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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문제는 호혜야!
2008/11/26 10:48

                     경제? 문제는 호혜야!




loss에 대한 공동체적 합의와 공유의 과정을 처절하게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웃으며 손짓하는 누더기 막장 자본주의에 홀려 은근슬쩍 휩쓸려 갈 것이다.



  호혜(互惠 mutual benefits) 그리고 호혜경제를 잠시 생각해 본다.

  예전에 클린턴이 아버지 부시를 이길 때 내걸어서 유명해진 선거구호가 생각난다. “It's the Economy, Stupid!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문제는 호혜야!

  


1. 호혜경제는 호혜 자체가 목적이자 의미


  동어반복은 아니다. 호혜경제는 경제가 아니라 호혜가 전부가 아니겠느냐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허다한 수식어가 붙는 경제의 영역(이를테면 금융경제 실물경제 등등)과 동급으로 놓이는 호혜경제라면 뭔가 이상하다. 호혜경제란 아마도 전혀 다른 패러다임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사전에서 경제란,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생산-분배-소비하는 모든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라고 정의된다.

  이 일반적인 정의를 빌리자면, 호혜경제는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호혜적으로 생산-분배-소비하는 모든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호혜적인 사회적 관계>라고 하면 되나? 뭔가 이상하다.

  이상하고 뭔가 어색한 이유인 즉, 생산-분배-소비활동을 호혜적으로 풀고, 사회적 관계를 호혜적으로 맺는다는 것, 그러니까 호혜하자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의미인지가 선뜻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경제>라고 할 때, 단순히 차가운 분석의 대상으로만 삼기 때문에 굳이 그 의미를 탐구하거나 실천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호혜경제를 이야기 하는 방식은 다른 것 같다. 호혜경제의 경우, 호혜는 대상이나 수단이 아닌 목적과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2. 호혜는 신뢰


  현재는 경제위기를 넘어 全자본주의적인 파탄을 코앞에 두고 있는 듯하다. 이제 와서는 너나없이 신뢰의 파국, 국가와 시장에 대한 불신을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늦었지만 반갑다. 이미 신뢰라고 부를 수 없는 모래위에 지은 집. 그것이 영광스러운 자본주의 승리와 영원한 성장 담론이었다. 다들 상식적으로는 알면서도, “정말 이게 유지되려나? 끝까지 가려나......?” 속으로만 물으면서, 너나없이 거품을 제조해왔다.

  그러면 이른바 <pie 키우기>라는 현대의 신화(神話)가 이제야 완전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과연 무엇이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허위인가, 생명인가?


  지구멸망 이후를 다루고 있는 영화들을 기억하시는지. 살아남은 극소수들의 폭력성과 권력재구성에 회의하고 절망하는 영화들이 참 많다. 결국 시스템(그게 경제든 지구든)은 일부 혹은 폭삭 무너질지언정, 더 큰 파이를 추구했던 내재된 자본주의적 욕망과 그것을 획득하려는 폭력은 결코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통찰이지 싶다.


  호혜는 신뢰 자체, 신뢰의 다른 이름인 듯하다. 경제관계에서 신뢰의 회복을 위한 방식으로 채택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목적이다. 사회적 진리의 다른 표현에 가깝다. 신뢰가 깨진 자리에, 미봉책 또는 부분적인 모델로 호혜경제가 들어서는 것이 아니다. 들어서려면 호혜가 들어서야 하는 것이다.



3. 호혜(互惠)의 신뢰 작동방식은 호손(互損)이다.


  사실 자본주의에 푹 젖어있는 우리들에게 경쟁력과 성장이란 단어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모든 육감(六感)을 자극한다. 그러면 조금 덜어내어서 경쟁력을 →호혜로, 성장을 →자립으로, 경제주체(생산-소비자)를 →공동체로 바꾸면 어떨까? 다소 무리한 연결인지는 알지만, 뭐 상당히 그럴듯하다. 더 매혹적이다.

  그러나 끝까지 물음을 밀고 가서 되물으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결국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작은 파이를 모자란 듯 기꺼이 나누게 될 것인가?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결국 작은 시스템을 만들어서? 잘 모르겠다.


  솔직하게 고백할 때인 듯하다. 호혜, mutual benefits은 또 다시 benefits의 달콤한 환상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협동하면 서로 이익을 누린다는 주장은, 동전의 한 면일 뿐이다.


 서로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것, 호손, mutual loss. (이런 표현이 있든 없든) 이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지 싶다. 그러니까, 호혜를 말하는 순간, 호손 도한 호혜만큼의 비중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까먹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모두가 행복하고 편안하고 이익만 누릴 수 있는 길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고등학교 상업시간에 배운 바로는, 부채(debt)도 자산(property)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어느 공동체이건 loss는 궁극적으로 자산이 된다. 그걸 지혜롭게 간직하느냐, 남 탓하다 마느냐, 뭐 그런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만일, 호혜경제를 논하면서, 또 습관적으로 benefits에 대해 기대를 건다면, 그게 스스로는 힘드니까 거버넌스니 사회적기업이니 하면서 테크닉에 의존한다면, 호손의 자산화는 커녕 결국 호혜도 물 건너 갈 듯하다.


  loss에 대한 공동체적 합의와 공유의 과정을 처절하게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웃으며 손짓하는 누더기 막장 자본주의에 홀려 은근슬쩍 휩쓸려 갈 것이다.



4. 호혜와 호손, 마음 덜기


  예수의 비유가 하나 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데려오는데, 새벽에 몇 명 낮에 몇 명 오후 5시 해질 무렵에 몇 명을 데려왔다. 주인은 6시에 모두에게 똑같은 급여를 주었다. 다음은 성서 인용이다. 나름대로 유명한, 첫째와 꼴찌 비유이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당시 노동자 일당)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 20장)


  이 비유에 비유하자면, 이 상황에서 호혜는 성취되었다. 누구나 이익을 보았다. 문제는 투덜거리는 사람들이다. 상대적으로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노고에 비해서 말이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사정 어려운 옆집 사람이라고 해도, 비합리적인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그들의 합리성은 공동체성을 넘어서 있는 무엇이다. 5시에 온 사람들은 어떨까? 앗싸, 땡 잡았다? 성서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들도 새벽부터 일 했으면, 똑같이 반응했으리라.


  따라서, 호혜와 호손을 함께 성취하는 유일한 길은 아마도,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불필요한 마음을 더는 무엇일 것이다.


  공동체를 벗어나면, 첫째가 꼴찌로 전락한다. 꼴찌도 첫째를 노린다. 대표적으로 자본주의가 그렇다. 개인의 주체적인 경제활동이란, 사실 따뜻한 공동체 바깥의 무한경쟁을 의미한다.

  반면에 공동체 안에서는 그저 하루의 생존이 함께 해결된다. 손해 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습관적으로는 명백한 개인의 손해로 보이더라도, 모두 호혜와 호손을 통해 공동체적 자산으로 축적되기 때문이다.

  믿을만한 공동체 안에서만 욕심을 줄일 수 있고, 욕심을 줄여야만 공동체가 믿을만하게 유지될 수 있다. 호혜와 호손은 그 안에서 어쩌면 성취될 수도 있지 싶다.

  


5. 귀농과 호혜


  ① 착한 귀농자들이 있다. 냉정하게 말하면, 어느 공동체에도 속하지 못했으며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가 그토록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農과 땅심을 지키려는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손해를 감수하고 있다. 문제는 그 손해를 나누어 짐으로써 미래를 지탱하려는 공동체가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좀 수완이 있는 사람은 회원제 직거래로, 지역 조건에 따라 어떤 사람은 한살림 생산자로 공동체에 기댄다. “여러분, 귀농자를 각별히 챙겨주세요”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우리 주변에는 그들보다 백배는 더 챙겨야 할 사람이 많다. 다만, 도시와 농촌의, 조직과 개인의 접점은 있지 싶다.


  ② 착하게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귀촌이든 뭐든 농촌으로 가서 사는 것이 道에 가깝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태생적으로 자본주의 경쟁이나 허장성세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쉽게 타협하고 절망하게 되는 지점이, 농촌에서도 여전히 상존하는 성장과 경쟁이다. 대안적 삶의 방식은 여러 선택이 가능하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호혜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을 얻고 싶어 하면서 주고 싶어 한다. (호혜 운운하는) 책임 있는 사람들이 그 틈새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을까? 관습적인 타협의 방식 말고, 다소 로맨틱한 진정성으로 말이다. 그들이 단 몇 명이라도 말이다. 이 사람들은 보기보다 어리숙하지는 않다. 마치 예수에게 기적을 요구하던 유대사람들처럼, 그저 확신과 동력을 원하고 있다. 공동체와 신뢰를 제시할 수 있을까? 그 접점도 역시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앞선 사람들이 솔직할 수 있으면 말이다.

 


6. 호혜, 있기는 있을까?


  호혜는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이론도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학교급식운동에 있어서 운동 이전에, 우리 마을 아이들이기에 내 쌀을 그냥 무상으로라도 먹이는 마음. 그 언저리에 있지 싶다. 그런데 그런 호혜의 마음이 우리 곁에 있기는 있나?


  도덕경의 한 구절.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시위천지근 면면약존 용지불근) 이것은 천지의 뿌리와도 같은 것이지만 그 이어짐이 실낱같이 가늘어서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듯이 존재하며, 막상 써먹으려고 하면 의외로 뜻대로 잘 되지는 않는다.


  호혜는 있는지 없는지 가물가물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 잘 모르겠다. 그래도 유행처럼 경제 논쟁에 열 올리기보다는 차분히 호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계속 하다보면 공감이 생기고 쌓여서 길이 엿보이지 않으려나? 호혜든 호손이든, 면면약존! 다시 말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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