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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 세상을 꿈꾼 이들
<타인의 삶>그리고 ‘5월’


독일영화 <타인의 삶>을 봤다. 그리고 5월이다. 1980년 광주의 5월과 영화 <타인의 삶>을 연결시키는 접속사로 ‘그리고’를 선택했다. 개인적으로 그럴만한 기억이 있어서이다. 또한 기억은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영화를 이야기하는 이 지면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광주’ 속에도  ‘동독 정보요원’ 같은 이가 있었을 거라는 믿음
간직하고 있는 물건이 있다. 사용할 수가 없고, 당초에도 사용됐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물건이 다른 어떤 것과 교환되는 것도 아니다. 가치는 있으되 사적인 의미에 머무른다. 물건이라고 호명하는 데도 망설여진다. 물건의 구성요소가 종이와 글이다 보니 이게 손에 잡히는 물질인지, 단지 한 시대를 증언하는 기억의 파편에 불과한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확인 가능한 형태로 남아 있고, 이야기가 깃들어 있으며, 근래에도 종종 내 정신을 일깨워주는 옛것이라는 사실이다.

1980년대 끝자락 어느 해, 가깝게 지내던 후배 녀석이 감옥에를 갔다. 꼭두새벽에 미국문화원 앞에서 벗들과 더불어 ‘꽃병’놀이를 한 게 죄였다.
가깝게 지내온 선배라는 이유로, 책을 넣어주고 시골 부모님의 옥바라지를 도와주는 등의 뒷감당을 맡게 되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터라서 직계 가족 외에는 면회를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책을 넣어 주기 위해 나눠야 할 이야기들은 모두 편지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처음에 후배는 내게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을 썼고, 나는 후배에게 그 책들을 보냈다는 전언과 함께 새로 나온 책들 중 읽을 만한 것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 보니 편지의 내용은 자연스레 책과 책의 내용에 대한 리뷰로 채워지게 되었다.

잘 알다시피 그 때의 편지는 모두 검열을 받았다. 편지글은 국가가 정해 놓은 규범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마르크스, 엥겔스 같은 이름들이 실명으로 거론돼서는 곤란했다. 그래서 우리는 은어를 썼다. 아니 실상은 은어랄 것도 없다. 마르크스를 ‘칼’로 엥겔스를 ‘프리드리히’로 표기했던 것이다. 당연히 레닌은 ‘블라디미르’였다.

신기하게도 이 표기법을 교도소 검열관은 눈치 채지 못했다. 후배가 석방되던 날 저녁, 우리는 소주잔을 부딪치며 공안당국과 검열관의 ‘무식함’을 맘껏 조롱했다. 그 때 우리는 객기와 혈기가 차고 넘쳤던 20대 초반이었다. 한 동안 이 편지들은 삶의 열정적이었던 한 때를 증언해주는 유품이자 자꾸만 혼미해져가는 정신을 바로 잡아주는 텍스트로 작용했다. 그런데 근래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과연 그들이 눈치 채지 못했을까, 라는.

▲ 교도소 ‘검필’이 찍힌 후배의 편지들.
ⓒ 전라도닷컴

‘검필'이 찍힌 편지의 의미

영화 <타인의 삶>은, 우리나라로 치면 안기부 정도에 해당하는 동독 정보요원이 영향력 있는 작가를 잡아들일 목적으로 그의 사생활을 도청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다가 정보요원은 그 작가의 세계에 빠져들어 거꾸로 그를 보호하게 된다. 작가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는 이런 상상을 불러 일으켰다. 광주교도소의 노련한 검열관이 풋내기 대학생들의 다 들통 나는 은어 놀이를 모른 척 해주었을 것이라는. 어쩌면, 이건 이렇게 이해해야 해, 라고 그 검열관은 편지에 주석을 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이 어떻든 상관없다. 형식은 달랐을지라도 ‘동독 정보요원’과 같은 이가 분명히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80년대를 이겨나간 힘의 근원이 생각보다 훨씬 깊고 넓다는 깨달음일 터이다.



영화 <타인의 삶>을 만남으로서 후배와 나눈 편지들은 추억 이상의 의미를 얻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표나지 않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새 세상을 꿈꾸고 실천한 이들을 떠오르게 한다. 사용할 수도 없고, 교환되지도 않지만, 이사 때마다 ‘검필’이 찍힌 그 편지를 꼭꼭 챙겼었다. 이제 챙겨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이정우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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