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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생명정치'를 지향하며 

  2008-07-29 오전 8:53:26   
  이 글은 지난 12일 천도교에서 행한 김지하 시인의 강연 전문입니다. 편집자
 

 




나를 향한 제사와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向我設位 吾心則汝心)
 
  현대 서양에서 최고의 신비가요 지혜자로 추앙받는 루돌프 슈타이너의 다음과 같은 유언이 있습니다.
 
  '인류문명사의 거대한 전환기에는 반드시 새로운 삶의 원형을 제시하는 성배(聖杯)의 민족이 나타나는 법이다. 그 민족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깊은 영성과 지혜를 지닌 민족으로서 세계에 대한 큰 이상(理想)을 품고 산다. 그러나 끊임없는 외침(外侵)으로 인해 억압되어 그 이상이 내상(內傷)으로 변질된 채 쓰라린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막상 대전환의 때가 닥치면 바로 그 성배를 반드시 인류 앞에 제시하고야 만다.
 
  로마가 지배하던 지중해 문명의 쇠퇴기에 그 민족은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그 때보다 훨씬 더 근본적 전환기인 현대에 그 민족은 어디에 와 있는가! 동방에 와 있다.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너희들은 그 민족을 찾아내어 경배하고 배우며 힘껏 도우라!'
 
  슈타이너의 일본인 제자인 다까하시 이와오(高橋巖)는 처음엔 그 민족이 일본인이라 믿고 열심히 그 증거를 찾으며 공부했으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무렵 우연히 읽게 된 조선사와 동학사를 통해 그 민족이 바로 한민족이요 그 성배가 다름 아닌 동학의 후천개벽사상임을 전율과 함께 깨달았노라고 나에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슈타이너는 또한 그의 저서 '고차적 인식으로 가는 길' 맨 앞장에서 인류 최고의 지혜이자 규범은 '모심'이라고 강조합니다.
 
  최근의 인류와 세계와 지구는 한 마디로 대혼돈, 대전환기에 들어섰습니다. 인간 내면의 황폐, 전 세계의 사회적 해체현상, 지구 생태계 파괴와 기후 혼돈으로 인한 전문명사의 종말적 위기, 기괴한 질병의 유행 등은 향후 백년 안에 지구 종말이 온다는 과장적 진단까지 낳게 하고 있습니다.
 
  호주의 여성 생태학자 발 플럼우드는 그 유일한 해결책을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모두를 우주의 공동주체로 다 함께 모시는 문화와 생활의 대변혁'에서 찾습니다.
 
  모심. 이것은 이제 서서히 대문명전화의 '열쇠말(keyword)'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최근의 촛불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병든 쇠고기는 절대로 먹을 수 없다는 이 정치적 생활선언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인간생명의 모심이면서 동시에 소에게 동물사료를 먹여 병들게 하고 감옥과 같은 어둠 속에 가두어 기르며 마치 굴뚝 공장에서 쇠붙이를 무자비하게 절단하고 용접하듯이 소의 몸을 톱질해서는 안 된다는 자연 생명계 전체에 대한 슬픈 모심의 시작입니다.
 
  대운하라는 토목공사에 대한 저 치열한 반대는 또 무엇입니까? 배가 산 위를 돌아다니게 하기 위해서 모든 산, 모든 강, 모든 숲을 깡그리 뚫고 파헤치고 막고 깎아내겠다는 거의 광우병 수준의 미친 자연 생태계 파괴로부터 그 생명을 건져내겠다는 절절한 모심의 실천인 것입니다.
 
  의료민영화 반대는 대중 생명의 건강을 위해, 공기업 민영화 반대는 최소한의 생계보장을 위해, 몰입교육 반대는 아이들의 정상적인 발육과 정신적 자유와 참다운 산 교육을 위한 실천적 모심의 외침입니다. 한 마디로 생명의 자각이며 생명의 모심입니다.
 
  그 아름다운 촛불문화제는 그리고 무엇입니까? 열한 살 소녀의 그 어여쁜 미소, 어린 초등학생, 중학생들의 춤과 노래, 수많은 젊은 여성, 주부들의 손에손에 들리운 경건한 촛불들, 그 철저한 비폭력의 관철은 평화 그 자체였습니다.
 
  생명과 평화. 이것은 촛불의 내용과 형식을 꿰뚫는 모심 그것입니다. 그것은 신령한 생명의 모심이면서 끊임없는 사랑의 친화력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수운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모심이란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음(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이올시다.
 
  촛불세대의 소통양심, 인터넷 매체를 통한 디지털 문화는 그럼 무엇이겠습니까? 최근 한국 지식인 사회의 거대한 의혹과 논쟁거리로 등장한 이른바 '집단지성' 또는 '우주적 집단지성'은 '네티즌 개체 개체들 간의 끊임없는 쌍방향 토론과 논쟁과 창의적인 파격 등을 통한 전체적 합의 과정' 즉 현대적인 자유의 진화론에서 강조하는 바 '개체-융합(identity-fusion)에 의한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 현상은 분명 낡은 문명을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그 속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적 유동성에서 전환적 계기를 확보해 가는 새로운 문명의 창조적 전환의 시작입니다.
 
  이것 역시 후천개벽의 출발점인 모심의 한 실천입니다. 수운 선생님은 모심의 세 번째 설명에서 '한 세상 사람이 우주로부터 서로 따로 따로 옮길 수 없음을 각각 자기 나름으로 깨닫고 자기 나름으로 실현한다(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로 말씀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우주로부터 서로 따로 따로 옮길 수 없음(不移)'은 주자(朱子) 성리학의 우주론적 핵심개념으로 바로 촛불세대의 인터넷 소통 양식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인 '집단지성'에 대응하는 개념인데 이것은 본디 불교의 '화엄학(華嚴學)'으로부터 비롯된 우주적 영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적 영성을 바로 모시는 것이 다름 아닌 '이 세상 사람들 개체 개체가 그것을 각각 자기 나름대로 깨닫고 자기 나름으로 실현함(各知不移)'이라는 것이 가르침의 내용이고 이것이 곧 현대의 시대 경륜과 관계될 때에 '밝고 밝은 이 문명사 개벽의 큰 운세를 각자 각자가 나름대로 실현한다(明明其運 各各明)'는 실천적 명제로 연결되는 것이니 촛불세대의 소통문화 역시 개벽의 모심이고 모심으로서 개벽하는 새로운 문화의 발랄한 창조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집단지성'은 끊임없는 쌍방향 통행과정에서 의심되고 논쟁되고 창의적으로 해석, 변경, 종합되는 활활발발한 개성적 집단지성으로 늘 새롭게 창조적으로 그 자체가 이미 개벽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이미 그 자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주어진 테마나 룰을 지키고 따르는 조건 속에서 약간의 개인적 자유 해석을 첨가하는 정도의 미국 인터넷 풍속이나 지배적인 아날로그 방식에 대한 거만한 보수적 자만심에 의해 거의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거나 사무적인 장사 속 필요 정도로 게을러 빠진 유럽 인터넷 풍속이나 창조력이라고는 한 오리도 없이 완전히 수동적 태세인 일본 인터넷 풍속이나 공산당 정부가 이미 초장부터 쳐놓은 보호막, 감시망 속에서 티베트 및 대지진 사태와 올림픽 분위기 때문에 조마조마하게 겨우겨우 창의적 숨결이 약간 트이기 시작하는 아슬아슬한 중국 인터넷 풍속과는 전혀 달리 개체의 창의성이 최대한으로 발휘되는 한국 특유의 인터넷 풍속에서는 그 집단지성의 영적 네트워크가 참으로 모심의 개벽, 개벽적인 모심으로까지 얼마든지 차원 변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촛불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고 아직은 후천개벽의 한 예감의 단계입니다. 그래서 그들 젊은이, 어린이, 여성들과 비정규직을 비롯한 이른바 '쓸쓸한 대중'이 비록 후천사상사에서 누누이 새로운 개벽 시대의 진짜 주체요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모심과 개벽을 내내 공부해 온 천도교 동학당 여러분의 그들과의 악수와 협력이 필요한데 이 또한 간절한 모심일 것입니다.
 
  이미 수십 년 전에 싸이버네틱스의 출현과 컴퓨터 발명의 미래를 예견한 바 있고 탁월한 고생물학자요 창조적인 진화론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오메가 포인트(전환점, 완성점)에 접근하고 있는 오늘의 우주진화는 특히 뇌를 통과하는 날카로운 화살'이라고 말했습니다. 개벽은 바로 뇌에서 일어납니다. 디지털 소통의 집단지성이 뇌에서 현상하는 화엄적 개벽이라는 나의 말은 전혀 비과학적 상상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개체적 모심은 결코 낡아 빠진 옛 윤리의 강요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촛불로부터 우선 배우면서 또한 촛불을 도와야 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들과 함께 대안적 생활 생명운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며 그들과 함께 온전한 개벽 사상을 토론하고 공부함으로써 이 시대의 참다운 집단지성의 새 차원을 창조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개벽적 모심입니다. 그리고 모심, 이것은 또한 저 길고 긴 지나간 선천시대에 동서양 전체, 세계 구석구석에까지 널리 퍼져서 인간의 정신과 삶을 억압해 왔던 시간, 공간, 인간 그리고 영성과 생산노동과 그 향유, 새 삶을 창조하는 가치관, 그리고 자기치유 등에 대한 잘못된 문화를 비판하고 그 진정한 대안을 발견해서 실천하는 일입니다.
 
  바로 그러한 문화 활동의 집약이 곧 제사 방식의 문제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불구하고 전 인류는 공통적으로 이제껏, 아니 지금도 역시 '향벽설위(向壁設位)'즉 벽을 향해서 멧밥을 떠놓고 신위(지방)를 그 쪽에 세워 놓고 이쪽에서부터 벽 쪽을 향해서 절 하고 빌었습니다. 벽 저쪽은 곧 내 얼이요 하늘이요 낙원이며 저승이고 신령이고 조상들의 공간이고 인간이 희망하는 유토피아이며 모든 좋은 것을 의미했습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선(線)이며 어두운 야만에서 밝은 문명을 향해 화살처럼 나아가는 진보이고 상승이었던 것입니다. 어제의 고통에서 내일의 행복에로 나아가는 것이 시간의 의미이고 역사의 진실이므로 오늘을 희생해서라도 그 역사에 일치해서 살아야 한다는 목적론이거나 유토피아거나 공산주의 낙원이나 자본주의 자동기계의 천국, 외계우주의 나라, 아니면 과거로 돌아가 같은 신화적 삼황오제와 성인들이 만들었던 고대의 질서에로 일치해 가는 것만이 참다운 역사라는 중국적 순환관 역시 또 하나의 선적 시간의 연장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내가 노동해서 얻은 밥, 즉 모든 생산물을 벽 쪽에다 갖다 바치고 그것이 다시 다 주체에게로 돌아오는 자연스런 영적 희망이나 물질의 회귀를 막고 상제인 주체가 엎드려 절하는 동안 사제나 자본가나 정치국원들이 모조리 착취하는 사이에 지금 여기 서 있는 상제(喪制)인 나, 즉 인간의 현실적 가치는 아예 무시하고 망각하는 환상의 문화였고 환상적 시간, 공간이었습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아시다시피 갑오동학이 실패한 직후 피신해 있던 경기도 이천 앵산동에서 수운 선생 득도일인 4월 5일 대낮, 1895년 4월 5일 모든 생명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대낮 정오에 바로 이 향벽설위를 나를 향한 제사 즉 향아설위(向我設位)로 바꾸어 놓고, 이 법은 앞으로 오만 년 동안 폐기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멧밥은 신위(지방)를 저 벽 쪽에서부터 번쩍 들어 제사지내는 주체, 밥을 생산하는 주체 쪽으로 조상을 영과 하느님과 낙원과 미래의 행복의 가능성과 옛 성인들의 기억, 인류와 우주진화사의 기억 전체, 그리고 삼라만상과 모든 신령들이 다 모여 있고 깃들어 있고 서려 있는 지금 여기 생생히 살아서 이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그 제사 우주체요 상제인 나 앞에 똑바로 가져다 놓고 내가 나에게 빌고 내가 나에게 절을 함으로써 비록 제한된 범위, 낮은 차원에서나마 지금 여기에서 끊임없이 제 희망을 실현시키려는 바로 그 개벽의 문화를 참답게 모신 것입니다.
 
  선생은 말씀하셨습니다.
 
  '조상의 영이 참으로 살아있다면 어찌 생명 없는 벽 쪽에 모시겠느냐" 살아있는 나에게 오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 이로써 수억 천만 년 전과 짧게는 선천개벽 후 오만 년의 시간과 수수억 천만 삼라만상과 우주 무한 공간과 깊이 모를 수만 층의 여러 신령들이 다 지금 여기의 제사 상제인 나 안에 함께 살아있고 미래에 이루어질 온갖 꿈과 소망과 가능성과 변화의 씨앗들이 지금 여기 나 안에 다 함께 서려 있음을 똑똑히 깨닫게 될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셰르는 불가침의 시인 기욤 아뽈리네에르의 저 유명한 시구절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르고'를 무식한 소리라고 일거에 뒤집어엎었습니다. '흐르고'라는 불어가 아마도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으로 흐르는 선적(線的)인 이동을 표현하는 낱말인 듯합니다.
 
  '아뽈리네에르는 세느 강을 모른다. 강물은 표면으로만 보기에는 산 쪽에서 바다로 선적으로 흐르는 듯하지만 표면만이 강의 전부는 아니다. 표면 아래서 강물은 역류(逆流)하기도 하고 폭발하기도 하고 선회하기도 하기도 하고 서로 충돌해서 소리소리 지르며 울기도 한다'
 
  시간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공간 역시 그와 비슷한 원리이니 불교의 법망경(法網經), 화엄경(華嚴經)과 같은 그물과 그물코의 원리로 확산수렴하면서 그것들은 인간 안에서 항상 행동하며 지금 여기 그렇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4천 여 년 전 고조선의 대사상서인 '천부경(天符經)'은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人中天地一)'고 했습니다. 시간과 공간 역시 그럴 것입니다.
 
  이미 유럽 사상계에서도 선적(線的) 시간관, 역사관은 망상으로 치부되고 있고 비선형동역학(非線形動力學)과 비평형혼돈론(非平衡混沌論)이 대유행이며 공간론 역시 크게 흔들리고 있으나 제사 방식, 즉 문화적 원형질만은 동서양과 세계 모든 문화와 문명에서 아직도 잘 안 바뀌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치료에 있어서 칼 융은 근대유럽의 역학적 구조론과 같은 프로이트 류와는 크게 다르게 정신 속으로부터 그 밖으로 나아가고 다시 그 상처의 깊은 속으로 들어가는 반복적 상승과 차이를 동반한 순환 확장적 반복법 즉 확충(擴充, Amplification)의 임상치료법을 사용했고 우리 민족의 집단적 정신치유기능인 탈춤 또한 이와 비슷한 원리를 보여주고 있으며 또 이것과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것이 불교의 '참선법(參禪法)'이기도 합니다만 바로 여기에 기초한 듯 보이는 것이 싸이버네틱스 뇌과학 원리이고 그 반영인 컴퓨터의 작동원리인 듯합니다. 컴퓨터의 원리와 불교의 색공론(色空論)이나 동학의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와 거의 흡사한 'no-yes, yes-no' 'on-off' 'off-on'인 점이 바로 그것을 증거합니다.
 
  영과 생명의 에너지는 지금 여기 나로부터 긍정·부정, 어둠과 빛 사이에 반복왕래하면서 한없이 과거와 현재, 여러 층위의 생명복합계를 순환하고 확산하면서 동시에 질적 차원 변화와 더불어 와서 나의 지금 여기 안에로 반복 수렴되는 확충운동을 하는 것이고 이것이 다름 아닌 바로 개벽이며 후천 중심의 선후천합발의 생성인 것입니다. 또한 바로 이 생성이 결국엔 참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디지털 문명과 촛불세대는 분명 현실 문명을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놔둔 채, 미래적 유토피아에 중독되지 않은 채 다만 '지금 여기'를 생활적으로 풍요하게 하는 데에 몰두합니다. 이 점을 예의 주목해야 합니다.
 
  향아설위를 촛불과 함께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공부를 통해 그 내용이 더욱 철학적으로 실천적으로 행동하고 철저하게 개혁된 집단지성 중심의 살아 있는 문화개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잡아보는 것은 어떠할는지요? 이제 이야기는 거의 결론 부분에 이른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촛불들의 일상적인 생활문제로서의 음식 문제와 생명문제, 건강, 생계, 교육의 대안적 실천에 관한 생활생명적 대중 운동의 철학적 기초인 '사회적 공공성'을 생명학적 기초에 단단히 세우는 것, 그리고 대운하 등 생태 문제와 기후 변화, 에너지 문제와 우주 및 지구 전체의 변동, 문화 및 세계관 등과 연결된 근본 가치체계인 '우주적 공공성'을 다시금 검토하고 이 두 가지 공공성을 서로 이중적으로 연결해 통합적으로 인식, 실천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현실 문제는 어떻습니까?
 
  그리고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의 창조적 종합으로서의 새로운 화백민주주의로 정치를 개벽하는 문제와 함께 동서양 사이의 문화, 사상, 영성, 치유, 과학 등 창조적 대융합에 대한 문명사 전체의 개벽문제 등이 남아 있습니다.
 
  새만금에 대한 스님과 신부의 '삼보일배'는 현실적ㆍ법적으로 실패했으나 그 도덕적 영향력만은 크게 주었습니다만 천성산 터널 개통을 막는 지율 스님의 단식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천성산 도롱뇽은 소송주체가 될 수 없다'라는 법철학적 문제를 남겼습니다.
 
  이것은 삼보일배만도 못한 양면에서의 실패의 기록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의 생활, 생태, 생명의 개벽운동에서 이 문제를 참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유럽과 전 세계, 그리고 한국의 법제는 명백히 휴머니즘이 그 기초입니다. 때문에 자연생명에 관한 법적 권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즉 반(反) 개벽적입니다. 어찌해야 하나요?
 
  또 그에 준해서 시민운동 역시 인간권익운동은 있어도 자연권익 같은 것은 운동 이전에 아직 엄밀한 차원의 관심이나 법적 보장은 아예 없습니다. 철학적 기초가 마련되지 않은 것입니다. 치열한 법철학 논쟁이 벌어져야 합니다.
 
  지금의 법률이나 철학이나 윤리, 상식 등은 유럽에서 시작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계약'에 기초해 있고 그것을 현대적으로 보완하는 후썰, 하버마스, 한나 아렌트 등의 철학적 테마인 '생활세계' 개념도 인간과 인간의 마음 사이의 상호 소통과 일치에 기초한 시민사회론, 즉 '사회적 공공성'에 한정돼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그대로 존중되고 추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촛불의 경우 이미 쇠고기 문제나 자연환경 생태문제, 건강, 생태, 생계의 절대성, 교육의 철학 부재 등에서 생명권 문제가 이미 지난 두 달 동안 날카롭게 제기된 점에 비추어 '사회적 공공성'의 차원에서, 후썰의 '생활세계(Lebenswelt)' 개념도 포괄적, 고차적인 '생명세계'로 동시 해석될 수 있는 여지의 철학성 자체가 서구 교육이 기초가 돼 있는 점은 세대와 서민운동들에게 대중적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생활가치, 생활정치의 기본은 생명가치요 '생명정치'(Biocracy)'입니다. 시민 권익운동의 생활 문제제기 밑에 언제나 바로 이 같은 생명의 차원이 들어있어야만 하겠습니다. 이미 유럽에서는 미셸 셰르에 의해 루소의 '사회계약'에 대비되는 '생명계약'이 요구되기에 이르렀고 법철학논쟁이 이어졌으며, 극히 제한된 차원에서이지만 '동물보호'의 현실문제 등등 소폭의 실정법 개혁으로 일단 나타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엔 역시 까다로운 동서양 사이의 철학문제가 따릅니다. 문제는 바로 그 '계약' 사상에 있는 듯합니다. 계약! 이것은 역사적으로 사막종교의 전통에서 이어진다는데 동아시아의 경우 우주와 생명생태적 철학전통에서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는지요?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우주운행의 조리(條理)와 인간생활의 윤리(倫理)는 일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오면서 그 조리와 윤리는 분리되었고 그 결과로 사(私)가 공(公)을, 생활이 생명을, 속물적 개별성이 통합적 전체성을 거꾸로 일방적으로 참월하며 능멸하게 됩니다.
 
  수운 선생이 '지극히 공번되고 사심 없음(至公無私)'을 요구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전체성(不移)은 개체성(各知)에 의해 실현된다고 가르칩니다. 사(私)와 개(個)는 다른 것입니다.
 
  문제는 소통의 영역입니다. 세상이 혼돈에 빠져들 때 그 혼돈 자체의 근본적 질서, 지극한 근원의 우주에너지의 개별적 인식으로 생활적 개벽을 성취코자 한 것이 바로 수운 선생의 동학입니다.
 
  현대 진화론의 제1원리인 '개체-융합(identity-infusion)'이나 촛불들의 디지털 문화, 인터넷 문명의 논의구조인 '포털'에서 집단지성과 네티즌 개인들의 끊임없는 소통과정을 통한 합의 구조의 직접민주주의, 온라인 화백, 그리고 그에 이은 광장의 오프라인 화백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요?
 
  선생은 한울님과의 문답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계시를 받습니다.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吾心則汝心)'
 
  나와 네가 우선 인간일 경우 이것은 시민사회의 소통과 일치, 생활세계의 기초로서 시민사회운동의 철학적 기초인 '사회적 공공성'으로 발전한 게 됩니다. 물론입니다. 이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한울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때의 '내마음(吾心)'은 곧 '한울님의 마음', 즉 '우주의 핵(김일부의 정역(正易)에서는 '天心月'이라, 전통유학에서는 '無中碧'이라고 부릅니다)'입니다.
 
  그러면 '네 마음(汝心)'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마음' 또는 '개별적인 한 인간의 마음'이 됩니다. (김일부의 정역에서는 '皇中月'이라, 전통유학에서는 '虛心丹'이라고 부릅니다)
 
  곧 촛불세대 개개인, 네티즌 개인의 영성이요 마음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곧 '우주와 인간의 영적, 정신적 일치', 바로 화엄학적인 선(禪)불교의 '불심(佛心)' 혹은 원(圓)불교의 소태산(少太山) 선생이 강조하는 '일원상법신불(一圓相法身佛)'이니 화엄불교나 참선, 동학 등 남조선사상사의 개벽론에 전하면서 앞으로 보다 풍요로운 내용을 갖추고 보다 신령스러운 영적 진작을 갖게 될 것이 틀림없는 촛불 인터넷 주체들의 '우주적 집단지성'일 것입니다.
 
  이 때에 인간과 우주 양쪽을, 개별 속에서 융합을 실현하는 '우주사회적 공공성'의 통합이 실현되고 이 때에 비로소 촛불세대의 참다운 개벽 주체로서의 차원이 열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동학은 애당초부터 '사회혁명'이면서 '우주혁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디지털 문명문화의 새 세대와 동아시아의 화엄적 선불교를 망막으로 하고 후천개벽적 동학을 눈동자로 하는 전통 세대 사이의 협동과 합발(合發)이 만드는 '궁궁촛불'이 태어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궁궁(弓弓)'은 아시다시피 동학의 개벽사상 및 실천의 상징입니다. 본디는 '태극(太極)궁궁(弓弓)'입니다만 저는 평소 대혼돈(Big Chaos)이 지배하는 이 어지러운 시대에는 궁궁이 태극에 앞서는 '궁궁태극'이라고 표시해야 한다고 말해왔으며 그 까닭은 나의 다른 글에서 이미 밝힌 바 있어 생략하고 이 경우는 그 혼돈적인 질서에 따른 독특한 실천(지난 번 광장민주주의 촛불과 같은 비폭력 평화 행동의 경우)을 표상할 때 '촛불궁궁' 또는 '궁궁촛불'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궁궁'은 고조선 주몽(朱蒙)의 슬로건인 다물(多勿)의 상징이기도 해 대륙에서의 옛 만 4천 년, 또는 5만 년 전의 우주 평화 시대의 회복과 앞으로 해양 대교역 시대를 열어갈 장보고(張保皐) 류의 해상 개벽의 메타포이기도 합니다. 이 설명 또한 이미 다른 기회에 한 적이 있어 생략합니다.
 
  브랜드가 중요한 시절입니다. '촛불궁궁', '궁궁촛불'의 이 브랜드는 머지않은 날 전 세계에 널리 확대될 것입니다. 세계와 지구가 개벽 시대에 진입해 있으며 모심에 의한 생명살림 운동, 또 모심과 실림의 밑에서 어느 날 그 숨어 있던 깨침의 차원이 문득 드러나 아름답게 개시(開示)할 것입니다. 그 때 화안히 촛불 켠 바로 그 브랜드 그 싸인마크가 두루두루 모든 생명게, 영계를 비출 것입니다.
 
  내내 수동성을 면치 못하는 일본 네티즌들과 특히 한류와 욘사마 때 이미 보았듯이 여성을 중심으로 한 영성적 시민들 사이에 미국의 아직 탐험정신을 잃지 않은 영성과 생명평화 지향자들, 자기 혁신을 추구하는 네티즌 세대 사이에, 동아시아를 바라보고 있는 유럽의 동방회귀(EAST TURNING) 지식인 세대 사이에, 그리고 어쩌면 이제 막 숨구멍이 트인 조마조마한 중국의 2억 5천만 네티즌들 사이에, 나아가 전 세계 시민들과 동식물과 물, 햇빛, 공기와 바람, 돌과 쇠의 입자들, 생각과 무의식의 움직임 속에서 마치 모심과 개벽이 잔잔한 눈부심처럼 크게 일어날 때 이 영부(靈符)의 싸인마크와 브랜드는 모든 시커먼 고통과 질병 위에 쌔하얗게 쌔하얗게 '흰 그늘'이 되어 빛날 것입니다. 이때 드디어 '푸른 하늘 흰 해의 바른 기운 마음에 네 바다 모든 형제들이 도무지 한몸일세(靑天白日 正氣心 四海同胞 都一身)란 해월 선생의 시의 세계가 나타날 것이요, 마침내 '하루에 한 꽃 피고 이틀에 두 꽃 피고, 사흘에 세 꽃 피고 삼백육십일 삼백육십 꽃 피어 만년 나무에 드디어 천 떨기 꽃이 핀다'(一日一花開 二日二花開 三日三花開 三百六十日 三百六十開 萬年枝上 花千朶)는 진화의 막바지 지극한 변화의 시절(至化点), 떼이야르의 이른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를 가리키는 수운 선생의 지극한 시구절인 주문 '지극한 기운'이 지금 여기에 이르니 크게 나에게 내리시어(至氣今至 願爲大降) 만사를 크게 깨치는(萬事知) 날이 바로 다름 아닌 오늘이 되는 후천개벽이 이를 때 그 브랜드가 드디어 현실화할 것입니다.
 
  해월선생은 개벽의 때를 '모든 산 푸르러지고 모든 길에 비단 깔릴 때 이 땅이 만국과 교역할 때 만국의 병마가 다 이 땅에 들어 왔다가 모두 다 이 땅을 떠날 때'라고 말씀했습니다.
 
  산은 많이 푸르러졌습니다. 대운하 같은 대규모 환경 파괴만 없다면 조금은 잘 되겠지요. 길바닥은 장바닥이기도 하니, '장바닥에 비단 깔릴 때'라 이제 여기저기서 조금씩 '계'와 '품앗이'가 '호혜와 교환의 성스러운 이중시장(神市)'으로 발전하더니 저축은행과 민중교역과 사랑의 서민은행들, 여러 가지 사회적 기업들이 나타나 그 옛 아시아의 시장들처럼 호혜와 교환과 더불어 획기적 재분배의 시대가 다가올 조짐들이 없는 것도 아니요, TSR, TCR등을 통해 유라시아대륙과 교역하고 세계 1위의 조선기술을 바탕으로 삼면의 바다로 나아가 전 세계에 해양 무역을 확대할 시대, 남북통일 시대가 현실적으로 다가올 때 미국 주둔군의 헤드쿼터가 하와이로 철수한다는 설도 조금씩 고개를 듭니다.
 
  그렇다면 개벽은 오히려 가깝지 않을까요? 또한 해월 선생은 궁궁부적이 중국에 상륙할 때가 바로 후천개벽의 때라고 말씀했습니다.
 
  중국 2억 5천만 네티즌들은 올림픽 직전에 주어진 최근의 조마조마한 자유를 조심스럽게 즐기고 있으나 중국당국은 그들에게 촛불이 옮겨 붙을까 또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중국은 공자의 화해(和諧)사상, 즉 세계 화해와 인류의 평화로운 조화를 목표로 하는 사상과 그 과정을 설명하는 주역의 그들 나름의 태극원리를 되살리고자 원칙적으로는 백방으로 애쓰고 있습니다. 비록 티벳과 위구르에서 총질하고 한민족 역사를 도둑질하면서도 현실 교육과 정치원칙, 사회적 실천에서 가령 촛불이 중국 네티즌들에게 옮겨붙는다 합시다.
 
  그러나 그 때 촛불이 '궁궁'과 결합하며, 더욱이 한발 더 나아가 동학 본래의 부적원형인 '태극 궁궁 촛불' 또는 '촛불 태극 궁궁' 또는 '촛불 궁궁 태극'일 때 평화의 잔치인 올림픽을 열고 비록 선전만이라도 문화의 시대, 개벽의 시대, 화해와 세계와 우주 평화를 앞세운 공자의 나라 중국이 평화와 상생의 원리인 '태극'을, 더욱이 생명과 비폭력, 평화를 내세운 촛불을 맹목적으로 밟아 끄려고 쇠파이프와 몽둥이와 방패와 물대포만 쏠까요? 하긴 그럴수도 있지요,.
 
  한류 경우도 그와 비슷했고 고구려 역사 강탈과 요하문명사 강탈, 홍산문화(紅山文花) 독점, 나아가 검은 옥그릇(黑皮玉)을 둘러싼 파미르 고원의 1만 4천 년 전 마고성(麻姑城)이라는 한민족 시원의 신화까지도 저희 역사에 강제 편입시키려 하는, 그래요! 꼭 그 누구와 닮은 친구들이라니까요.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중국민중, 지식인들이 그리도 몰지각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세계 후천개벽의 첫 발신지가 분명 한반도라는 사실, 처음에 인용한 루돌프 슈타이터가 예언한 '성배(聖杯)'가 바로 이 민족으로부터 시작해서 새 문명사 전체를 만들어간다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후천개벽의 큰 뜻을 간직한 '깨침'과 '모심'으로 무장한 새 살림꾼 촛불들이 광범위한 촛불 좀비 전략을 발전시킨다면, 우선 국내에서 원불교를 비롯한 정역, 남학, 증산 등 수많은 개벽 종교들과의 무조직적 합의 운동인 열린 연대와 실천의 여러 종교들. 유교와 도가와 선도, 천주교, 기독교와 이슬람, 특히 화엄적 선불교와의 참으로 툭 트인 사랑적 종합 및 실천적 연대에 의한 깨달음과 개벽의 구체적 생명, 평화운동은 이 모든 걸림돌들을 반드시 그러나 서서히 넘어서고 또 넘어서게 하고야 말 것이라고 믿습니다.
 
  포접(包接)제와 육임(六任)제의 현대적 의의는 아직도 청청합니다. 그러나 현대적인 조직 없는 조직, 소통과 합의의 집단지성으로서의 열린 연대를 부디 시도하십시오. 나는 그것을 일단 開闢(개벽) 이른바 화엄개벽이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해월 선생 말씀을 한마디 인용하면서 이 강의를 마칠까 합니다. 해월 선생은 그 스스로 평생을 폭력 혁명 족(動世開闢)보다는 평화로운 개벽운동(靖世開闢)에 보다 더 몰두하면서 특히 그 미래의 주체로서 어린이를 한울님으로 존중하여 때리지 못하게, 억압하지 못하게 엄중히 말리고 뱃속의 아이마저 한울님이라 했으며 여성을 개벽의 실천적 주체로 보고 여성주부들의 살림과 수련원칙인 내칙(內則), 내수도문(內修道文)을 동학실천의 제 1 원칙으로까지 들어 올리신 분이었음에도 어느 날 이렇게 어린이와 여성에 대한 최고의 '모심'을 강조해 말씀하섰습니다.
 
  '나는 어린이나 아낙네에게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운다.'
 
  우리는 촛불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것도 깎듯한 모심으로 배워야 합니다. 때가 왔습니다. 우선 광범위하게 지속적으로 그들을 만나십시오. 마음을 비우고 그들을 모시는 것이 첫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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