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문화곳간

면사무소에 목욕탕을 지은 이유- 무주 공공건축프로젝트

흰그늘 2008. 11. 25. 11:44

면사무소에 목욕탕을 지은 이유
무주 공공건축프로젝트




▲ 짝수일은 여탕으로, 홀수일은 남탕으로 운영하는 목욕탕.
ⓒ 전라도닷컴




우리나라에 목욕탕이 있는 면사무소가 있을까, 없을까? ‘있다!없다?’
프로그램에 만약 이런 질문이 나온다면? 정답은 ‘있다’.

무주 안성면 주민자치센터(면사무소)엔 목욕탕이 있다.
짝수일은 여탕으로, 홀수일은 남탕으로 운영한다.

“돈 천원씩 내고 온게 좋제 항! 여그서 무주읍까지 목욕을 갈라믄
목욕비가 4천원, 차비가 4천원이여.
요 물을 짐이 펄펄 나게 디울라믄 지름값이 여간 비싸게 묵힐 것인디….”
 “시상에 어디가 이런 좋은 일이 있겄어. 우리는 감사해 죽었어.”

신촌 사는 김은월(79) 김순남(81) 할머니는 나란히 목욕을 왔다.
“사방 디가 쑤시고 아픈 삭신이 목욕탕에서는 쪼깨 풀어진당게.”

무주 안성면 주민자치센터에 목욕탕이 들어선 것은 건축가 정기용씨가 진행한
무주 공공건축프로젝트에 따른 것이다.

▲ 1층에 목욕탕을 떡하니 들어 앉힌 무주 안성면 주민자치센터.
건물 측면에 파인 동그라미· 네모·세모는 해·달·별을 상징한다. 
ⓒ 김태성 기자


삶의 질을 결정하는 공공건축

“어떻게 이 토건국가에서 이처럼 아름답고 청정한 땅이 지금껏 남아 있단 말인가.”
‘공간의 시인’이라 불리는 건축가 정기용씨가 만난 무주의 땅들은 그에게 평생 그리워하던
여인과 우연히 처음 만난 듯 번갯불이 튀는 듯한 사건이었다.


그는 무주의 자연에 감응했다. 첩첩산중 무주에서 1996년부터 2006년까지 10여 년을 매달려
면사무소에서 재래시장 요양원 납골당까지 31개의 크고 작은 공공건축을 다루어 낸 힘이
다 거기에서 나왔다.


이 과정은 최근 펴낸 《감응의 건축》(현실문화)이라는 책에 낱낱이 기록돼 있다.
<이제 농촌은 없다. 지금 농촌은 도시민들의 최후의 보루처럼 남아 있다.
살기는 모두 도시에 살면서 늙은 부모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


아직까지 무주에서 살고 있는 것이 존경스러운 사람들. 그런 이들의 삶의 질을 공공건축을 통해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를 그는 가장 먼저 생각했다.


#1층엔 치과, 2층엔 PC방-안성면 주민자치센터

1914년 4000여 개의 전통적 공동체 구조를 해체하고 일제가 재구성한 2000여 개의 행정조직이
면 단위다. ‘면서기’가 출세한 권력의 상징이 되었던 지역사회에서 면민은 다만 통치의 대상이었다.
일제시대에 연유한 기존의 면사무소 건물에는 주민을 위한 시설이 전혀 없었다.


면사무소를 농민공동체 공간으로 바꾸기 위한 밑그림을 그리면서 건축가는 면민들이 원하는 것을
먼저 물어보았다. 주민들은 다 아는데 소위 ‘전문가들’만 모르는 현실이 드러났다. 
“면사무소는 뭐하러 짓는다요. 목욕탕이나 지어주제.”

평생 농사짓느라 골병이 들어 뼈골이 쑤시는 사람들, 사방 군데 안 아픈 데가 없는 이들에겐
몸을 편히 쉴 수 있는 큰 욕조가 있는 목욕탕이 가장 큰 바람이었다.
주민자치센터 1층에 목욕탕이 떡하니 들어선 이유다.


치과도 하나 있었으면, 그래서 치과가 들어왔고 2층에는 PC방이 들어왔다.
농업경제담당  한상현(38)씨는 “이 건물은 공공건물의 표본을 무시했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라 했다.

 
덕유산을 배경으로 한 안성면 주민자치센터는 외양부터가 특별하다.
칠연폭포를 상징한 기둥과 칠연계곡을 상징한 물길을 두어 면민들이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갖도록
설계됐다.


주민자치센터는 문자 그대로 ‘면민의 집’. 앞에 둔 작은 광장에선 청소년들이 모여 노래하고 춤춘다. 널찍하게 비워둔 2층 홀은 안성면에서 열리는 결혼식의 90%가 치러지고 각종 만남의 공간이 되고
있다.


#공평한 그늘-무주 등나무운동장


무주 공공건축프로젝트의 산파 역할을 한 김세웅 전 무주군수의 고민은 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군내 행사에 주민들이 거의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어르신에게 그 이유를 넌지시 물었다. “군수는 천막 아래 비도 햇볕도 피허는디
우리는 땡볕 아래 더워 죽네! 우리가 무슨 벌 받을 일 있는가?”


사실 우리나라 어느 운동장이든 마찬가지의 풍경일 터. 헌데 ‘행사 때마다 나만 그늘에 앉았구나’
하는 각성이 군수에겐 있었다. 등나무 240여 그루를 심었다.


이제 건축가는 나무가 자라고자 하는 것을 도와주기만 하면 됐다. 등나무를 닮은 가느다란 원형
파이프를 반복하여 만들어낸 등나무그늘막은 ‘공평한 그늘’을 만들어냈다.


무주에 세계에서 하나뿐인 등나무운동장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등꽃이 피는 철엔 그 그늘 아래 향기로운 등꽃의 터널을 지난다. 야외영화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본부석에 스크린을 설치한 덕에 한여름밤엔 스탠드에 앉아, 혹은 운동장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놓고 가족끼리 벗끼리 영화도 감상한다.


“회사단합대회도 하고 친선조기축구대회도 하고 하이간 요모조모 애용허지요. 햇빛은 막아주고 바람은 잘 통하고 암만 해도 관중석이 시원헌게 오래 앙거 있게 되지요.”
무주읍 박용우(53)씨의 치하다. 인구 2만6000명인 무주가 가진 아름다운 자산이란 이런 것일 터이다.

▲ 모월 모시 우연히 한 버스 정류장에 앉게 된 낯선 사람들의 근접성을 높이고자 한 기대가
실현되고 있는 버스 정류장. ‘ㄴ’자형 의자가 놓여 있다.
ⓒ 김태성 기자


#기다림이 아름다운 집-버스 정류장

벽돌로 에워싼 형무소 감방 같은 공간, 경량 철골 위로 원색이 난무하는 정류장.
우리나라 국도와 지방도의 버스정류장의 풍경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장소를 지시할 뿐, 농촌 풍경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살풍경이다. 


건축이 주변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점을 고민한 건축가는 사람과 풍경,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어우러지게 하는 버스정류장을 만들어 냈다.
비를 막을 지붕이 있고, 버스정류장 뒤편의 풍경을 열어주는 창이 있고, 바람을 막을 벽체가 있는
버스정류장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집이 되고 방이 된다.


“보기도 좋고 앙거 있으믄 얘기허기도 좋고….” 장안리 교동마을 김용봉(62) 이장은  
‘ㄴ’자형 의자의 효용을 칭찬한다. 두 사람이 앉으면 무릎이 맞닿을 정도, 자연스럽게 손인사를
 나눌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거리.


모월 모시 우연히 한 버스 정류장에 앉게 된 낯선 사람들의 근접성을 높이고자 한 기대가
실현되고 있는 버스 정류장이다.




▲ 무주의 다른 공공건축 벽면들처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자연의 벽화를 그려내고 있는
담쟁이가 아름답다.
ⓒ 김태성 기자


▲ 차가 주인이던 주차장이 시원한 잔디마당으로 바뀌면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있는
장으로 거듭났다.
ⓒ 김태성 기자

#주차장이 사람의 광장으로-무주군청


관공서 곁엔 사람이 안 보인다. 얼핏 보면 차들이 관공서에 와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사실 우리나라 수많은 관공서의 옥외공간에서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다.
 

건축가 정기용은 무주군 청사를 혁신하면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머무르며 소통하는 공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을 반영했다.


담장을 없애고, 서로 떨어진 건물을 회랑으로 연결하고, 그 위에 파고라를 올리고 파고라엔
무주 특산물인 머루 덩굴을 울려 쾌적한 길을 만들어냈다.


넝쿨식물들은 군청 벽에도 계절에 따라 자연의 벽화를 그려내고 있다. 무주의 공공건축 벽면들을
담쟁이들에게 내어주면서 건축가는 이렇게 이야기를 건넸더라 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 주기 바란다”고.


전에는 주차장이었던 곳에 시원한 잔디마당이 펼쳐지고, 그 끝엔 계단식 단을 두어 작은 무대가
되게 했다. 축구를 하는 아이들이 있고 노래자랑이 열리고 야유회와 문화마당이 펼쳐진다.
주차장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있는 장으로 거듭난 것이다.


관공서 건물에서 돌출된 중앙 출입구는 흔히 VIP 차량이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권력 확인의
장소이기 마련. 무주군청은 이곳을 탈권위주의의 공간으로 삼아 무주의 민물어종을 키우는
수족관을 두었다. 관공서에 진입하면서 모래마주 뿔그럭지 피리 같은 소박한 물고기들의
인사를 받는 것은 신선하고 유쾌하다.




▲ 별이 쏟아지는 땅, 무주의 오지 부남면에 들어선 천문대.
하늘의 별과 마을을 연결한다.
ⓒ 김태성 기자

#별과 마을을 잇는다-부남면 천문대

오지라고 꼽히는 무주, 그 중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가 부남면이다.
“오지라 별도 잘 뵈이고 오지라 반딧불이도 날아댕기고 한마디로 청정부남”이라고 자랑을 하는
대소마을 유영길(56)씨.


“저것들은 어깨동무허고 있는 것 같제라 잉.”
그이가 가리키는 것은 천문대. 원래 이곳엔 부남면 면사무소과 복지회관, 그 뒤로 테니스장과
복지회관이 흩어져 있었다.

서로 다른 재료로 서른 다른 방향을 향해 등을 돌린 듯 앉은  건물들은 싸우고 나서 외면하고 있는
이들 같았다.
무관한 건물들의 관계를 맺어주기 위해 연결 통로를 만들고 중심에 배치한 것이 천문대.


별이 쏟아지는 땅. 마치 사막에서처럼 별을 덮고 자는 땅에 들어선 천문대는 하늘의 별과 마을을
연결하고 우주와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


인구 1500명의 작은 시골 마을 부남면. 한여름에 래프팅 하려는 이들이 가끔 들르던 이 곳은
‘별도 보러’온 방문객들로 생생한 활기를 더하고 있다.


▲ 자연과 건축이 ‘따로 또 같이’ 어우러지는 상생의 풍경. 적상면 향토박물관.
ⓒ 김태성 기자

#자연과 건축이 상생하는 풍경-적상면 향토박물관

다수의 보편적 욕구를 ‘지상의 풍경’으로 만들어 내면서 건축가가 고뇌한 것은 새 건축과 기존의
건물과 산천과 수목들이 만나는 장면이었다.


적상면 향토박물관은 그런 결과물이다. 건축은 영원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낮게 임했던
전통건축처럼 낮게 자리한 박물관. 그 터에선 나무들과 땅속에 박힌 돌들까지 서로를 존중해
주는 듯 싶다. 자연과 건축이 ‘따로 또 같이’ 어우러지는 상생의 풍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 참 편안해요. 정원도 부러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주변환경을
마당으로 끌어들인 것이 마치 담양의 소쇄원 같기도 하구요.”


박물관 앞에서 자그마한 펜션을 꾸리고 있는 여행작가 최상석(44)씨의 말이다.
박물관을 나오는 긴 데크에 서면 마을의 오랜 당산나무에 시선이 닿는다. ‘나무 한 그루만큼만
건축을 할 수 있다면!’그런 바람을 가진 건축가의 의도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과 곤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생명을 아우르는 집이 바로 나무 아닌가.


그 당산나무 아랜 너른 평상이 있다. 그 평상에서 풍경을 바라본다. 땅에서 띄워 놓은 건물은
풍경을 차단하지 않고 기둥 사이로 뒷풍경을 보듬는다. ‘산천에 걸맞고 시간을 견뎌내면서
사람들이 수용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건축’의 현장이 이곳에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금 박물관은 내부 전시물을 채우지 못한 채 굳게 닫혀 있다.


모듬살이 공동체의 정신이 이어지는 공간으로


“농촌 풍경에도 어울리고 주민들의 삶의 질도 높이는 건축”을 위해 주민과 소통하며 주민의 삶을
배려한 아름다운 공간들. 사람과 사람을, 자연과 사람을,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잇는
무주 공공건축프로젝트의 공간들은 당연히 처음 지어진 뜻을 온전히 담아내는 공간으로 활기차게
살아 있어야 할 것이다.


이웃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모듬살이 공동체의 정신이 이어지는 그곳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오래된 미래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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