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문화곳간

(펌)한 지붕 아래서 신들과 함께 살았었지

흰그늘 2008. 9. 24. 13:58

한 지붕 아래서 신들과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 매캐한 연기와 그을음 속에 몇 명의 며느리가 시집 온 것을 지켜봤던 조왕신은 소박했다. 겉
보리 한 바가지에 일희일비하던 안주인처럼 조왕신은 부뚜막에 올라온 물 한 그릇에도 고마워
했다.
ⓒ 김태성 기자

한밤중에 측간 가기가 승냥이 소리를 들으며 공동묘지 옆을 지나는 일만큼 무서웠던 시절이 있었다. 집집마다 부르는 이름은 달랐겠지만 그곳에는 변소각시(측신)란 괴팍하고 엽기적인 신이 살고 있었던 탓이다. 

  악은 언제나 매혹적인 법. 변소각시는 삼단같이 길고 비단결처럼 고운 머리카락을 치렁거리는 젊고 아리따운 여인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짐짓 긴 머리카락은 사람을 낚아채 두려움의 심연 속으로 끌고 당기는 변소각시의 촉수일 따름이었다.

  변소각시의 악행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변소각시한테 걸려든 사람치고 살아 돌아온 사람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변소각시 앞에서 사람들, 특히 아이들은 연전연패했다. 생존자가 없었으므로 이런 패전 소식들은 모두 들은 얘기일 뿐이었지만 그래서 더 두려웠다. 하는 짓도 해괴했다. 평소 변소각시는 일삼아 저 으스스한 머리카락을 발가락에 걸고 한 올씩 셌다고 했다. 그야말로 변소각시는 소름끼치는 존재였던 것이다.

짬짜미 하듯 집안 한구석씩을 사이좋게 나눠 가진 착한 신들
  그러나 변소각시 말고 집안에는 착한 신들도 많이 살았다. 대청의 성주신, 안방의 조상신과 삼신, 부엌의 조왕신, 장독대의 철륭신, 문간의 문신처럼 집안 곳곳에는 신들이 똬리를 틀듯 좌정해 있었다. 그들은 짬짜미를 하듯 집안 한구석씩을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 이처럼 온갖 신들의 집합소였던 집은 작은 만신전(萬神殿)과 다름없었다. 

 

▲ 엄연히 문신이 깃들어 있을 터이지만 사나운 표정의 얼굴을 내
세워 문을 지키고
ⓒ 김태성 기자

그렇다고 이런 신들이 마냥 놀고먹는 식객들이었던 건 아니었다. 대청 대들보에 좌정한 성주신은 집 전체의 안녕을 관장했다. 조왕신은 식구들의 등을 따습게 하고 배부르게 했다. 설령 늘 그 일에 성공했던 건 아닐지라도 그렇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을 것이다. 삼신은 엄마 뱃속을 나와 당신이 시집을 가고 군대를 갈 때까지 지켜봤고, 철륭신은 당신이 군복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함께 했으며, 업신은 집안이 곤궁할 때마다 희망을 접지 말라며 어깨를 토닥였다. 그들은 집안의 지킴이였고, 현재의 고단함과 미래의 꿈을 나눈 동지였다.

부뚜막에 올라온 물 한 그릇에도 고마워하는 조왕신
  이 동지들은 한곳에 오래 산 탓인지 조금씩은 그 집안 식구들을 빼닮았다. 어떤 집의 성주신은 문밖출입이 잦았다. 굿을 해서 달랬고, 귀가를 바라며 점쟁이한테도 가서 자문도 구했다. 어쩌면 역마살이 낀, 풍채 좋은 그 집의 바깥주인과 닮은꼴이었는지 모른다.

매캐한 연기와 그을음 속에 몇 명의 며느리가 시집 온 것을 지켜봤던 조왕신은 소박했다. 겉보리 한 바가지에 일희일비하던 안주인처럼 조왕신은 부뚜막에 올라온 물 한 그릇에도 고마워했다.

  각박한 살림을 아는지 신들은 작은 선심에도 후뭇해 했다. 조왕신은 섣달 스무닷새가 되면 하늘로 올라갔다. 옥황상제께 그간 집안에 있었던 일을 상주하러 가는 길이었다. 앞으로 1년, 집안의 식록(食祿)은 이 때 조왕의 입에 좌우될 판이었다. 그래서 조왕이 집을 나서기 전날, 아낙네는 조왕의 입(아궁이) 주위에 달콤한 엿을 발라주곤 했다.

그래도 신은 신이었다. 조상신의 현신(現身)인 신주단지는 가장 먼저 수확한 햇곡으로 채워졌고, 조왕신이 좌정한 부뚜막엔 누구도 함부로 걸터앉지 않았다. 심지어 변소각시가 놀랠라 사람들은 측간 앞에서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냈다. 모기만큼이나 ‘멸종’되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존재였건만 그런 변소각시한테도 이런 예를 갖췄으니 신에 대한 공경에 대해선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 하늘의 기운이 들어오는 지붕. 전에는 잡귀를 쫓기 위해 도깨비
얼굴을 새기던 바래기 기와에 요즘은 복자가 새겨진다.
ⓒ 김창헌 기자

집은 지켜내려는 신들과 쳐들어오려는 잡귀들의 전쟁터

  그런데 그 시절엔 왜 그리 집에 신들이 많았던 걸까. 아마도 그 시절엔 두려움과 불안, 희망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던 탓이리라. 그리고 그 복잡한 세상에 집은 모두가 아는 유일무이한 안식처였다.
   또한 그 곳은 신들이 아는 유일무이한 안식처이기도 했을 터. 이 때문에 집밖 신인 잡귀들도 늘 집안을 염탐하고 기웃거리곤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 때문에 집은 지켜내려는 신들과 쳐들어오려는 잡귀들의 전쟁터였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집 지킴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엄연히 문신이 깃들어 있었건만 호랑이나 용의 형상을 한 그림과 글자가 대문을 지켰다. 문틀 위에는 다시 엄나무가 찢어질 듯한 가시눈을 뜨고 걸터앉아 있었으며, 그 곁에는 누렇게 달뜬 얼굴로 부적이 괴이한 표정을 지으며 문 아래를 주시했다. 전선의 최후방인 장독대에도 봉숭아와 맨드라미가 화염같이 빨간 빛을 발하며 철륭신을 보좌했다. 유비무환, 물샐 틈 없는 경계태세, 이것이 옛집에서 신들과 함께 살면서 보아온 우리네 삶의 풍경이었다.

▲ 장독대의 철륭신을 보좌하기 위해서는 화염같이 빨간 빛의 봉숭아나 맨드라미를 심었다. 이
집엔 붉은 샐비어가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다.
ⓒ 남인희 기자

오로지 자신의 전선만을 지킬 만큼 고지식했고 순진했던 신들

  그렇다고 이 전쟁터가 피 튀기는 살벌한 곳이었다고 연상하면 안 될 터. 집지킴이 신들은 오로지 자신의 전선만을 지킬 만큼 고지식했고 순진했다. 그들이 상대한 잡귀들도 그러기는 매한가지.
  잡귀들은 병문안을 다녀온 신발에, 궂긴 소식을 담은 부고(訃告)에 들러 붙어왔을 만큼 악착스러운 한편 꽤나 어수룩했다. 아무리 영악한 잡귀라도 월담을 몰랐다. 그래서 문 지킴이는 문만 잘 지키면 그만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신들과 살았다. 그 때는 어설펐고 순진했던 우리네 어린시절이었고, 어둡고 눅눅했지만 아늑함과 따스함이 함께 배어나던 오래된 삶이었다. 신들은 그런 시간을 담고 있었고 그래서 소중했다.
  볏가리에 깃든 업신은 가을마다 새 볏짚을 덮었지만 그 아래의 묵은 볏짚을 벗겨내는 일은 없었다. 켜켜이 쌓인 집안의 오랜 시간처럼 신들은 그렇게 시간을 간직했다.

  이제 사람과 신들이 공존하던 세계는 우리네 어린 시절처럼 아스라이 잊혀져가고 있다. 그것은 대청에 대들보가, 안방에 윗목과 아랫목이, 부엌에 부뚜막이 사라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새둥지만한 작은 보금자리마저 내줄 마음의 여유가 줄어든 것이 훨씬 더 큰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집에서 신들의 얘기가 사라져 가면서 우리는 시간의 미아처럼 모든 것을 홀로 견뎌내고 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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