러야 될 것 같습니다.
오바마 취임을 앞두고 사전 축하 세례를 안겨준것이 아니라, 퍼 부었습니다.
중동의 화약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중전과 지상전 선물.

왜 이 시점에 오바마를 실험대 위에 올려놓았을까요?

 

부시야 부시시하게 관망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하지만,
미국의 네오콘 세력과 세계 각국에 거점을 둔 이스라엘 네트워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퇴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세계 군산복합체와 투기금융을 이끌어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바마가 표방한 다자주의 외교의 실체를 보고 싶은 것입니다.

관람자입장에서 오바마리그만 보고 있지 않겠다는 거지요.


                               

 


오바마의 입장에서는 참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미국 경제), 이스라엘이 잽을 던졌으니.
내색 하지 않지만 잽이 워낙 강해서 첫 번째 속 멍이 들었습니다.

오바마에게 거는 기대는 미국경제,
세계경제의 회복뿐만 아니라 세계평화의 새로운 마중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중동정책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대전환기에 맞는 외교독트린을 천명해야 하며 평화전도사가 되어야 합니다.

 

경제의 위기가 아니라 경제의 위기를 빌미로 한 전쟁의 위기.
전쟁을 통해 이득을 볼 세력들의 실체를 알리고 무너뜨리지 않는 한 세계평화는 요원합니다.

전쟁의 핵심에는 석유, 물 등 자원 쟁탈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오바마, 노벨평화상은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중동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금까지 다섯명의 인물이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1978년 메나헴 베긴(이스라엘)과 안와르 엘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1994년에는 아라파트와 시몬 페레스,
이츠하크 라빈이 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지금 팔레스타인 공격을 총지휘하고 있는 인물은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입니다.

상을 잘 못 준 것이지요.

반납하세요.

시몬 페레스.                                       

 

  <왼쪽부터 사다트,베긴,아라파트,라빈,시몬 페레스>

 

오바마,
최초의 수식어에 걸맞게 노벨평화상을 뛰어넘는,
세계인에게 사랑 받는 미국대통령이 될려면 팔레스타인과 중동지역에 평화를 안겨주십시오.

노력하십시오.

이스라엘에게
당장
야만의 전쟁을
끝내라고
외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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