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문화곳간

봇짐 지고 길 떠나기

흰그늘 2008. 12. 30. 14:00

봇짐 지고 길 떠나기

▲ 권용정(1801∼?), ‘보부상’

아무리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마냥 멋스럽다고 말하기에 좀 머쓱해지는 것이 있다. 봇짐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봇짐의 모습은 단출하다. 대개 무명천에 이런저런 물건을 차곡차곡 개어 쌌다고는 하나 어딘지 후줄근하고 본때라곤 없다.

그래도 예전에 길 떠나는 사람이면 누구나 머리나 등에 하나씩은 이고 졌을 짐은 대부분 이런 봇짐이었다. 그래서 봇짐의 후줄근함은 옛 사람들이 집을 나서면서 겪게 될 온갖 풍상과 고단함이 남긴 주름이었는지 모른다. 실제 봇짐 싸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길 떠남을 전제로 했을 때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봇짐은 우리를 잠시 옛 사람들의 거친 여행길로 인도한다.

과것길 장삿길 야반도주…봇짐에 얽힌 슬픈 사연들
옛 사람들에게 여행은 지독한 고행이었다. 요즘처럼 마음이 동해서 떠나는 여행, 돈까지 들여가며 나서는 행복한 여행이 아니었다.
어떤 이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 기나긴 과것길을 떠났고, 어떤 이는 달리 벌어먹고 살 방편이 없이 장삿길을 나섰다. 또 어떤 이는 채귀(債鬼)한테서 벗어나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야반도주를 했고, 어떤 이는 변방의 수자리를 서기 위해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봇짐을 쌌다. 세상이 몇 번이나 바뀐 지금도 우리에게 봇짐에 얽힌 슬픈 사연들이 많다면 그건 우리 기억의 유전자에 각인된 이런 원치 않았던 여행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선, 여행을 힘들게 한 것은 길이었다. 그 시절에 길은 여행의 절친한 동반자라기보다는 끊임없는 방해꾼이었다. 명주실처럼 매끄럽게 쭉 뻗은 길은 드물었다. 큰길이라도 오가는 인적이 드물었고, 여름 한철이 지나면 금세 수풀로 뒤덮이곤 했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전에 누군가 다져놓았을 희미한 길의 흔적을 찾아 더듬더듬 발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리고 너른 들녘을 가로질러 가르마 같이 시원스레 뻗은 길도 장마철이나 해빙기면 여지없이 걸쭉한 흙탕길로 바뀌는 것도 능히 감당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런 시원찮은 길마저도 강과 내를 만나면 끊기기 일쑤였다. 비록 그 시절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과 내에는 많은 다리가 놓여 있었지만 여름철이면 이런 다리들은 거개가 사람들에 의해 뜯겨졌다(다리가 큰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을 막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철거된 다리를 대신할 나룻배마저 강이 거친 물살을 토해낼 즈음엔 강둑에서 붙어 옴짝달싹 안했다. 나그네들은 그저 강 너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발만 동동 굴릴 뿐이었다.

▲ 김홍도(1745∼1806?) ‘부부 행상’.

봇짐 곁에 매달린 여벌의 짚신들은 나그네의 증표
당시 여행은 대개 도보로 이루어졌다. 누구든 길을 나선 며칠 만에 발은 부르트고 장딴지에는 알이 박혔다. 하지만 평소 걷는 것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 이 정도는 눈 하나 끔쩍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비의 괴나리봇짐이든 장돌뱅이의 등짐이든 봇짐 곁에 매달린 여벌의 짚신들은 마치 나그네의 증표인 양 자랑스럽게 흔들거렸을 것이다.

이런 보행자들에게 가마는 엄청난 특권이었다. 가마 탑승자들은 차대 높은 고급승용차에 올라탄 사람들처럼 눈을 돌려 주변의 경치를 완상할 즐거움까지 누리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가마가 늘 쾌적한 여행을 보장하는 건 아니었다. 가마꾼들이 온갖 재주를 부려 상전의 기분을 맞추려한들 길 자체가 울퉁불퉁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요즘의 차멀미처럼 조선시대 사람들에겐 ‘가마멀미’라는 게 있었다.

이런 여독(旅毒)도 사실 여행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다른 끔찍한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특히 호랑이 같은 맹수들한테 화를 당하는 일, 즉 호환(虎患)에 비하면 견딜 만했다. 그 시절, 팔도 어디를 가나 깊은 산골짝의 길섶에는 호랑이에 물려죽은 이들을 묻은 호식총(虎食塚)이 즐비했다.

그러나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의 탐욕이라 하지 않던가? 시절이 어수선해질 때면 어디서나 나그네를 노리는 도적이 들끓었다. 그나마 큰 고갯길엔 요즘의 방범초소 같은 것이 있었는데 장성과 정읍을 잇는 고개인 노령(蘆嶺)에는 그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호시탐탐 여행자들을 노리는 눈은 도처에 깔려 어느 샌님이 주막에서 돈 꾸러미를 털렸다는 얘기는 시쳇말로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여행자 시름 달래주던 장승과 주막
하지만 그 때도 여행이란 순전히 혼잣손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결국 여러 사람들의 도움 덕에 여행이 가능했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예컨대 도로지도나 여행안내서가 없던 시절에도 노상에 늘어선 장승들이 그것들을 대신했다. 지금이야 장승이라 하면, 길에 버티고 서서 마을 지킴이 노릇을 하는 존재쯤으로 생각하지만 장승은 본디 이정표였다. 400년 전 광주 사람인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이 금강산 유람 중에 읊은 시도 원래 장승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길을 묻자 해도 말씨가 다른 타향/ 채찍을 휘두르며 괜히 말의 더딘 발걸음만 재촉하네/ 그나마 고갯마루에 우뚝 선 장승을 보고 나니/ 남은 길을 헤아릴 수 있어 초조함이 가시네>
장승에 적힌 몇 글자가 박광옥 같은 나그네들에겐 불안을 가시게 하는 살가운 몇 마디가 됐던 셈이다.

장승 못지 않게 여행자들의 시름을 달래주던 것은 주막이었다. 허름했으되 주막집은 더할 나위 없는 쉼터였다. 그곳은 단지 비바람과 추위를 피하는 곳 이상이었다. 뜨끈뜨끈한 주막의 봉놋방에 둘러앉으면 금세 방안 전체엔 요즘 웹사이트에서나 주워들을 만한 온갖 정보와 뉴스거리가 쏟아져 나오곤 했다. 게다가 주막엔 간혹 유배형을 받아 머물고 있는 선비들도 있었다. 촌부들에게 그들이 들려주는 얘기는 중노미 녀석이 밤참으로 가져다 준 막걸리만큼이나 감칠맛이 났을 터다.

지독한 고행의 끝엔 이야기보따리 한 자루 
더딘 여행속도와 예측할 수 없는 여로 등 옛 사람들의 여행에 뒤따르는 어려움은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적잖은 사람들이 이 지독한 고행을 차라리 소중한 경험으로 여겼고, 그 속에서 즐거움과 유익함을 찾으려 애썼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노정의 어디에서든 낯선 이들과 만나도 서슴없이 말문을 텄고, 고향에 돌아가 질펀한 이야기보따리를 펼칠 생각에 열심히 듣고 또 물었다.
혹, 당신이 몇 시간째 옆자리에 앉은 이와 한 마디도 섞지 않은 채 여행을 끝내고 마는 여행자라면, 후줄근한 봇짐에 얹힌 옛사람들의 여행법을 떠올려 볼 일이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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