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문화곳간

여수·순천사건 - 구례, 큰 산 아래에서의 학살 2

흰그늘 2008. 12. 10. 14:01


여수·순천사건 - 구례, 큰 산 아래에서의 학살 2



소리는 공허했다


1996년, 여순사건 구례지역 유족들은 희생자 명예회복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2000년에는 '여순사건 구례유족회'(회장 박찬근)를 발족하였다. 자체적인 조사를 병행했다.
또한 여수.순천.고흥.보성 등 유족회와 함께 매년 10월 19일 합동위령제를 봉행했다.

2006년에는 구례군 서시천변 체육관 부근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박찬근 외 113명의 유족들은 1998년 6월 11일,
양성철 의원의 소개로 국회에
"여순반란사건피해자명예회복을위한특별법제정에관한청원"을 제출하였다.
이 청원은 1998년 8월 14일자로 행정자치위원회에서 심의하도록 회부되었으나,
제15대 국회 회기 중 처리하지 못해 2000년 5월 29일자로 폐기되었다.

또한 1998년부터 "여순반란사건 구례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탄원서"를
국방부.국민고충처리위원회.거창사건등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등에 꾸준히 제출하였다.
그러나 피해내용 확인이 어렵고 소관업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국회 차원의 특별입법이 필요하다고 권고하는 회신을 받았다.

2006년 12월,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자,
유족들은 구례지역 여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해달라고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10월 23일 이 모든 지난한 활동은 하나의 결실로 매듭을 짓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를 대표하는 기관이고 그 동안의 조사를 바탕으로
이미 구례지역 여순사건 당시 희생자들의 대부분이 국가권력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그 결정 이후 첫 위령제이니 이전의 청원하고 탄원하던 위령제와는 의미가 다른 것이다.






오전 11시 조금 전에 서시천변에 도착했다. 잠시 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추모비 앞으로 마련된 행사장은 급하게 실내로 이동해야 했다. 어수선했다. 기관장들이 도착하고
유족들은 진작부터 옮겨진 실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행사는 초라했다.
그것의 규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준비 정도와 '오늘' 추모제의 의미를 생각할 때
급조된 듯 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천장 위로 울려 퍼지는 그 모든 소리는 공허했다.







주인 없는 숟가락은 그 주인의 수 조차 가늠할 수 없지만 망자를 위한 밥이 준비되었다.
밥이 없는 제사상은 의미가 없다.
밥은 살아서는 가족들이 나누는 것이고 죽어서는 산자와 죽은자가
소통하는 접신의 도구로 소용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밥은 단순한 식량의 의미를 넘어선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살아 남은 자들이다.
나는 위령제를 진행하는 소리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소리는 소리에 불과하고 남은 것은 몸이다.
노인의 손은 말라 비틀어진 옥수수잎 보다 더 앙상해 보였고 왁스같은 그 질감이
부석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크게 들렸다.



산동면





* 사진 / 김진오 패러글라이딩 중 촬영.

산동면은 지리산 만복대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지리산으로 들어서는 것이 쉽다. 만복대나 정령치를 타고 넘어 심원과 달궁으로 숨어 들면
쉽게 그 종적을 찾기 힘들다.

더구나 산동면 시상리에서 12연대장 백인기가 자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산동면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이런 지형적인 요건이 제공한
'의심'과 '반발'이 자연스럽게 각축한 원인과 연대장의 죽음이라는 우발적 상황이
연출한 토벌군의 보복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산동면에서는 국군 제3연대가 원촌국민학교(산동면 원촌리 소재)에 주둔했다.
백인기 연대장의 사망과 연이어 출동한 토벌군에 대한 반군의 습격으로 이미 격전지가 되어 있었다.
제3연대는 원촌국민학교 주둔을 마친 뒤 11월부터는 산동면 주민들을 마을 소재 공터.
중동국민학교 등에 1차로 집합시킨 후 젊은 사람들을 골라 주둔지인 원촌국민학교와
누에고치 판매소로 연행했다.

여기에는 일반주민은 물론 각 마을의 이장.구장.교사까지 포함되었다.
가해주체는 국군 제3연대와 구례경찰서 경찰이었고, 청년단원 및 산동면시국대책원회 구성원 등이
보조적인 역할을 맡았다.

3연대는 좌익의 근거지로 의심되는 마을에 군정보원(사복 근무)과 민간 정보망을 두어 정탐하고,
좌익으로 의심되는 민간인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대대 정보과는 일반보병과는 별도로 부락 수색 및 정찰 업무를 맡았다.
대대 정보과 소속 군인들이 부락 민간인들을 마을 어귀에 모아 놓으면,
부락 사정을 잘 아는 사람(정보원)이 입산자 가족이나 젊은 사람들을 골라 주둔지로 끌고 갔다.

3연대는 소대단위로 부락 수색작전을 나가면 한 번에 50~100여 명의 민간인을
원촌리 원촌국민학교와 누에고치 판매소로 끌고 와서 감금했다.
수용된 사람들에 대한 취조는 일반적으로 정보과 군인들이 담당했으며, 경찰도 참여하였다.

취조는 주로 식량제공 여부 등을 물어, 반란군협조혐의자를 선별하는 방식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구타와 전기고문 등 가혹행위가 이루어졌다.






* 산동면 시상리 시랑마을. 백인기 12연대장이 자결한 곳이기도 하고 주요한 즉결처분 장소이기도 하다.

한청단원이었던 김모씨(당시 21세)는 당시 취조현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군인이 불러 (중략) 당시 산동면 한청본부에 갔더니, 주둔본부로 가게 되어 누에고치 판매소에 가서
취조과정을 목격하였다. 1948년 11월 12일, 군인들은 누에고치 판매소에 의심가는 사람들을 연행해놓고
수백 명을 조사했다. 리스트를 갖다놓고 조사했다. (중략) 옷을 활짝 벗겨놓고 남녀 구분도 없었다.

조사가 끝난 사람들 중에 자기들이 의심하는 사람들은 재판회부도 없이 바로 총살했다.
누울 정도가 아니고 밤낮으로 앞사람 등에 머리를 대고 잠을 잤다. 밥은 매일 오전 10시 한 차례였다.
소금물을 한 주먹밥 한 덩이었다. 손에다 주먹밥을 받아서 먹었다. 지금은 헌병이라 하지만 당시는
군기병이었다.

처음 취조는 군기병이 하고 마지막에는 취조관(정식군인은 아니고 군속)이 했다.
옷을 활짝 벗겼다. 얼음이 얼어 고드름이 있는 집시랑 끝에다가 뒤로 묶어놓고 팼다.
지붕에 줄을 달아 의자 서너 개를 쌓아놓고 그 위에 올라가 앉게 했다. 의자에 올려져
묶인 상태에서 의자를 빼버리면 대롱대롱 매달리는데 그 상태에서 앞에서 배를 차고
뒤에서도 때렸다.(후략)"

당시 군 주둔지 급식소에서 석유배급을 했던 한○○은 누에고치 판매소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자기들이 보기에 의심이 나면 잡아서 취조하다가 말을 안 들으면 옷을 벗겨가지고
한겨울에 바가지에 물을 담아 가슴에다가 확 찌끄리고 찌끄리고 했습니다.
조사를 하다가 뭐가 이상이 있으면 데리고 나와서 산속으로 올라가라고 해서 총 쏘고 했습니다.
수용소에 하루 5~50명씩 가두었다가 죽이고 죽이고 했습니다.
(중략) 취조는 외지에서 온 사복경찰이 했는데,
공산당에 입당했느냐 반란군이 내려와서 밥을 몇 번 해주었냐,
짐은 어떻게 지어다 주었냐는 내용이었습니다."





* 역시 주요한 즉결처분 장소인 계천리 송평마을.

군경의 취조 후에 반군협조자로 선정된 사람들은 곧바로 사살되었다. 참고인 앙○○의 진술에 의하면,
군인들은 취조 후 대상자들을 새끼줄로 묶어서 한 번에 약 30명 정도를 사살장소로 이동시켰다.
사살명령은 보통 일선 중대장에게 하달되었다. 중대장이 직접 사병을 차출하여 사살을 집행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소대단위(약 30명)로 차출하여 사살하였다. 
 
참고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소대장의 인솔 아래 마을주민들이나
한청단원들이 미리 파놓은 호 주변에 대상자들을 세워놓고, 주로 M1 소총으로 사살하였다.
사살인원은 상황에 따라 달랐는데, 취조 후 바로 사살하는 경우 보통 15~20명 정도였다.
당시 사살집행에 참여한 참고인 유○○은 사살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총살집행은 소대장이 인솔을 했습니다.
총살장소 주변에 경계병이 배치되고 마을인부들이 와서 총살대상자 수에 맞게 구덩이를 팠습니다.
총살대상자들은 구덩이 앞에 무릎을 끓고 앞을 보게 해 앉히고 25~50미터 뒤에서 사수들이
사격명령에 따라 M1소총으로 사람들을 겨냥해 사격을 했습니다.
총을 맞고 사람들은 구덩이로 쓰러졌습니다.
확인사살을 하지 않았습니다. 집행이 끝나면 밑에서 대기하던 인부들이 매장을 했습니다."

진술에 따르면 즉결처분을 명령한 주요한 인물은 3연대 2대대장 조재미였다.
진술서 곳곳에 조재미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 이평리 횟골 부근에서는 지금의 구만제가 보인다.

좌사리의 경우, 진압군과 경찰이 좌사리를 좌익의 근거지라고 판단했고,
정보망을 통해 좌익혐의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3연대 주둔지로 잡혀간 주민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1949년 1월 28일까지 살해되었고,
그 중 50여 명만이 살아나왔다.

좌사리의 경우, 이른바 양○○의 '좌익문서'와 관련된 희생이 많았다.
양○○은 당시 좌익조직의 총무였다.
그 문서에는 구례뿐만 아니라 전북을 포함한 지역의 관련자들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복 군정보원 2명이 대평마을에 올라왔다가, 양○○에게 잡힌 적이 있었다.
이 중 한 명이 탈출하게 되자, 군이 마을주민들을 잡아갔다.
주민들은 누에고치 판매소에서 한 달이 넘게 취조를 받았다.
이후 양○○의 동생 양○○이 고문에 못 이겨 양○○의 '좌익문서'를 진압군에 주면서 연행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상관마을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홍두식.임귀종.임행순 등이다.
또한 임창순(한약방 운영)이 군인에게 끌려간 뒤 간전면에서 사살되었다.

"1948년 12월경인데 군인들이 산동면 좌사리 상관마을에 불을 댔습니다.
사람들이 다 도망가고 우리 집은 죄가 없다고 그냥 마을에 남아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다시 와 언니 구수엽이랑 다른 사람들을 중동국민학교 앞 밭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이 우리 집을 다시 불을 질렀습니다.
불을 끌 생각도 하지 않고 가족들이랑 저는 멍하니 언니가 끌려가는 걸 봤습니다.
군인들이 산동면 원촌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거기로 언니를 데려갔답니다.
그때 같이 잡혀간 사람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랑 어머니가 언니를 보러 원촌국민학교에도 갔었다는데,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부모님이 산동면 신학리 꽃쟁이에서 언니 시신을 찾아서 그 주변에
묻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고인 구○○, 통화보고서(2008. 5. 19.)

"(반군이) 아침이면 학교 문 앞에 송죽을 세워 인민공화국기를 꽂아놓았습니다.
그래서 '공산당 학교'라고 생각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교장이 경찰에 신고해 가지고 경찰이 올라와 인민공화국기를 철거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은 인민공화국기를 보고도 빼낼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반군들이 기를 뺀 사람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참고인 강○○, 진술조서(2007. 6. 21.)






* 산동면 대평마을에서 눈 쌓인 지리와 산수유를 보다.

원달리에는 달전.중기.수락마을이 있다.
반군이 산동면 원달리 달전마을에 들어와 밥을 먹고 간 일이 있었다.
다음날 오후 6시경 군인들이 마을에 와서 주민들을 달전마을 모종 정자나무 밑으로 집결시켰다.
군인이 밥을 반군에게 해줬냐고 물었고, 해줬다고 하면 그대로 앉혀두었다.
당시 형편이 어려워 밥을 해주지 못한 다섯 집은 밥을 안 지어주었다고 하자 따로 불러
무릎 꿇어앉힌 후 거짓말을 했다고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그 후 군인들은 18~40세 남자들만 나오라고 하여, 40여 명을 4열 종대로 달전마을 앞 해계논에
세워놓고 사격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빈재순(직다-3817, 당시 27세) 등 약 17명이 사망하였다.
이어 군인들은 마을도 소각했다.

이상을 종합하면, 산동면에서는 국군 제3연대가 1948년 10월 말부터 반군토벌을 진행하면서,
산동면 주민들을 원촌리 원촌국민학교 및 누에고치 판매소와 관산리 중동국민학교로 연행하여
고문하고 취조한 후, 이 중 다수의 주민들을 사살하였다.
주요 사살장소는 산동면 시상리 꽃쟁이재, 이평리 윤씨 선산 횟골,
신학리 오향마을 왕재 일대, 외산리 한천마을(참새미) 가장골, 원달리 달전마을 해계논,
계천리 작은외골 등이었다.
조사결과, 산동면 희생자 중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44명이며,
4명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간전면





* 사진 김진오. 패러글라이딩 중 촬영.

간전면은 구례의 동남방에 위치하여, 동쪽으로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동남쪽으로는 광양시 다압면,
서남쪽으로는 순천시 황전면과 접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토지면과 문척면에
닿아 있다.
간전면에서 구례읍이나 문척면 및 토지면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섬진강을 건너야 한다.
- 구례군지편찬위원회, 구례군지 하, 2005, 262쪽 -

간전면 또한 격전지였다. 여순사건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까지 지리산과 백운산을 무대로
한 빨치산들의 주요한 활동 영역이었다.
무엇보다 전설적인 빨치산의 한 사람인 박종하가 간전면 논실 출신이었다.
14연대의 구례읍 중앙초등학교 습격 사건 이후 간전면은 밀려난 반군과 토벌군의 격전장이었다.
그리고 12연대장 백인기가 남원으로 올라가다가 산동면 시상리에서 반군의 습격을 맞아 자결하는
사건도 간전면에 주둔 중이었던 하사관교육대 습격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 간전면 간문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즉결처분 되었고 매장되었다.

김지회가 이끄는 반군은 백운산과 간전면을 거쳐 지리산 문수골로 들어갔다.
반군은 주로 간전면에서 식량을 조달했다.
간전면 출신 구례군 유격대장 박종하는 간전면에 주둔한 제12연대와 구례경찰서 등을 공격했고,
이후 제12연대는 박종하의 거점이었던 간전면 금산리 일대를 공격하였다.
또한 박종하 부대는 간전국민학교와 간전지서에서 숙영하던 제12연대 하사관교육대를 습격했고,
반군은 11월 18일 밤부터 19일 새벽까지 구례읍을 공격하였다.
이어 제12연대는 반군이 퇴각한 직후 구례구역 방향으로 반군을 추격했다.
제12연대는 11월 20일경 현 순천시 황전면 방면에서 매재를 넘어,
백운산 인근 간전면 금산리와 효곡리를 포위하여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제12연대는 반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간전면 마을들을 소개시키며, 11월 20일에서 23일까지
간전면 주민들 중 젊은 사람들을 간문국민학교로 끌고 갔고, 나머지 주민들을 면소재지로 이주시켰다.
또한 11월 23일 동방천에서 군용차량 이동을 위한 임시 다리 공사 작업을 하고 있던 양천리 야동마을
사람들을 간문국민학교로 끌고 갔다.
당시 간문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제12연대는 연행한 간전면 주민들을 대상으로
남로당 가입 및 반군협조 여부 등을 취조한 후, 많은 주민을 간문천변에서 집단사살하였다.
이 사건은 이른바 '간문천변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다.

신청인 김상철의 전문에 따르면, 당시 양천리에 거주하던 박길동은 사건현장에서 총을 맞았으나
중상을 입고 살아 돌아와, 사건현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군인들이 간전국민학교에 사람들을 잡아놨고 줄줄이 묶어서 양천리 가림내 부근
간문국민학교에서 내를 건너 바로 나오는 자갈밭, 모래밭으로 끌고 간 뒤 사람들을 줄줄이
묶은채 일렬로 쏴 죽이고 다시 남은 사람들을 또 줄줄이 묶은 채로 일렬로 세워 쏴 죽였다.
(중략) 군인들이 한 번 쏘고 살아나서 꼼지락거리는 시신이 있으면 빙 둘러서서 확인사살을 했다."






* 간문초등학교는 1948년과 같은 장소에 있다.

또한 김상철은 동방천 다리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이 연행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에 따르면,
삼산리 거주 '배씨'가 사람들을 지목하자, 군경 20~30명이 지목된 사람들을 간문국민학교로 연행하였다.
제12연대는 당시 동방천 다리 공사 작업에 동원됐던 간전면 양천리 거주 정사기(당시 19세).
박천행(당시 27세), 간문리 거주 김영표(당시 40세), 흥대리 거주 박창록(당시 40세).
이강윤(당시 22세) 등 간전면 주민들을 1948년 11월 23일에서 11월 24일 사이 간문국민학교로
연행한 후 간문천변에서 사살했다.
간전면 양천리 거주 남정권(당시 28세)도 1948년 11월 23일 마을 이장의 권유로 동방천
다리 공사 작업을 하던 중 군인과 경찰이 데려온 ‘배씨’에게 지목당했다.
군경은 작업자 중 남정권을 포함해 '배씨'에게 지목된 이들을 간문국민학교로 연행했다.
1948년 11월 24일 군인들은 남정권 등 학교에 수용된 사람들을 사살하기 위해
간문천변으로 데려가던 도중, 남정권의 동생 남정삼(당시 15세, 간문국민학교 소사)이 왜
죄 없는 형을 끌고 가냐며 울면서 매달리자, 남정권과 남정삼을 사살하여 간문천변에서
사살한 사람들과 함께 매장했다.

당시 대한청년단원으로서 사건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시신매장을 담당했던 참고인 김○○은
간문국민학교에는 백○○ 부대로 알려진 제12연대 1개대대가 주둔했다고 진술했다.

"백○○이 와서 그냥 기관총을 난사해버린 거야. 양민들(중략) 불 싹 질러버리고 혐의 있는 사람이야
산으로 올라가버리지. 양민들이야 살림살이라도 하나 주울려고 하는 사람들을 싹 끌고 와서
하루저녁 재우고 부자지간에 뺨 때리게 하고 난리를 치고 고생시키다가 데리고 있고,
(중략) 집단으로 죽여버린 거야."

"한 50명이 동원되었지. 30분 정도 일해서 구덩이에 다 넣었어. 지게를 쓰지도 못하고 메어 끌어다가
골짜기에다가 넣고 솔가지 같은 걸로 덮어놨지. 한 300구 정도 되었지."

당시 제12연대 2대대 5중대장의 역할을 맡았던 임○○도 구례지역에서 12연대에 의한
민간인 집단희생이 가장 많았던 곳이 간문국민학교 인근 간문천변이었다고 진술했다.
이 사건에서 간전면 효곡리 거주 김귀태(당시 46세) 등 총 37명이 살해된 것으로 확인되었고,
2명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간전면 주민들은 구례경찰서, 구례읍 봉성산, 섬진강 양정지구 등지에서도 사살되었다.
효곡리 거주 박덕서(당시 32세)는 친구의 좌익혐의에 연루되어 1948년 11월경 구례경찰서로
자진 출두했다.
당시 군청 공무원이었던 친척 최순모는 1948년 11월 19일 박덕서가 구례경찰서에서
사살되었다고 가족들에게 알렸다.






* 간전면 효곡 방면의 겨울길은 스산했다.

"효곡리랑 금산리가 백운산 밑이라서 백운산에 있는 반란군들 근거지를 없앤다고 군인들이 효곡리,
금산리를 싹 소각시킨 거지. 그리고 주민들을 간문국민학교에 수용했는데,
그 중엔 좌익도 몇 명 있었을 테지만 대부분 그런 건 모르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백○○이 주민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답니다.
학교에 급사를 보던 애가 있었다는데, 자기 형님도 끌려가니 붙잡고 울고 하니,
백○○이 권총으로 그 급사를 쏴 죽였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간문국민학교에 수용된 사람들은 학교 옆 냇가에 사람들을 세워놓고 군인들이 쏴 죽였대요.
시국대책위원회에서 유족들한테 시신들을 찾아가라고 주선을 해줬어요."
참고인 정○○, 통화보고서(2008. 5. 20.).

참고인 김○○에 따르면, 매장된 시신은 약 300구 정도였다.
군인들은 간문천변에서 사람들을 죽인 뒤, 면소재지 3개부락 사람을 동원하여
30분 내로 시체를 치우라고 명령을 내려, 간문천변 위쪽 밭 너머 산으로 끌어다 옮겼다.
들짐승들이 시신을 물어가고 파헤치자,
군인들은 3일 후 시신을 찾아가도록 했다. 참고인 김○○, 면담보고서(2007. 12. 14.)

"그때가 11월 말이나 12월 초였어요. 저녁이었는데, 군인들이 간전면 흥대리 마을로 들어왔어요.
마을 주변에 군인 몇 명은 보초로 배치되고, 다른 군인들은 사람들을 집 밖으로 소집했어요.
군인들은 30여 명 왔어요. 그때 구례읍에 들어온 군인들이 12연대 군인들이라고 들었어요.
군인들이 흥대리 마을회관 앞으로 마을사람들을 전부 세워놓더니,
이 사람은 이 쪽, 저 사람은 저 쪽, 이렇게 양 쪽으로 갈랐어요.
32년생으로 나랑 동갑이었던 친구 이근선이는 그때 키가 제일 컸어요.
군인들이 근선이를 보고 나랑 반대쪽으로 세웠어요. 반대쪽에 이근선, 김용철, 조희수,
그리고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 또 한 사람까지 모두 4명을 가려내더니
군인들이 그 4명을 데리고 갔어요.
그 이튿날 오후에 조희수씨랑 이름 기억 안 나는 그 두 분만 살아왔어요.
 조희수씨가 말하길, 군인들 본부로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는데 김용철씨는
조사를 받자마자 조사실 밖에서 군인들이 총으로 쏴죽였대요.
이근선은 군인들이 구례읍 양갱이(현 문척교 밑)로 데려가 거기에 구덩이를 파놓고 쏴 죽였대요."
참고인 이○○, 통화보고서(2008. 5. 21.)

이상을 종합하면, 11월 20일부터 간전면 일대 주민들과 동방천 다리 공사에 참여했던 주민들이
진압군과 경찰에 의해 간문국민학교에 연행되어 고문과 취조를 받으며 구금되었다.
연행된 주민들 중 최소 70여 명 이상191)이 11월 20~26일경 간문천변에서 국군 제 12연대에
의해 집단사살되었다. 조사결과, 간전면 희생자 중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47명이며, 2명은 사망으로 추정되었다.


구례읍





* 구례읍내에 있는 봉성산은 해발 166m의 작은 산이다.

구례읍은 제12연대가 주둔하였던 지역이다.
1948년 11월 19일 05시경부터 반군의 습격(구례경찰서, 구례군청, 봉성산 등)으로 교전이 벌어졌다.
11월 19일 교전 직후 새벽,
구례경찰서에 유치되어 있던 민간인들이 경찰과 군에 의해 구례경찰서 옆 공터 등지에서 사살된 후,
구례읍 봉서리 봉성산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이 사건은 일명 '구례 봉성산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 여순사건 구례유족회 대표 박찬근 선생.

'큰산아래사람들' - 권경안(향지사 2000년)을 조금 재편집하면 아래와 같다.

1948년 당시 박찬근(구례군 간전면 효곡리)씨는 구례중앙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박씨의 아버지는 1948년 당시 구례읍내에서 서울신문지국을 운영하던 김창열씨와 친구였다.
할아버니와 함께 살고 있던 읍내의 박씨집에 김창열씨 부부가 와서 일주일 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날인 11월 18일, 박씨는 지금의 주조장 자리인 구례합명회사 앞에서 친구들과
제기차기를 하고 있었다.

사복 입은 두 사람과 총을 찬 헌병 두 명이 다가와 "박덕수 집이 어니냐." 하고 물었다.
어린 박씨는 "우리 아버진데요." 답하고서 읍내 집으로 안내했다. 읍내 집에 계셨던 아버지에게
그들은 "김창열의 짐을 조사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아버지가 이불보따리 등 짐 3개를 넘겨주자 한 보따리에서 책 5~6권이 나왔다.
그러더니 그들이 아버지에게 경찰서 동행을 요구했다. 아버지는 머뭇거림이 없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그들을 따라 구례경찰서로 갔다.
그 때가 박씨의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박씨의 아버지는 다음 날 새벽 총살을 당했다.

당시 구례경찰서에서 숨진 사람들의 시체를 운반한 사람은 김재천씨였다.
구례경찰서에서 가장 가까운 산이 바로 봉성산이었다.
산기슭이 경찰서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300m다.
이곳에 사체를 옮겨 정상 바로 너머에 구덩이 세 곳을 파고 모두 묻었다.
군인들이 통제하는 바람에
석달 동안 접근할 수 없었다.
박찬근씨의 할아버지도 석달 뒤에 일꾼 서너명을 데리고 공동묘지를 찾아갔다.
구덩이를 팠다.
그러나 사체가 심하게 부패한데다 한데 수십 명이 파묻힌 상태여서 구분을 할 수 없어
아들의 시신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구례읍 봉북리에 사는 김영일(2000년 증언 당시 74세)씨는 여순사건 당시
구례등기소 서기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역시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김정윤씨도 등기소에서 급사로 일했다.
1948년 11월 18일(음력 10월 18일), 두 사람은 등기소 숙직실에서 같이 숙직을 하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자 서로(군인 측과 반란군 측이) 교전을 시작했다.
새벽녘이 되자 총성이 멈추고 조용해졌다.
등기소 앞 도로로 한복 입은 사람들이 바지게 위에 시체를 한 구씩 지고 봉성산 쪽으로 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고 가는 시체 수를 세어 보았다. 72구의 시체를 지고 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날 낮에 들은 이야기인데, 구례경찰서에서 임시보호 중인 72명(문척면 토금마을 주민 19명 포함)을
경찰서 연병장에서 집단총살시켰다고 했다.

희생자 위령탑 준공행사 현장에서 만난 구례희생자유족회 박창근 회장은 '처벌'을 이야기 한다.
여전히 여순사건 당시 토벌을 주도했던 당시 12연대장 대리역을 했던 백인엽이 여순사건의
가해를 부정하며 버젓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과거사법은 진실과 화해의 법률이다.
하지만 가해자의 '인정하지 않는 과거'를 그는 용납할 수 없는 것 같아 보였다.






* 2007년6월 18일 봉성산 유해발굴 작업 개토제. 사진 김인호.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6월 18일에서 7월 20일까지 구례읍 봉성산의 3개 지점에서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구례읍 봉성산 해발 88m 지점에서 14개체의 유해와 M1 탄두 1점,
칼빈 탄두 20점, 단추 21점, 빗 1점, 곰방대 1점 등 총 46점의 유품이 발견되었다.
칼빈 및 M1 소총탄두 21개가 발견됨으로써 희생자들이 당시 군경이 사용한 총기에
희생되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여순 사건 당시 봉성산 사건이 실재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총 11개체의 유해에서 탄두가 발견되었고, 탄두가 모두 유해 내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특히 4개체의 유해는 두개골에서, 1개체의 유해는 치아 위치에서, 각각 탄두가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희생자들은 두부(頭部)에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희생당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탄피가 아닌 탄두가 발견된 점은 희생자들이 다른 장소에서 사살된 후 봉성산으로
옮겨져 매장되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러한 유해 발굴 결과는 전체적으로 봉성산 사건 관련 신청인과 참고인의 주장과 일치하고 있다.
봉성산 유해 발굴팀은 차후 봉성산에 대한 보다 정밀한 조사가 진행된다면 다수의 유해매장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진실화해위원회.충북대학교 박물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집단희생 관련 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제1권, 2008, 279-309쪽.






* 해질 무렵 구례읍.

이와 같이 구례읍에서 진압군과 경찰은 1948년 11월부터 토벌작전과정에서 구례읍 주민들을
구례경찰서 등지로 연행한 뒤, 그 중 다수를 구례읍 봉성산, 섬진강 양정지구(문척교 주변),
서시천변(서시교 아래)에서 사살하고 매장하였다. 또한 국군은 구례읍 계산리에서 유곡마을 등지의
주민 20여 명을 사살하였다.
구례읍의 희생자 중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18명이며,
1명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토지면





* 토지면 오미리 전경. 사진 김진오 패러글라이딩 비행 중 촬영.

토지면은 반군이 구례에서 지리산으로 입산하는 길목이었다.
오미리를 지나 문수골을 통해 노고단으로 오르거나 질매재를 넘어 피아골로
넘어서기도 쉬운 곳이다.
천하명당이라는 오미리는 그래서 그 이름값을 톡톡하게 치를 수밖에 없었다.
토지면은 인근 면에 비해 상대적으로 좌익 사상을 가진 유학생 출신들이 많았다.
이런 조건은 타는 불 위에 기름을 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토지면의 좌익활동가는 하죽의 이한열(진실화해위원회 신청사건).박지래.박훈,
내죽의 정호연(인공시기 순천시 당위원장).
이완식(인공 시기 토지면 당위원장), 중산의 김노선.정정수.김백권.김효순 등이 있었다.
이들은 구례의 유명한 활동가인 토지면 파도리 정태중의 영향을 받았다.
권경안, 큰산아래사람들, 향지사, 2000, 109쪽; 신청인 유엽, 진술조서(2007. 6. 20.)





*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 앞의 백일홍. 꽃잎은 땅에 누웠다.

문수리 거주 고광옥(당시 43세)은
1948년 10월 말 그의 집 마당에서 진압군이 쏜 총에 얼굴을 맞아 사망했다.
진압군은 또 문수리 상죽마을을 수색하고, 마을을 소개시켰다.
상죽마을 주민들은 오미동으로 내려왔다.
1948년 12월 7일경 진압군이 중대마을 회관을 점령하고,
마을주민들을 소집시켜 반군협조 여부를 추궁했다.

이 과정에서 장달수(당시 30세)가 좌익관련자로 지목되어 마을회관 앞에서 권총으로 사살되었다.
당시 전신주는 군과 경찰의 중요한 통신시설이었다.
반군들은 밤이면 나무로 된 전신주를 톱으로 잘라 군경의 통신을 방해했다. 
 
오미리 거주 유종택(당시 20세).류형복(당시 23세).최정용(당시 23세).김갑순(당시 25세)을
포함한 10여 명이 1949년 7월 마을의 전신주가 절단되었다는 이유로 구례경찰서로 연행되어
행방불명되거나 사망하였다.
반군은 오미리에 출몰하며 주민들에게 짐을 운반하라고 시켰다.
1948년 11월 군인들이 구례경찰서 장 형사와 함께 토지면 오미리 내죽마을로 들어와
무전기를 찾는다며 주민들을 마을 입구에 소집했다.

이때 장 형사와 친구인 김영곤(당시 42세)이 "우리 마을엔 양민만 살고 있다"며 장 형사와 언쟁을 하자,
군인이 그 자리에서 김영곤을 사살했다.
1949년 4월 오미리 거주 유형규(당시 36세), 이낙호(당시 26세), 유형윤(당시 24세) 등 마을 청년들은
산으로 식량을 운반한 이유로 구례경찰서로 연행되어 섬진강 양정지구 등지에서 사살되었다.
유형윤의 아버지 유재환(당시 47세)은 아들이 잡혀간 뒤 오미리 내죽마을 집으로 귀가 도중에
군경에게 사살되었다.
오미리 거주 이한열(직다-679, 당시 29세)은 한청 귀순공작대 대장 김○○이 살해된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1949년 3월 새벽 서시천변(서시교 아래)에서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오미리 한청단원 김노선(당시 28세)은 1949년 4월경 구례경찰서 인근 한청본부에 있던 중
경찰에게 연행된 뒤 살해되었으며, 그의 부친이 연락을 받고 지리산 피아골 부근에서
그의 시신을 수습했다.


* 사건번호-직다-717 / 신청인-최광두 / 피해자성명-최정용 / 당시나이-남23세 / 신청인과의 관계-숙부

"왜 아버님 성함은 보이지 않습니까?"
"구례 밖에서 죽은 사람들은 신청하들 못혀."
"최자 정자 용자 어르신은?"
"삼촌이제."

힘든 인터뷰였다. 인터뷰라고 하기에도 어색하다. 지리산닷컴이 존재하는 곳이 토지면 오미리다.
같은 마을의 '최샌' 최광두 어르신을 청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나마 지리산닷컴에 우호적이신 것이
나의 몇 가지 질문에 응대해 주신 이유일 것이다.

"여순 전에 '파도리 만세사건'은 보셨습니까?"
"그라제. 그때 국민학교 다니고 있었는디 아침에 총소리가 나더라고. 그때 지서 자리 언덕으로
흰 한복 입은 사람들이 막 쫓겨가더라고. 우리는 바로 집으로 가라고 하더라고."
"아버님은 왜 잡혀가신 겁니까?"
"모르것어. 뭔 이유가 있나. 이런 식이여, 그때 우리집 사랑방에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잘 놀았는디, 짚신도 짜고 그렸지. 하루는 밤에 그렇게 놀다가 지금 저 **아부지가 그랬어.
-너거 누나 나 안줄래?- 이런 농을 하고 그랬는디 그때는 밤으로 사복들이 마을을 돌았거든.
아 그란디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흰소리들 하고 논다고- 토지서로 잡아가 버렸지.
그런 식이여."
"아버님을 마지막 본 것이 언젭니까?"
"하루 전 날 토지서로 잡혀가셨고 담 날 아침에 엄니가 밥을 해서 들고 나랑 같이 토지서로 갔제.
그 길로 읍내 경찰서로 끌려갔는데 나란히 같이 걸어오다가 요 지금 도로 있자녀, 그거서 헤어졌제.
-광두야 쩌그 좀 갔다오께- 하고 담뱃대, 요만 한거를 나한테 주고는."
"어디서 돌아가셨습니까?"
"그때는 오후에 잡혀가믄 죽고 오전에 잡혀 가면 어디로 끌려가지 죽지는 않는다 그랬거든.
뒤에 전주교도소에 계신 것을 백방으로 수소문혀서 알아냈지. 6.25 전에 전주교도소에서 돌아가셨지."
"전주로 가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때는 일렬로 앉아서 면회를 하는데 저짝에 글 받아 적는 사람 있고, 이쪽 엄니 자리에 글 받아 적는
사람이 있어. 아무 야그도 못혀. 아부지 끌려갈 때 내 동생이 엄니 뱃 속에 있었어. 나서 일주일
지난 것을 엄니가 쏘케에(솜) 싸서 전주로 델꼬갔지. 태어난 아그 한번 보듬어보면 안되냐고."
"면회를 자주 가셨나요?"
"글제. 그때는 자주 면회를 가면 형을 감해줬거든. 3년 6개월인가 받았는디."
"죄목이 뭡니까?"
"몰라. 그냥 젊고 똑똑한 죄지. 성질이 좀 불같은 분이셔. 그냥 하도 고문을 하니깐 홧김에 그랬다고
해뻐리신 것 같어."
"뭘 해요?"
"마을 전봇대 사건이 *&^%$&**%$^&**%$#%* 경찰에 말했거든."
"그런 일이 있었나요?"
"아녀. 그냥 왜 그런 말을 꾸몄는지는 모르제. 세상이 그랬지 뭐."

세상이 그랬단다. 말씀이 쉽지 않다. 하지만 더 이상 여쭙는 것도 어렵다.

"김지회, 반군 14연대장은 혹시 보셨어요?"
"아 봤제. 여그 있자녀 마을 팔각정, 그전엔 보리타작마당이라 그랬는디 그서 아침에 연설을 하고 했지.
뭐랬는지는 기억이 안나고 길게 연설을 해쌌지. 끝나면 인민공화국만세! 라고 삼창을 했제."

일단은 명예회복이 되었으니 한 매듭은 난 것이라 하신다.

"14연대가 산으로 가고 지금 저 도로(19번국도)에 12연대 트럭들이 쫙 서서는 산山하고 박격포니 뭐니
전쟁이 벌어졌지. 그때 삼촌이랑 아부지랑 들판에 함께 있었는데 머리 위로 총알이 날아다니니께
정용이 삼촌이 그러더만.
‘형, 닭 한 마리만 삶아 묵읍시다.’
이왕 죽는 거 닭이라도 한 마리 삶아 묵자고. 그때는 닭 한 마리 삶아 먹기도 쉽잖았거등."

지난여름에 나는 최샘 댁에서 토종닭 2마리와 오골계 1마리를 삶아 먹었다.
사료 값 비싸다고 그날 그랬었지.

'형, 닭 한마리 삶아 묵읍시다.'

귓전에 계속 맴돈다.

조사결과, 토지면 희생자 중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19명이다.


마산면, 문척면, 광의면, 용방면





* 섬진강 양정지구변.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매장된 곳이다.

구례읍에서 화엄사로 올라가는 입구인 마산면 황전리에서는 1948년 11월 18일부터 19일 새벽까지
반군과 제12연대가 교전했다. 11월 19일 새벽 반군이 지리산 화엄사 방향으로 도주하자,
제12연대가 이를 추격했다.
제12연대 군인들은 황전리를 수색하면서 마을주민 전원을 마을 앞 논으로 데려갔다.
군인들은 약 120호 정도의 사람들 중 300~400명 정도를 끌고 가 논바닥에 꿇려앉힌 다음,
군 지휘관이 지휘봉으로 주민 17명을 지명하여 끌어냈다.
이들은 군용트럭에 실려 구례중앙국민학교로 끌려갔다.
이들 중 황전리 거주
박재동(당시 34세).장학철(장종철, 당시 21세).오기성(당시 27세).임홍규(당시 18세) 등 16명이
서시천변(서시교 아래)에서 12연대에 의해 집단사살되었다.

또한 제12연대는 1948년 11월경 마산리 청내마을 주민들을 마을 앞 오길택의 논에 몰아넣고,
마을을 소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인들은 주민 30여 명을 선별하여 구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마산리 거주 박원하(당시 23세). 이태식(당시 23세).이신식(당시 18세).이창식(당시 25세)을
비롯한 연행된 주민 30여 명은 일주일 정도 반군협조여부를 취조당한 후
서시천변(서시교 아래)에서 집단사살되었다.

그 외에도 마산리 거주 김종출(당시 40세, 마을 이장).김상곤(당시 15세) 등이
전 국회의원 이갑식의 가족이 반군에게 피살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경에게 끌려가,
마산면 청내다리(현 마산리 하천둑) 등지에서 희생되었다.
또한 청천리 거주 오재만(당시 37세)은 1949년 2월경 군경에 의해 연행된 뒤 행방불명되었다.
마산리 거주 김정오(당시 33세)는 1949년 6월경 경찰에 의해 구례경찰서로 연행된 뒤 행방불명되었다.
마산면 희생자 중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12명이며,
마산면 갑산리 거주 엄홍섭(미신청, 당시 27세)도 1948년 12월에 사복 경찰에 연행된 뒤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 문척면 토금리. 토금리는 인구 수에 비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1948년 11월 18일 국군 제12연대 소속 군인들이 문척면 금정리 토금마을 주민들을 마을 앞
밭에 집결시켰다.
"동네 안에 빨갱이가 있다"고 말했다.
노인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남자 15세 이상 50세 미만 정도의
주민들을 군인이 양쪽으로 포위한 채 연행해갔다.
문척면 월평마을을 지나는데 문척면장 김용근(당시 34세)씨가
"면장이요. 우리 마을 사람들인데 무슨 일이요. 왜 그러시오." 라고 물었다.
그래서 김면장도 끌려갔다.
섬진강 용두나루 건너 마산면 사도리앞 외기대다리 위 빈 밭에 집합했다.
군인들은 "남의 집 머슴 산 사람은 나오라."고 했다. 머슴 산 대열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총을 쏘면서
"제일 뒤에 간 놈은 쏜다. 꺼져 버려." 라고 고함쳤다.
머슴도 살지 않고 제사 모실 핑계도 없었던 19명은
지금까지 마을로 돌아오지 못했다.
최복님씨는 1948년 당시 스물 일곱이었다. 아들 하나 딸 둘을 두고 있었다.
남편은 앞서 언급한 문척면장 김용근씨.
봉성산 사건 당시 매장을 진행한 구례읍 봉남리의 김재천씨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남편의 시신을 따로 묻어 두었으니 이장을 하라."
이장을 한 인부들이 말하기를,
"시체 3구는 따로 묻혀 있었는데 최씨 남편의 시체는 양발이 하늘 쪽으로 솟아 있었다는 것이었고,
숨이 덜 떨어진 상태에서 묻힌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금정리 거주 이강식(당시 19세).임해수(당시 32세).임해용(당시 19세).손광인(당시 24세).
신택식(당시 30세). 박용래(당시 24세) 등이 1948년 11월 19일 구례경찰서 옆 공터에서 사살된 후
봉성산에 매장되었다.

금정리 금정마을에서는 1948년 11월 19일경 군경이 마을을 포위하여 청년 남성 20여명을
소집한 후 이들을 구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이 가운데 당시 문척면장이었던 김용근(당시 33세).최재규(당시 24세)가 사살되어
봉성산에 매장되었다.
이상을 종합하면, 문척면 금정리에서 연행된 주민들은 11월 19일 반군과 12연대가 교전한 직후,
구례경찰서에 유치되어 있던 다른 민간인들과 함께 사살되어, 구례읍 봉성산에 매장되었다.
문척면 희생자 중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8명이다.





* 광의면 유산마을 입구 버스정류장.

광의면에서는 반군이 들어오기 전에 지방좌익이 면사무소와 지서를 점령했다.
진압군은 1948년 10월 말 광의면에 들어와 한청의 협조를 받아 반군협조자 및 좌익혐의자를
면사무소로 연행하여 취조.고문했다.
특히, 진압군은 광의면 전체를 소개하여 주민들을 면사무소에 수용하였다.
면사무소 수용인원은 대략 70~80명 정도였다.
면사무소 주변에서 한청단원들이 보초를 섰으며, 진압군은 수용된 주민들을 고문.취조한 후
그때그때 사살했다. 한청단원들은 민간인 및 반군 사살에도 동원되었다.
또 공무원.이장.구장.유지가 중심이 되어 구성된 시국대책위원회가 주둔군의 식사준비.
사살장소 구덩이 파기.매장 등의 보조작업을 담당했다.
구례경찰서에서 파견된 사찰계 형사들도 광의지서에 주둔했으며,
지서 안에 수용소를 설치하고, 물고문을 하며
취조했다. 사찰계 경찰(광의 담당 사찰계형사 한양길 순경 등)에 의해 연행되어
조사받은 사람들은 구례경찰서로 넘겨졌으며,
구례경찰서에서 다시 취조받은 후 형무소로 넘겨지거나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1948년 12월 새벽 경찰 2~3명이 구례읍 광의면 방광리 박직상(당시 47세)의 집으로 찾아와
그를 광의지서로 연행하였다.
박직상은 경찰에게 고문을 받았고,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방광리 거주 김복완(당시 48세), 연파리 거주 강태원(당시 33세).
강태신(미신청, 당시 33세) 등도 구례경찰서로 연행되어 섬진강 양정지구 등지에서 사살되었다.
특히 광의면 대산리 유산부락에서는
제3연대 2대대 조○○ 부대가 1948년 11월 오후 6시경 이귀열(당시 35세).
이영수(당시 38세) 등 20여 명을 광의면 대산리 새미골(현재 구례세운자동차운전전문학원 뒷산)에서
사살했다.
또한 수월리 거주 황의회(미신청, 당시 19세)는 1948년 11월 19일 구례경찰서에서 사살되어
봉성산에 매장됐다.
광의면 희생자 중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7명이며, 구만리 거주
박병협(미신청)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 용방면 하신마을.

용방면에서는 1948년 11월부터 군경이 수색활동을 전개하였고,
주민들은 용방국민학교에 소집되어 조사를 받았다.
특히 용방면 죽정리에서는 가옥 소각과 주민 소개가 있었으며, 부락주민들이 사살되기도 했다.
용방지서에는 경찰이 파견 나와 부락을 사찰하고 경비했다.
1948년 12월 초 용방면 신지리 거주 양기천(당시 23세)은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는데, 그의 가족들은 경찰의 연락을 받고 구례읍 봉성산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또한 용정리 거주 강대봉(당시 32세).강대의(당시 25세) 등도 구례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다가
봉성산 공동묘지에서 사살된 뒤 매장되었다.  
조사결과, 용방면의 희생자 중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3명이다.
이밖에 본 사건과 관련하여,
다른 지역에서 군경에게 체포된 후 구례지역으로 연행되어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승주군 황전면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1948년 11월에 군경에 의해 구례로 연행되어 사살되었다.

1948년 11월 27~28일경 12연대 소속 군인들이 황전면 금평리 주민들을 소집했고,
그 중 손맹수(당시 19세). 황삼석(당시 19세).정순영(당시 20세).최동석(당시 30세).
손형식(당시 22세).최봉석(당시 20세).최종규(당시 19세) 등
약 12명을 구례로 연행하여, 섬진강 양정지구와 서시천변(서시교 아래)에서 집단사살하였다.
승주군 황전면 거주 희생자 중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7명이다.


12연대장 백인엽





서북청년회 출신을 주로한 17연대는 1948년에 창설되었다.
당시 수도방위 임무를 수행하는 최정예 부대로 키워졌다. 초대 연대장은 백인엽白仁燁 장군.
여순사건 당시 구례지역에 주둔했던,
12연대 부연대장 백인엽은 그렇게 17연대장으로 영전되어 간 것이다.
그리고 백인엽은 한국국군史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백인엽은 평양에서 진남포 쪽으로 28km떨어진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1922년에 태어났다.
유명한 장군 백선엽이 그의 친형이다. 명문 군인가족이다.

1950년 전쟁 중에 백인엽은 최연소(27) 사단장이 된다. 낙동강 방어선의 중동부 전선인
안강~기계에서 북한군 12사단과 766부대에 궤멸적 타격을 주고 이 지역을 사수했다.
백인엽의 17연대는 또한 서울탈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 결과 백인엽은 장군 진급과 동시
정보국장으로 영전했고, 17연대는 2사단에 예속된 후 저격능선전투에서 중공군을 격파하고
그 용맹을 과시했다. 한국전쟁 당시에 그는 전설적인 군인이었다.
그도 잠시 이마에 먹물을 새기는데 바로 후배 박정희 때문이었다.

5.16 쿠데타 이후 뇌물, 부정축재 혐의를 받고 교도소에 전격 체포, 수감되었다.
최근으로 보자면 그가 뉴스에 오르내린 일이 있는데, 대표적인 사학비리재단이었던
인천대학교, 인천전문대학, 선인재단 등은 그가 설립한 재단이다. 정부에 환수 당했다.
현재로서는 아름다운 말년이라 보기는 힘들지만 전반적으로 영광을 누렸다.
바로 그 백인엽이 1948년 11월 15일부터 구례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책임자 백인기이다.
그의 진술을 들어보자.


성명 / 백인엽
조사일 / 2008. 5. 26
조사장소 / 진실화해위원회
소속 / 제12연대 (부)연대장

* 진술내용
- 부대이동과 작전 / 군산에서 12연대 1대대, 3대대 1천여명 병력을 데리고 광주 도착,
계엄령 소식 들음. 김백일의 공격명령 받고 순천-여수 진압함.
백운산→ 구례 → 심원 → 화개장으로
반군 추격 뒤 백인기 연대장과 구례에서 임무교대 후 군산으로 복귀함.
11월 15일 백인기 연대장 사망 당일 원용덕 명령으로 구례로 들어가 한 달 정도 작전함.
12월 크리스마스 전후로 17연대장으로 구례를 떠남.
- 지휘.명령체계 / 당시 12연대는 2여단 소속으로 원용덕 2여단장 지휘를 받음.
그러나 전투경험이 있는 5여단장 김백일의 명령이 더 중요했음.
- 작전 수립 / 광주에서 백선엽, 김백일이 광주에 파견된 미 임시군사고문관
브라운 소령과 협의해 진압작전 수립함.    
- 토벌과 소개작전 지침 / 특별한 작전개념들 지시받은 적 없었음.
- 군법회의 / 사단급 이상에서 군법회의 실시. 진압작전 당시 여단에서도 군법회의 했음.
- 구례중앙국민학교 기습 / 여순 사건 발발 후 한 달이 지난 11월 19일 새벽 반군이 세 방향에서
12연대 주둔지인 구례국민학교 습격, 12연대가 반격 후 남원, 화개장, 구례 구역 세 방향으로 추격,
본인은 한 시간 정도 남원 방향으로 직접 추격 나간 뒤 학교로 복귀함.  
- 민간인 희생 관련 / 12연대가 여수 진압 뒤 송석하의 3연대가 여수에 주둔하면서 민간인 희생
많았다며 소문이 좋지 않았다고 들음.
12연대는 군인들을 상대로 전투했지, 민간인을 처리하지 않음.
- 포로 처리 / 체포한 반군 처리는 여단에서 파견된 1개 소대 헌병대에 넘김. 체포된 민간인들은
남로당원들로 경찰에 넘김.
- 즉결처분권 / 진압작전 당시 즉결처분권 없었음. 즉결처분한 적도 없었음.
군인이 즉결처분권을 민간인에게 행사했다면 위법이었음.
- 미군 관련 / 김태선 치안국장이 좌익장교 명부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
이승만은 로버츠에게 명부 제공, 미 군사고문단과 숙군 작업 협의함.
광주 토벌전투사령부에서 임시고문단이 작전권 보유, 병력이동과 장비 지원을 고문관과 협의.
 병력이동은 고문관 지시 없이도 가능했음. 여수 진압 뒤 지리산 추격 작전 시 12연대에 파견된
미 임시고문관이 화엄사까지  동행했음. 연대장 사망 후 구례 주둔 시 미군고문관은 없었음.


12연대는 군인들을 상대로 전투했지, 민간인을 처리하지 않음.
12연대는 군인들을 상대로 전투했지, 민간인을 처리하지 않음.
12연대는 군인들을 상대로 전투했지, 민간인을 처리하지 않음.

백인엽의 이 진술은 어쩌면 그에게는 진실일 것이다.

12연대 부연대장이었던 백인엽은 사건 당시 구례에서 진짜 우익은 단 한 명 뿐이었으며,
체포된 민간인들은 대부분 남로당원으로 남로당의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1999. 10. 17. 방영)

하지만 사망 확인 165명, 추정 800명, 기억으로는 2,000명에게 그리고 그 유족들에게
백인엽의 진술은 참을 수 없는 지독한 모독적인 발언이다.
토금리 주민의 한 사람은 분명히 말했다.

"당시 군부대는 12연대로 우리 마을 사람들은 모두 연대장의 이름을
머리 속 깊이 새겨놓고 잊지 않고 있다."


14연대 김지회 그리고 조경순





* 여순사건 주모자 김지회, 홍순석을 사살한 공로로 상금을 받는 제 3연대장 함준호중령
   사진 안은 김지회의 처 조경순.(사진 캡션은 전적기념관의 문구 그대로 임.)

검색결과 위키백과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지회(金智會, ? ~ 1949년 4월 9일)는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육군 장교로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의 주동자이다.
[생애]
본래 좌익 사상을 가진 인물로서 강동정치학원 전신인 평양학원 대남반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1946년 말에 남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신상과 경력은 알 수 없다.
월남 후 육군사관학교를 3기로 졸업하고 남조선국방경비대 장교가 되었다. 신원보증인은
시조 시인 이은상이었다.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은 미군정 내에서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세력과 출범 예정인
대한민국 정부 간의 유혈 충돌이 일어난 제주 4·3 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다.
1948년 10월 19일에 토벌대로 제주도에 투입될 예정이었던 14연대가 출항 준비를 위해
여수시에 머물다가 군 내부에서 진행 중이던 숙군 작업과 제주 파병에 부정적이던
남로당 계열 군인들이 여수시를 점령하고 이튿날 순천시까지 진격한 사건이다.
이때 14연대에서 중위로 복무하고 있던 김지회가 반란군을 지휘했다.
14연대는 본래 광주에 주둔한 4연대 소속 1개 중대를 차출하여 모병제로 창설되었다.

창설 당시 실무를 맡은 김지회가 이승만과 박헌영 중 누구를 존경하는지를 물어서 박헌영을
존경한다고 답한 군인만 뽑아 14연대에 좌익 군인들이 많았다는 주장도 있다.
김지회는 남조선로동당 당원으로서 14연대 대전차포 중대장을 맡고 있다가, 10월 19일에
지창수가 주도한 반란이 우발적으로 일어나자 홍순석과 함께 반란군 세력을 이끌었다.

이후 지리산으로 들어가 이미 입산해 있던 이현상의 유격 부대와 연계하여 토벌군과
교전을 벌였다. 덕유산과 지리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펼치던 중 1949년 4월 9일에 남원군
방면 지리산에서 토벌대의 공격을 받아 총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은 채 다른 곳으로
이동하다가 사망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훈장 3급을 수여받았다.

김지회를 검색하면 조경순이라는 이름이 함께 등장한다. 몇 가지 자료를 조금 각색하면 이렇다.

조경순趙敬順은 1929년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광주의료원 간호부로 근무하고 있었다.
1948년 7월 육사 3기 중위 김지회가 광주의료원에 입원했다. 조경순은 담당 간호부였다.
조경순은 젊은 장교와 사랑에 빠졌다. 김지회의 퇴원 후에도 매주 여수를 찾았다.
14연대의 반란 이후 조경순은 김지회와 함께 지리산으로 입산한다.
그녀는 소총 개머리판 없는 기관단총을 들고 다녔고 머리는 단발이거나 단발퍼머였다.
김지회가 사살된 뒤 토벌군에게 생포되었다.
이후 한동안 한국군 정훈국에서 라디오 대북방송에 활용되었다.
1949년 9월, 조경순은 의식 전향 거부로 사형 집행당했다. 그녀 나이 20세.

검색해보면 http://www.sandlebaram.com 라는 사이트에 '김지회의 최후'라는 글이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질 않는다. http://blog.naver.com/muchuck/20011662590 에서 가지고 왔다.


김지회의 최후

지리산 지구 전투 사령부는 홍순석, 김지회 등 반군 지휘부를 포착하기 위한 요로 매복작전에 돌입했다.
소규모로 분산한 반군들을 지리산을 뒤져 찾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던데다 그들이 반드시
먹을 것을 찾기 위해서라도 산기슭의 마을을 찾으리라는 계산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 예하의 각 부대는 지리산 자락의 주요 마을에 포진하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다.
3연대 3대대도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에 주둔해 주변의 산간마을에 빈틈없는
정보망을 깔아 놓았는데 바로 이 그물에 반군 지휘부가 고스란히 걸려들었다.
20여 호의 자그마한 마을인 내산면 반선리의 주막집 여주인을 회유한 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3대대의 김갑순 상사는 과부인 여주인에게 화장품을 선물한 다음 "이곳은 공비들의 통로이니
주의를 기울였다가 그들이 오면 밥도 주고 술도 준 다음 가능하면 재우고 꼭 부대로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가끔씩 들르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4월9일 새벽 3시께 반선리의 청년단장이 입석리로 달려와
"지금 30명 가량의 공비들이 주막에 와서 밥을 요구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대대장은 즉시 6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반선을 향해 달렸다.
모처럼 따뜻한 밥과 술을 대하고 피곤한 몸을 온돌방에 뉘었던 반군들은
새벽의 정적을 깨고 달려오는 자동차 소리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새벽 달빛이 내리 비추는 가운데 차 위에서 일제 사격이
가해졌고 총성이 멎었을 때는 모두 17구의 시체가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또 미처 달아나지 못한 7명의 반군이 손을 들고 나왔다.
생포된 반군 7명중에는 문화부장이 있었는데 그는 토끼털로 만든 상의를 입고 농구화를 신은 채
숨져 있는 사람을 홍순석이라고 확인했다.
홍순석의 안주머니에서는 도장도 나왔다.
또 정치부장,후방부장 등도 시체더미 속에서 확인됐다.
그러나 김지회나 그의 처 조경순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고 일단 산 속으로 달아난 것으로 간주됐다.
며칠 뒤 반선보다 한결 깊은 골짜기였던 덕동리 달궁 마을에 여자가 낀 수명의 반군이 나타났다는
주민의 제보를 받은 군은 현장에 잠복했다가 문제의 여인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바로 김지회의 처 조경순이었다.
그녀에게 김지회의 행방을 추궁했지만 대답은
"반선에서 국군의 기습을 받은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한동안 수색이 계속됐으나 김지회의 행방은 묘연했다.
김상사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주민들을 모아놓고
"최근에 까마귀 떼가 모여드는 곳이 없었느냐"고 물어보았다.
한사람이 "연정(連井) 마을 골짜기에 그런 곳이 있다"라고 알려 줘 일대를 수색한 결과
시체 한 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부패 정도가 심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 쉽사리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평상복을 입고 있었고 신분을 확인할 만한 아무런 물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남원의 지전사에 갖혀 있던 조경순에게 김지회의 신체 특징을 물어본 결과
구례 전투 당시 등에 입은 총상의 흉터를 알려줬는데 사체의 등에서 찰과상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김지회라고 단정할 수가 없어 사체를 남원으로 옮겨
조경순에게 직접 보였는데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남편임을 확인했다.
결국 김지회는 반선에서 중상을 입고 달아나다 뱀사골 입구의 연정 마을 골짜기에서
숨진 것으로 판명됐다.

14연대 반란 이후 꼬박 6개월만의 일이었다.
경찰로부터 빼앗은 백마를 타고 다니며 군경에 대한 크고 작은
기습전을 지휘했던 그는 빨치산들에게는 신화적인 인물이었으며
군경 토벌대에는 그만큼 골치 아픈 존재였다.

이름없는 골짜기에서 까마귀밥이 되고 만
그의 최후는 나중에 수많은 빨치산들이 맞게 될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처 조경순은 제주도 출신으로 생포될 당시 20세의 나이였다.
그녀는 광주의 전남도리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던 중 입원한 4연대의 청년 장교 김지회를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14연대 반란이 일어나자 함께 산으로 들어간 그녀는 늘 그림자처럼 김을 따라 다녔다.
최초의 여빨치산이라 해도 좋을 그녀는 한동안 군경에 이끌려 귀순을 촉구하는
각종 주민대회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끝내 전향을 거부한 채 49년 9월 처형됨으로써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한편 홍순석,김지회 사살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던 반선 주막의 여 주인은
그 후 빨치산 잔당의 습격을 받고 돌에 짓이겨진 눈뜨고 보기 힘들만큼 처참한 모습으로 살해됐다.
보복과 경고의 뜻을 함께 지닌 행동이었다.
이 사건은 토벌부대의 보호가 미치지 못한 결과라는 점에서 대단한 아쉬움을 남긴 동시에
당시 주민들이 처했던 아슬아슬한 상황을 시사하는 예이기도 하다.


백부전과 산동애가




* 백순례가 살았던 산동면 상관마을 입구.







2개의 플레이어 중 작동 중인 위 플레이어를 멈추자.
그리고 아래 플레이어를 play 시키면 동편제 전인삼 명창이 부른 '산동애가'를 감상하실 수 있다.


백부전. 본명 백순례. 구례군 산동면 백씨 집안 5남매 중 둘째 딸.
어머니 고선옥(1987년 사망)은 이미 아들 둘을 잃은 다음이었다. 큰 아들 남수는 일제 징용으로,
둘째 남승은 여순사건으로 처형되었다. 어머니는 차마 하기 힘든 부탁을 둘째 딸에게 한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며,
셋째 오빠(백남극·여순사건 고문후유증으로 사망)대신 부역혐의로 끌려 가라고.
백순례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다.
대를 잇기 위해 세째 오빠 대신 끌려 가면서 부른 노래가 이른바 '산동애가'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 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곳을 병든 다리 절어절어
다리머리 들어오는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잘 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정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 못하고
갈 길마다 눈물 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열 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곳에 나는 간다. 노고단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너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백순례 작사.작곡 '산동애가' 전문


노래가 세상에 나올 수 있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결정적으로는 여수MBC 김남태PD를 통해서이다.

"산동애가를 채보하는 데 가장 어려움이 많았다.
노래조차 용납되지 않는 세상 탓에 구례 산동마을 사람조차 잘 몰랐다.
마을 이장도 왜 그런 것을 알려고 하느냐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다행하게도 홍순례라는 할머니가 유일하게 노래를 알고 있었다.
노래 역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백순례가 처형 당시 너무 구슬프게 노래를 부르자 군인들이 이를 전해 구전으로
퍼졌다는 정도다."
- 백순례 가족사진이 처음으로 공개됐는데 어떻게 입수했는가.
"백순례 자신이 대신 죽으면서 살려낸 셋째 오빠 백남극의 조카 며느리인 박오목(43) 씨가
장롱에서 찾아주었다.
산동마을에서 부자로 알려진 백씨 집안은 큰오빠가 지식인이었으며 백순례 씨는
학력은 없지만 매우 총명한 처녀였다고 한다."
- 부를 수 없었던 노래들이 방송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이 노래를 함께 나눌 계획은 없는가.
"이 노래의 한을 풀어줄 책임은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노래의 힘은 권력도 없애지 못한다.
그래서 구전으로 살아남아 전해진 것이다.
여순사건 등 굴절된 현대사를 노래로 통해 풀어나갔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 바람이다.

'아직도 못 다 부른 노래' 연출, 여수MBC 김남태 PD / 오마이뉴스(조호진 기자/2001.6.21)





* '큰산아래사람들' - 권경안(향지사 2000년) 사진 좌측부터 백순례, 언니 백순남-6.25 당시 행방불명,
   올케언니, 어머니 고선옥, 큰오빠 백남수, 둘째오빠 백남승, 셋째오빠 백남극


* http://jeonlado.com/v2/ch01.html?&number=7698
원 출전을 알 수 없어 답답하다가 사투리 구사 수준을 보고 전라도닷컴 기사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전화를 하니 마침 전라도닷컴 남인희 기자의 글이다. 부분을 옮긴다.


산수꽃 필 때마다 생각나는 슬픈 노래
“나를 죽이고 오빠를 살려도라 허고 죽으러 나감서 노래를 그러게 슬프게 불렀드래. 죽으러 감서
어찌게 그런 노래가 나왔을까. 그것이 신기허기도 허고 짠허기도 해.”
토벌대의 오랏줄에 묶여 처형장으로 가는 길,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굽이 도는 돌담길이
눈물에 아롱거렸을 터이다. 백부전의 산동애가(山東哀歌)는 그렇 게 생겨났다.
“징허게 영리했다고 해. 얌전허고 야물고 이삐기도 얼매나 이삐고. 꼭 부전(노리개)같이
이삐다고 이름도 부전이여.”
그 아까운 것이 그렇게 슬프게 죽었다고, 시집 와서 그런 소리를 귀엣말로 들었더란다.

“그 놈들(토벌대)은 후두두두 신 신은 채로 막 들와서는 안방에 벽장이고 뒤안에 나뭇단이고
막 쑤시고 다녀.”
그렇게 날뛰는 토벌대의 총대 앞에 지은 죄 없어도 속이 벌렁벌렁한 시절 이 있었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죄 안 지은 사람도 요리 손가락만 대면 산편(빨갱이편) 돼서 죽었어.
저 위 상위마을은 (빨갱이들이) 털어 간다고 (토벌대가) 불을 대 부러. 집을 다 태워도 왜 태우냐고
말 한자리를 못했어. 쫓겨나서 운동장에 덕석 펴놓고 한데서 살았제.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어.
그 난리 난리에 아까운 사람 다 죽었어. 똑똑하고 야문 사람 (빨갱이로) 몰아서 다 죽앴어.”

본디 산동면 일대는 임진왜 란 때 피난민들이 처음 자리를 잡은 곳으로 해방 전후에만도 13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한다. 하지만 여순사건의 여파로 무고 한 주민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으면서 지금은 40여 가구만 그 땅을 지키 고 있다.
‘집집이 제삿날이 한 날인 동네’엔 이유 없이 죽어간 떼죽음들이 있었으니, 이념 대립의 질곡 속에서
빚어진 비극은 지리산자락 골골이, 집집이 그토록 아프게 스며들었다.  


“노래만 불러도 잡아갈 줄 알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노래가 용케 레코드판으로 나와서 집에 달아 두었던 ‘스피커’에서 그 노래를
들었더란다.
“노래 를 듣는디 징헌 것이, 찌르르헌 것이 이 가슴에 딱 맺혀 부러.”  
두어 번 들은 노래가 딱 안 잊혀지더란다.
“부지깽이 두드림서도 부르 고, 보리방애 찧음서도 부르고 그러게 그 노래를 불러.
눈물이 남서도 불러.
그렁게 시어른들이 자꼬 못 부르게 허더라고.”
그 피울음 섞인 노래는 빨치산들이 부르고 다녔다는 이유로 금지곡 취급을 당했다.
구례 산동마을 사람 중에 이 노래를 기억하는 이가 드문 이유다.

“하도 징헌 꼴을 당해서 노래만 불러도 잡아갈 줄 알고 살았제.”
그런 노래를 동네 여자들 함께 올라간 노고단 몬당(꼭대기)에서 불렀더란다.
“노래를 헌디 할매들이 전부 처울고 앙겄어. 모다 그런 시상을 겪고 살았응게….
놈의 일이 아닝게….”
산수유 꽃그늘 아래 다시 부르는 산동애가.
이 세상 어딘가에 억울하고 원통한 삶이 있음을 기억하라고
마디마디 아프게 묻는 노래다.


이름을 남긴 165명 그리고 이름 없는 죽음들




* 위령제가 끝나고 국화꽃 한 송이 올렸다.

그렇다.
95% 인용과 각색의 제법 많이 긴 이 글은 여기까지다.
이런 저런 자료의 앞뒤를 비교한다고 머리 속이 뱅글뱅글 돈다.
그리고 오늘은 끝을 내고 싶었다. 더 이상 이 자료들을 뒤적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모두 165명이다.

박덕서, 김귀태, 김정환, 신종우, 박계영, 박주운, 박주완, 이기로, 이근선, 김동기,
김노선, 이한열, 박판석, 박경조, 박양조, 박종찬, 유종택, 류형, 최정용, 이강식,
임해수, 임해용, 김용근, 최재규, 손광인, 오기성, 오재만, 김종출, 김상곤, 정상권,
정덕권, 정홍권, 김귀홍, 김상옥, 박직상, 유형규, 김영곤, 이낙호, 유형윤, 유재환,
신택식, 조동길, 장계동, 고수동, 남정권, 남정삼, 박재동, 장종철, 고수동, 이강윤,
한용수, 한영수, 이종선, 남순권, 최진원, 김용철, 임문주, 정효종, 김영표, 이대춘,
손양기, 박용래, 제종수, 조종백, 이태식, 이신식, 이창식, 백정환, 백중환, 임홍규,
박원하, 강태원, 이상우, 최성호, 임정희, 최석락, 이종만, 고병길, 이돈천, 빈재순,
최삼규, 남정구, 남형우, 김희성, 강대봉, 강대의, 이상수, 박창록, 서기준, 신정모,
신재모, 장달수, 양형남, 양봉식, 양해철, 손봉석, 손맹수, 황삼석, 정순영, 남정현,
최동석, 손형식, 최봉석, 최종규, 김갑순, 정영모, 정사기, 박천행, 이영수, 김형태,
김창렬, 차양심, 고광옥, 김정오, 최차순, 전이남, 차관열, 김한구, 고명팔, 손기석,
차행열, 박팔곤, 이귀열, 박재봉, 김순동, 한순오, 구수엽, 홍언표, 구자만, 구수동,
구진회, 구쌍홍, 허상기, 허인량, 임금생, 이승옥, 이규태, 이윤엽, 이태엽, 김순희,
박양, 구학서, 김형봉, 김형복, 백남수, 백순례, 임형순, 정기훈, 임선호, 임기동,
유해동, 이상복, 유판순, 홍중환, 김용, 임연근, 강태신, 김복완, 황의회, 구윤회,
강영순, 유근창, 이정엽, 차병열.



위령제를 봉행한 날 비가 추적거렸고 멀리 서시교 아래로 새들이 날고 있었다.

"나 여기에 있다."

확인된 165명 이외의 죽음들.
추정 800명, 기억 2,000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확인하고 다룰 재주가 없다.
그냥 그런 일이 구전으로 전한다고 넘어가기엔 너무 지척 거리의 시간 아닌가.
기껏 5월 노래 한 구절로 넘어가련다.

묘비없는 죽음에 커다란 이름 드리오.




4d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