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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바람소리냐 비냐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중심적 전체와 활동하는 무에 관하여
  2008-10-17 오전 7:59:04
     
  이 글은 지난 10일 부산대학교 철학과 개설 60주년을 축하하는 필자의 특강 전문이다. 편집자
  
  부산대 철학과 개설 60주년을 축하한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런데 오늘 축하 특강을 부탁받았다. 말할 수 없는 영광이다.
  
  결국 내 나름의 축하특강을 하라는 뜻으로 믿겠다. 생명·평화·동학·모심·화엄개벽 등을 촛불에 집약하여 말하라는 것 아니겠는가!
  
  '촛불, 바람소리냐 비냐'.
  
  제목을 이렇게 정한 까닭이다.
  
  20여 년 전 해남에서 발표된 구술연작시 <검은 산 하얀 방>의 서시 <촛불>이란 작품이 있다.
추억삼아 한 번 읽겠다.
  
  나뭇잎 휩쓰는
  바람소리냐 비냐
  전기는 가버리고
  어둠 속으로 그애도 가버리고
  금세 세상이 온통 뒤집힐 듯
  눈에 핏발 세우던 그 애도 가버리고
  촛불
  홀로 타는 촛불
  내 마음 휩쓰는 것은
  바람소리냐 비냐

  
  그런데 웬 일로 촛불에서 철학자 윤노빈 형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인가?
  
  부산대 철학과는 오래전에 월북한 윤노빈 교수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저 유명한 그의 노작 '신생철학'의 산실도 부산대 철학과다.
  
  신생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현재 우리의 생명사상, 생명운동의 현대 철학적 기초의 하나다.
  
  촛불은 분명 생명사상이고 생명운동, 오늘날 전 인류 속에 확대되고 있는 생명·평화운동의
한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막 켜지기 시작했을 뿐이다.
  
  새로운 문화, 새로운 문명의 뚜렷한 상징어인 촛불의 딜레마는
'바람소리냐 비냐'에 있는 것 같다.
 
바람소리는 무엇이고 비는 무엇일까?
  
  나는 시인이다.
  
  '촛불, 바람소리냐 비냐'의 이미지를 따라 윤노빈 신생철학을 둘러싼
두 개의 운명적인 명제가 떠오른다.

'중심적 전체'와 '활동하는 무'다.
  
  이것이 오늘 부산대 철학과 개설 60주년 축하 특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주제인 듯하다.  
  윤노빈 형은 나의 절친한 친구다.
  강원도 원주, 원주중학교 동기동창이고 서울대 문리대에서 함께 공부했다.
  
  나는 방학 때마다 원주에서 아침엔 그와 함께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공부했다.
  헤겔에 관한 한 어떤 의미에서 그는 나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독특하고 심오한 정신주의자였으며 문리대 데모현장 같은 곳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고 오직 강의실과 도서관, 그리고 하숙집에서 공부에만 열중하던 사람이다.
당시의 학생운동이나 그 뒤의 사회운동에 관한 한 그의 철학적 견해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그러한 그가 월북한 것이다.
  
  지금 그가 무엇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한동안 소문이 떠돌았으나 이제는 그마저 자취 없다.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왜 월북했을까? 신생철학 때문인가?
  
  최초로 그에게 동학을 소개한 것은 바로 나다.
  그러나 그의 동학관은 신생철학에 이미 나타나듯이 그의 월북을 결정할 만큼 철저히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류도 아니었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약간 상이하지만 내 견해로는 북한 주체사상의 첫 샘물은
의암 선생의 '이신환성(以身煥性)'론 중 '영년주체(永年主體)'설이기 때문이다.
그 짝인 '일년객체(一年客體)'가 육체나 물질을 의미하는 데 반해
철저히 정신과 영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월북의 동기는 그의 바탕이기도 한 철저한 정신주의 때문이었던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촛불에서 그가 생각나는 것인가?
  
  어째서 바람소리가 그의 '활동하는 무'로, 비가 그의 '중심적 전체'로 느껴지는 것인가?
  
  여전히 잘 알 수 없다.
  
  여러 해 전 지하철에서 지금은 그 제목조차 잊었으나 윤노빈 형의 아베스다 경전에 관한
논문 한 편이 문득 뇌리를 스치며 그의 월북동기가 희미하게 짐작된 적이 있었다.
물론 정확한 동기일 리 없다. 다만 막연한 짐작일 뿐이었다.
  
  '중심적 전체'.
  
  아베스다 경을 관통하는 이 개념이 북한 주체사상의 핵심영역인 수령론에 연결되어
느껴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수많은 사회주의자들까지도 마음에 안 들어하는 바로
그 북한의 세습독재를,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일반적인 매혹과는 별 관계없이 윤노빈 형은
애초부터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정말 그럴까?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가 지하철을 내려 발길을 한참 걷고 있을 때 뒤이어 내게 온 것은 이것과 어쩌면
정반대의 명제가 되는 것이었다.
  
  '활동하는 무'.
  
  이 특강 원고를 작성하고 있는 서기 2008년 9월 20일 현재, 동북아시아는 술렁거리고 있다.
  
  북한 수령 김정일 씨의 건강악화설 때문이다. 때가 때이니만큼 더욱 그렇다.
  
  미국 시장은 장기화되어가는 스태그플레이션과 금융위기로 매우 위태로운 혼돈에
빠져들고 있고 월가는 미국과 대서양 시장 중심에서 벗어나 아시아 잠재시장의 대규모 개척을
위해 동북아 6자 회담을 통한 이 지역 집단 평화 안보체제를 구축하는 데에 화살 방향을
집중함으로서 그 걸림돌인 북한 핵과 김정일 강성체제의 완화, 개방개혁을 위해 미국 정부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바로 그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 정세에 대한 대응방식에서 미국ㆍ중국 등과 남한 정부의 태도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미국ㆍ중국 등이 큰 동요를 보이지 않고 있는 데 비해, 남한 정부가 북한 내 개인정보망인
휴민트까지 샅샅이 공개하면서 호들갑떠는 데는 어떤 본질적인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심지어 남한 정부 주변에서는 '흡수통일론'이 고개를 쳐들고 있고 대규모 난민 발생과
북한 내전을 틈탄 정치적 대호재론까지 기세를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되건 저리되건 거대한 문명사의 대변동, 동아시아에로의 세계사 중심이동과
아시아에서의 후천개벽은 필연의 대세이겠으나 오직 하나 여기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수령론'이니 그와 연계되는 것으로 보이는 '중심적 전체'라는 명제가
자연 두드러지게 된다.
  
  나는 윤노빈 철학과 그의 월북동기 등에서 동학을 연관시킨 바 있다.
  
  그리고 중심적 전체와 활동하는 무와는 상호 대척적인 그의 철학명제를 촛불에 대한
바람소리와 비의 은유에 연결시켜서 이해하고자 했다.
  
  동학은 한울님을 모시는 종교사상이다.
동학에서는 '한울님 모심'을 한자로 '시천주(侍天主)'로 개념화하고 있고
수운 최제우 선생 자신이 이를 해설하고 있다.
  
  해설에 따르면 '한울(天)'은 규정이 없다.
  즉 텅빈 무(無)다.

바로 이 같은 텅빈 무를 '님'으로 불러(稱其尊) '모심'이 '시천주'인데 애당초
이 모심은 수억 천 년 우주진화 활동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그 모심활동 자체는 결국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복잡화 과정이 있되
특히 현생 인류에 있어서는 그 우주 전체의 융합성을 각자각자가 다 자기 나름나름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개체·융합의 자기조직화'의 주동력인 다름 아닌 텅빈 자유를 제 안에 모시고 있기 때문이겠다.
  바로 이것이 '활동하는 무'다.
  
  그러나 동학에는 두 가지 주문이 있다.
  이상에 말한 부분이 본주문(本呪文)인데 비해 그 앞에 강령주문(降靈呪文)이란 게 또 있는 것이다.
  
  강령주문은 후천말세의 극에 이르러 태초의 '혼돈적 질서' 즉
 '혼돈한 근원의 한 우주기운(渾元之一氣)'이 다시금 세상에 지피는데
이것을 가득히 우리 삶에 내려 달라고 기원하는 내용으로서 이때의 그 극에 이른 우주기운,
전체를 통합하고 전체를 간섭하는, 보이는 듯하지만 볼 수 없고 들리는 듯하지만 알 수 없는
혼돈적 질서가 바로 다름 아닌 '중심적 전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동학의 두 주문은 윤노빈 형의 명제로 본다면 먼저 중심적 전체를 기원하고
다음 그 중심적 전체의 기운을 활동하는 무의 원리대로 개체ㆍ개체단위별로 자각적 진화
활동 속에서 융합하되 '화엄적 융합' 즉,

'달이 천 갈래 강물에 다 저마다 다르게 비침(月印千江)'의 형태로
'개체-융합(identity-fusion)'하는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
즉 '자유 자연의 진화'인 셈이 된다.
  
  그러나 북한 주체사상의 수령론이 그런 것인가?
  사상 자체도 문제거니와 정치는 그 실천에서 진실을 드러내는 법이다.
  
  북한 수령정치가 그런 것인가? 정반대가 아니던가?
  
  동학의 경우 혼돈적 질서 즉, 중심적 전체는 숨어 있고 자유자연,
  즉 활동하는 무는 드러나는데,
  북한의 경우 활동하는 무는 숨어 있고 중심적 전체만 드러나 있는 것 아닌가!
  
  나아가 그 혼돈적 질서의 구조 안에서도 혼돈은 극도로 억압되고
  낡은 옛 시대 관행의 질서만이 마치 왕정처럼 지배하고 있는 것 아닌가!
  
  동학의 생성 논리는 변증법이 아니다.
  동학의 그것은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와 숨은 차원과 드러난 차원 사이의
  교차 생성이니 역(易)이나 경락학(經絡學)의 '생극(生克)'과 복승(復勝)'의 원리와도 같다.
  
  중심적 전체와 활동하는 무 사이의 상관관계에서 '아니다. 그렇다'의 교차관계만 아니라
  '숨은 차원과 드러난 차원' 사이의 교차생성 또한 극복하고 집중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가 바라는 생명철학이 된다.
  
  신생철학은 그러한가?
  
  그렇지 않기도 하고 그렇기도 하다.
  또한 숨은 차원과 드러난 차원 사이의 복합적인 교차생성의 가능성 또한
  없기도 하고 또 있기도 하다.
  
  마무리를 서두르기 전에 네 가지를 먼저 살피자.
  
  첫째.
  
  향후 2~3년 안에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는 거대한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적인 대변동이 온다.
대변동에 대비하는 사상·철학적 대응이 시급해질 것이다.
  
  주체사상은 크게 수정돼야 한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수령론과 타자관의 부재(他者觀 不在)다.
  
  북미관계가 급진전할 경우, 주체와 함께 타자관의 정당한 위상이 보장돼야 한다.
동학 쪽에서 대답한다면 '아니다. 그렇다'의 논리 강조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말썽 많은 수령론은 어찌할 것인가?
  
  물론 중심적 전체론과 활동하는 무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윤노빈 철학의
재검토·재평가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 차원 변화가 곧 뒤따라 와야 할 것이다.
  
  둘째.
  
  향후 7~8년, 늦어도 13년 안에는 기후혼돈, 생태계 오염 등과 우주 및 지구 자체의
거대변동에 따른 대규모 생태ㆍ생명의 재앙이 온다.
대병겁(大病劫), 악질만세(惡疾萬世)의 전염병 창궐과 바이러스 공격 시대가 온다.
  
  그때에 지금 발전하고 있는 생명평화운동의 외피를 벗고 바로 그 중심적 전체론의
생태학적 전개가 아마도 최대의 사회적 질병이 될 것이다.
  
  이미 그 가능성은 도처에 무르익고 있다.
구닥다리 신학과 낡은 고생물학을 무기로 한 전체주의적 진화론으로 강화되고 있는
떼이야리즘, 개체 생명을 멸시하고 유전자 일변도의 통섭론으로 전체 사회를 통합한다는
명목 아래 유전자 조작을 서슴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에드워드 윌슨류의 사회생물학, 망상적 동·서 우주론 융합으로 온생명이란 명칭의
전 지구적 중추신경계 괴물을 선전하고 있는 자칭 타칭 물리-생명학.
  
  이런 것들의 철학적 정초가 모두 다 예외 없이 '중심적 전체'론이다.
시청 앞 촛불의 가장 슬기로운 사상인 집단지성을 중심적 전체의 논리로
왜곡·전체주의화·획일화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어찌할 것인가?
  
  셋째.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 현저한 평화가 보장되고 국가 간의 다자적 관계가 일상화되며
지역과 개인들의 다양하고 자발적이면서 유기적, 창조적인 생활·생명 연관이 최우선의 가치로
높여지기 시작할 때 아마도 북한은 주체사상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 등을 자체 안에 흡수ㆍ습합하고자 시도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때는 많은 철학적 난제들이 곧 발생할 것이다.
  
  우선 '영년주체(永年主體)-일년객체(一年客體)'의 지나친 정신주의 중심의
'이신환성(以身換性)'론은 크게 수정되어야 한다.

본디 동학과 현대의 개벽사상은 육체의 가치를 매우 소중히 드높이며 육체 속에서
미지의 신령한 정신개벽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그 이상(理想)은 물론 불변(不變)이지만 인내천의 자칫 지나치게 오해될 수 있는
신비주의는 정당한 수련과 공부에 계시(啓示)가 결합되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으로 엄격히
실재화되어야 한다.

바로 이 같은 난제들 앞에서 그 해석이 도리어 강화되어야만 방면이 '활동하는 무'의 명제가 된다.
  
  이는 시천주의 해석이 현대 심층생태학과 사회생태학의 종합 결론으로서의 자유자연론과
함께 '만년 생명나무에 천 떨기 꽃이 되고 네바다 구름 속에 달 하나 비침'이나
'수없이 많은 수들이 스스로를 앎과 깨달음',
 
'한 세상 사람이 전 우주적 화엄을 각자각자 제 나름나름으로 독특하게 깨닫는
' 대화엄(大華嚴)' 세계를 겨냥하는 화엄개벽론으로 무궁확장되면서 이러한 확장이
남북통합적인 국토에 대한 풍수생태학(風水生態學) 나름의 형국(形局)론에 토대한
풀뿌리 지역분권 연방제적 재편성과

'1과 0' 및 '9+9' 또는 '9x9'와 같은 동아시아 영성수학에 따른 신령 컴퓨터 개발로
고도의 전우주적 소통을 가능케 하는 영성적 생명 시대를 열어야 하는데,
바로 이것을 촉발하는 중심 법제가 '활동하는 무'가 되어야 한다.
  
  넷째.
  
  중심적 전체와 활동하는 무는 어째서 비와 바람소리에 비유되는가?
  
  촛불 공부가 필요하다.
  
  남북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새 시대의 자기 공부다.
샘물은 자기 안에 있다. 최고의 스승이다.
촛불이 우리 모두에게 최고의 시대적 멘토다.
  
  ①촛불은 후천개벽의 시작이다.
지구 자전축의 북극복귀, 북극을 구성하는 지리극(地理極)과 자기극(磁氣極)의
상호 이탈과 재연관, 대빙산의 본격적 해빙, 동토대 밑의 메탄층 대폭발,
한류 난류 복잡화로 남반구 해수면 단시간 초과상승, 화산·지진·해일·토네이도 따위의 빈발,

온난화·간빙기 교차, 죽지 않는 생물종 발생, 곤충 겨드랑이 날개가 다시 돋는 등
재진화(re-evolution) 시작, 저지대 대규모 침수, 생물종 대량 멸종, 적도에 눈이 내리는 급변,
대륙판 해양판의 충돌과 지구 자전축 북극 이동의 과학적 탐색 진행.
  
  ②동·서 선천시대 공히 보호대상이요 가장 멸시받던 미성년·여성·쓸쓸한 외톨이들이
정치 전면에 나선 것, 그것도 먹거리·물·생명·생태·교육을 어젠다로 한 직접민주주의
평화 비폭력 정치 행동으로 관철하는 문화 정치의 새 차원 출현.
  
  ③기존 지식인·전문가·종교인·언론인·정치가 등이 실질적으로 한 발 물러나
배합적 위치로 후퇴하고 사실적으로 정치가에 배합적 대의민주주의와 내각제 관련
개헌론이 거의 공론화하는 현상.
  
  ④생활자치·중앙당 공천을 배제하는 지방자치 선거 요구, 생명 평화운동의 완전 공론화.
  
  ⑤온라인, 오프라인에서 화백 민주주의 시도 확산.
  
  ⑥풍류정치, 문화정치, 68형 문화혁명과는 또 다른 정신개벽의 등장.
  
  ⑦지도자·조직·동원 체제도 없는 완전한 '활동하는 무'의 현실동력화
(전 인구의 거의 70% 이상)에 의해 보이지 않는 집단지성의 형태로
중심적 전체의 실질적 출현, 화엄개벽의 실질적 시작.
  
  ⑧기성 종교의 자기개혁 논의 활발, 종교간 원탁회의 논의, 합작 추진,
화해상생논리의 지배, 세계 조화정부론의 인구회자.
  
  ⑨다양성·자발성·차이·복합성·우발성·혼돈성·창발성·개체융합·내부공생(endosymbiosis)·
창조적 진화론의 재평가, 자기 조직화 기능의 편재 인정 분위기 상승.
  
  ⑩촛불 기간에 풍류(촛불문화제)·화백(끊임없는 단상·단하의 군중들의 혼돈한 토의
'여덟'에 연사들의 대답·수렴기능 '넷' 사이의 단하·단상 사이의 화백과 합의 구조의 토론 숙의)
이외에 음식·솥·손수레·음료수 등 화기애애한 호혜(互惠)와 함께 예절바른 교환(交換)이
결합되는 새로운 호혜 시장인 신개념의 '신시(神市)'가 나타나기 시작함.
  
  촛불의 개벽적 대전환에 참여적으로 연속되는 속에서도 중심적 전체는 총괄적으로
촛불을 꺼버리는 압도적인 비일 수 있는가?
  
  촛불에서 나타난 일반적 해체(network) 현상에 거꾸로 얼마간 꼭 필요한 정도의
부분적 중심성(integrity)을 찾고 있음에도 '활동하는 무'는 그야말로 일방적인 각 개체 단위의
붕괴를 몰아가는 바람소리일 뿐인가?
  
  촛불을 반드시 배워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현 문명은 분명 그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대서양 문명의 로테르담 중심에서 동아시아·태평양 신문명의 동로테르담
즉, 한반도의 삼면 해안으로 중심 이동하고 있다.
  
  이 새로운 문명 허브의 상징어인 동로테르담에 붙은 열쇠말, keyword가
바로 'the integrated network' 즉, '중심성이 가미된 네트워크'다.
  
  동로테르담, 즉 촛불을 남북이 함께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중심적 전체와 활동하는 무는
이미 바람소리도 비도 아닐 것이다. 분명 그럴 것으로 나는 믿는다.
  
  그리고 머지않아 북한 사상과 체제는 바라건대 수령론의 새로운 모델을
동학의 '3축-2축 철학(천지인과 음양의 결합인 '한' 사상)의 실현이었던 육임제(六任制)로부터
그 정치기능인 집강소에서 포괄적 집약의 주체(가리워져 있음)인 도집(都執)을 수령기능으로,
구체적 확산의 다양한 실무기능(드러나 있음)인 집강(執綱)을 정치국 기능으로 ,
  
  1894년 전주화약 이후 남도천지의 폐정개혁 과정에서 집강소는 일면 순수한
포접(抱接) 중심으로 '닫고'(三不入原則: 班不入 士不入 家不入) 타면 전체 다양한 대중 속으로
'열고'(중인, 아전, 상공인, 殘班 등까지도 '마당布德) 끊임없이

접(接)과 단하(壇下)의 시끄럽고 혼돈한 군중의 토론인 '여덟(八呂)'과
포(包)와 단상(壇上)의 조용한 육임(六任)들의 질서 있는 접수의 '넷(四律)'으로
구성 진행되는 이른바 고대적 팔정사단(八政四檀)의 역동적인 화백(和白)을
현대의 이상적 군중정치,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의 태양정치로
창조적으로 부활 변혁하는 시대가 머지않았음을 믿으며,
  
  그리하여 머지않아 촛불이라는 후천개벽에 대해 바람소리와 비라는
저 상고의 예기(禮記)에서 드높이 강조하는바 민중의 정치문화인
'풍우(民之風雨)'로서 중심적 전체와 활동하는 무의 정치철학이 빛나는
개벽준비 사회건설에 이바지하리라 믿으며,
  
  그 때를 전후하여 내내 줄기차게 추진되는 촛불의 생명평화운동에 의한
남한 사회 나름의 또한 원만한 개벽적 '별과 꽃의 정치'의 북상(北上)을
큰 품을 벌리어 맞으리라 굳게굳게 믿으며
  
  그리하여 머지않아 철학자 윤노빈 형이 옛 스승을 꿈결에서마저 애타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부산대 철학과 후배들을 드디어 만나 눈물로 재회하리라고
믿고 또 믿으면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선생의 시 한 구절을 띄움으로서
오늘 이 못난 촛불강연을 마칠까 한다.
  
  남쪽 별자리 원만해야
  북쪽 은하수가 제자리에 돌아온다
  (南辰圓滿 北河回)

  
  북쪽에 말 건네기 전에 남쪽에 있는 우리 자신부터 모심의 촛불공부로 원만중도를
크게 깨우쳐야만 한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란다.
  
  2008년 9월 20일
  
  일산에서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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